14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체홉의 단막극
이태원에 있는 극장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14명의 배우가 체홉의 다섯 개의 단편을 공연한다. 연극을 보러 가기에는 낯선 동네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연장에 도착했다. 열다섯 번째 배우를 자청한 사회자가 무대에 등장해,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찾아온 보람 있도록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데, 그 인사말, 거짓은 아니었다.
사회자는 막간에도 무대 위에 등장해, 무대가 전환되는 동안 간략한 공연 설명을 곁들였는데, 오늘 보게 될 작품 <청혼>과 <곰>은 1888년에 쓰인 작품이고(무려 120여 년 전!), 당시에도 관객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고, 체홉의 단편 중 지금까지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곰>은 러시아에서 굉장히 모욕적인 욕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것도, 공연의 이해를 돕는 설명이었다. 공연을 보러 와서 연극의 설명을 듣는 일은 익숙지 않은 일이지만, 사회자 덕분에 공연의 기대감과 이해가 높아져 만족스러웠다.
이런 설명이 체홉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체홉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유명한 극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매년 극장에서 그의 작품 <세 자매> <벚꽃 동산> <바냐 아저씨> <갈매기> 등이 무대에 오른다. 공연 축제가 열리면, 그의 작품 혹은 그의 작품을 재해석한 공연들을 보는 일도 어렵지 않다. 유려한 장편 외에도 단막극을 많이 써내서, 연극을 전공하거나 공부한 학생에게 체홉의 작품은 교과서 같은 존재다.
<백조의 노래> <청혼> <곰>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 <불행> 다섯 편의 작품이 세 편씩 옴니버스로 공연된다. 이 중 <담배의 해로움에 대해서>는 국내 초연되는 작품이고, <불행>은 체홉의 단편소설을 낭독하는 자리다. 즉, <14인(人) 체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오랫동안 체홉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게 꿈이었다는 오경택 연출가는
“체홉의 작품은 배우와의 합에 따라 색을 달리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를 증명하듯이 친숙한 혹은 낯설지만, 매력 있는 배우들의 체홉 공연은 이미 희곡으로 본 적 있고, 알고 있던 이야기도 새로운 색깔, 감각으로 전한다. 박정자, 최용민, 전미도 등 무슨 배역을 맡든 믿음직스러운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반가운 자리기도 하다.
곰이라고?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다니!
막이 오르면, 심약한 남자가 청혼하러 여자의 집에 찾아왔다. 단막극 <청혼>이다. 러시아에서는 청혼할 때, 신부의 집에 찾아가 신부와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구하고, 재산목록을 공유하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헤프닝을 그린 작품이다. 결혼을 앞두고 사랑이라든가 미래라든가 본질적인 것은 안중에도 없고, 토지 문제로 왈가왈부하느라 결혼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극이 풍자하고 있는 결혼, 사랑 문제들은 오늘날의 관객이 봐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담배의 해로움에 대하여>는 음악학교 교장인 아내를 두고 있는 소심한 남편이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자선 강연을 하는 모노드라마다. 강연은 애초의 주제에서 벗어나 점점 산으로 가는데, 강연에 딱히 소질이 없는 남자는 급기야 자기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아내에게 붙잡혀 살며, 인격적인 모욕까지 감수하고 있는 이 남자는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좀 쉬고 싶을 뿐이에요.”라고 관객에게 하소연한다.
그때, 아내의 등장으로 강연 분위기는 살벌해지고, 남자는 관객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내가 보고 있으니, 강연을 잘하는 것처럼 호응해 달라는 거다. 아내를 속이기 위한 남자의 진짜 연기는 아까 가슴을 치며 속마음을 하소연할 때보다 훨씬 더 애처롭고 우스꽝스럽다.
<청혼>과 더불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희곡 <곰>도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남편을 잃고, 매일 상복을 입은 채 슬픔에 빠진 여인 앞에, 남편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사내가 등장한다. 당장 돈을 갚으라고 거칠게 떼를 쓰는 사내는, 여자를 모욕하며 급기야 결투를 벌이기까지 이른다. 서로 곰 같다고 비난하면서 말이다.
“곰이라니! 아니, 그런 말을!” 이 아웅다웅 다투던 두 사람은 불현듯 서로가 죽이기 아까울 만큼 매력적이라는 걸 깨닫는다.
체홉의 희곡이 훌륭한 것은, 이 과정이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고 설득력 있다는 점이다. 요즘 로맨틱 코미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정, 원수였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100년 전 체홉의 연극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두 배우의 출중한 연기력과 매력으로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고 말았으니, 사연이 궁금하다면, 이태원 프로젝트 시야에서 확인해보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체홉의 연극을 보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고대 아테네 때에도 할아버지들이 소년들을 보며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있나”하고 혀를 찼다는데. 여자에게 배신당했다고 사랑을 부정하는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있었고, 상처 받을까봐 꽁꽁 마음을 숨긴 채 상대방의 마음만 떠보는 여자도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결혼 제도나 양식은 바뀌어도 결혼이라는, 사랑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거다. 또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을 내팽겨 두고 외피만 보는 사람들이 있어, 체홉은 100년 전에도 이런 희곡을 썼을 테고. 체홉 연극에서 이런 시간성을 발견하는 일이 꽤 흥미로웠다.
극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나는 되는 일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고,
“내 인생은 끝났다”고 말하는 소위 ‘루저’들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희망 없는 사람들이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100년의 세월, 러시아라는 국경선도 넘어, 여기 이곳의 관객들과 모종의 동질감을 형성한다. 저 시대에도 노처녀가 될까 두려워하고, 자식의 결혼문제로 골치를 썩고,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 미리 허풍을 부려대는, 영락없이 보통 사람들이 말한다. “사는 거 참 피곤하지?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다들 이렇게 살아간다.”
당시에도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고 무릎치고 웃어댔을 관객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 사람들도 지금 우리처럼 공연을 보며 여유를 갖기도 하고,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삶의 모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기도 했을 테다. 체홉이 그만큼 대중적인 공연을 써냈기 때문에, 100년 후에도 이렇게 무대 위에 살아남았구나 싶다. 체홉의 또 다른 작품 <갈매기>에서 작가 트레플레프의 대사가 떠오른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연극은 진부한데다 편견으로 가득해요. 막이 오르면 인공조명 아래, 3면의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걸어 다니고 옷을 입는 모습을 그 잘나신 배우님들, 신성한 예술의 사도들이 연기합니다. 속물스러운 장면과 대사들 속에서 가정의 일상사에 써먹을 좀스럽고 뻔한 도덕이나마 건져 내려고 애쓰는 걸 보노라면, 그리고 천편일률적인 연극들 속에서 하나같이 똑같고 똑같으며 똑 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걸 보노라면 저는 모파상이 자신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속물스러운 에펠탑으로부터 도망쳤듯이 멀리 도망치고 싶습니다.”
아마 체홉 그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대사일 테다. 체홉의 작품이 어떻게 100년 넘게 살아남았는지 여기에 답이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작가의 작품을 배우들의 좋은 연기로 만나는 기회. 7월 7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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