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따뜻한 바람이 노오란 개나리 꽃잎을 간지럽히던 어느 봄날, 나는 강남의 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봄날을 만끽하는 듯 멋들어진 옷을 입고 깔깔 거리며 화사한 웃음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어깨는 축 늘어지고 마음속은 아직도 한겨울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은행의 PB들을 상대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강의를 오기로 했던 강사가 일정을 펑크를 내는가 하면, 교육 프로그램이 마구 뒤엉켜 풀어갈 방법이 없었다. 은행 담당자에게는 “이런 식이면 곤란해요.”라는 말을 얼마 전 들은 터였다.
신용이 생명인 이 업계에서 나는 점점 답답함에 억눌려 숨을 쉬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길을 걷던 나는 우연히 하나의 간판과 마주하게 되었다.
‘○○신령’
점을 보는 곳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건물에 들어서자 점집 입구에는‘연예인△△부부가 다녀간 집’이라는 푯말이 자랑스레 붙어 있었다.
‘점 좀 보는 집인가 보군!’
나는 난생 처음 점집이라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점장이는 내 면상을 한번 쭉 훑어보더니 “오복 중에 4복이 들어 있는 가장 좋은 시간에 방문을 하셨군.”이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내 마음을 뒤흔드는 온갖 말(거의 위협에 가까운)들을 쏟아냈다.
“시작은 좋아. 그때는 성공을 맛보지만, 자기 것이 안 돼. 끝이 잘 안 풀리는 살이 끼었어. 부적을 써야겠어!”
“얼마입니까?”
“500만원!”
점장이는 해독이 어려운 한자 100자를 조그만 쪽지에 하나씩 적어 100장을 주며 말했다.
“책상 서랍에 이 쪽지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100일째 불에 태워! 그러면 만사가 다 형통할거야”
결국 부적은 300만원에 낙찰되었다. 점집을 나오면서 나는 ‘그래도 200만원 벌었네’ 하며 협상의 달인인 나 자신을 칭찬했다(사실은 떨떠름한 위로에 가까웠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부적을 서랍에 넣어 두고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부적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여전히 활기로 넘쳐 났지만, 내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나를 뺀 모든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끄러운 대로를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교회’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힘에 이끌려 무작정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른 평 남짓한 작은 교회였다. 성경을 읽고 있던 목사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저희 교회에 오신 첫 방문객이십니다.”는 말과 함께 긴 시간 동안 나와 상담을 응해 주었다. 그날 나에게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 나는 ‘사람’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사람 때문에 분노가 일고, 사람 때문에 일정이 꼬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무 전문가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지만 내 프로그램에 정작 ‘사람’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후 나는 사람에 집중했다.
돈으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했다. 그러자 사람 때문에 흐트러졌던 일들이 하나둘 제 궤도를 찾기 시작했다.
내 프로그램에는 사람, 즉 인간의 삶과 행복, 불행과 같은 철학이 믹스되었다. 이전에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지혜가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돈을 좇고, 실패하고, 돈에 울고 웃는가?’ ‘돈에 매여 인생이 고통이 되는가?’ ‘어떻게 해야 돈에서 자유로워지며, 돈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돈과 인생에 눈을 뜬 것이다. 이후 새로운 프로그램 설계에 몰입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개념이 바로 ‘뉴플러스(New Plus)’다. 약자를 따서 NPTI(NewPlus Type Indicator)라는 재무 심리 진단 프로그램도 완성되었다. 적성 검사 유형 NBTI와 혼동하지 마시라. 순수 국산이다.
이 책은 뉴플러스 개념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NPTI를 통해 얻어낸 수많은 사람들의 진단 결과를 바탕으로 돈의 문제를 풀어갈 것이다. 대학 강단과 서울시, 각종 공기업, 기업체 등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녹아 있다. 그동안 1000가정이 넘는 부부가 상담을 받았고, 3000명 이상이 진단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았다. 문자나 전화를 통해 달라진 자신의 인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집을 깨끗이 청소했어요.’
‘1년 동안 모아서 가족 여행을 다녀왔어요.’
‘남편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에요.’
‘상담 받을 때는 우울했는데, 지금은 희망으로 넘쳐요.’
상담 이후 내 제자가 되겠다며 프로그램을 배우는 이들도 많아졌다.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절망으로 흔들렸던 내 인생은 감사로 가득 차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이 모든 지식들이 내 머릿속에서 나온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혼을 내려놓고 내가 믿는 그분께 의지한 결과다.
소중한 이 결과물들을 통해 매달 월급을 받아도 항상 마이너스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직장인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횡령 사건, 돈 때문에 벌어지는 부부간, 가족 간의 갈등들이 사라지길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평생 웃을 수 있는 길을 찾기 바란다. “돈에 울고 웃던 철부지가 항상 웃는 바보가 되었어요.”라고 고백하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Story in Book
‘돈’이라는 이름의 탈출열차
“내가 김 사장 집에 우유 배달하러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집에는 여자가 있어야 돼. 또 김 사장 혼자 여섯 살짜리 딸을 어떻게 키울 거야?”
나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잠시 당황해서 음료수를 옷에 흘릴 뻔했다.
“전 혼자 살지 않아요. 어머니가 계시는데…”
“엄마는 엄마일 뿐이지. 엄마가 아무리 좋아도 각시보다 낫나?”
옆에 있던 박 기사가 끼어들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더군다나 우리 사장님은 이제 겨우 서른여섯인데.”
그렇다. 나는 ‘이제 겨우’ 36살에 6살 딸 하나를 키우는 이혼남이다. 내가 스물여덟 살에 결혼한 첫 아내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아이를 낳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내는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온 후 집안으로 들어서며 화를 발칵 냈다.
“정말 창피해서 못살겠어.”
결혼식 뒤풀이에서 술을 한 잔하고 온 듯 얼굴이 약간 상기된 그녀는 손에 든 가방을 소파에 내던졌다. 나는 멍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이 가방 보여? 내가 이 나이에 이딴 가방이나 들고 다녀야겠어? 이 옷 보여? 내 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촌스러워. 정말 참을 수 없다고.”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묵묵히 TV를 바라보았다. 소파는 너무 낡아 내가 앉은 곳이 푹 꺼져 있어 몸이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의 그런 자세가 자기를 무시하는 몸짓이라 생각했다.
“내 말 듣고 있어? 이 옷뿐만이 아냐! 내 구두, 목걸이, 뭐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결혼식장에 가는 서른도 안 된 여자가 이처럼 싸구려 짝퉁이나 하고 가야겠어? 정말 지겨워! 나는 이런 끔찍한 생활을 원하지 않았다구.”
1년 후 그녀는 ‘끔찍한’ 결혼 생활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의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우아한 욕구를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라거나 허황된 욕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탓할 뿐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으면서 취업 준비를 할 때 구두 공장을 하던 큰 매형이 찾아왔다.
“처남, 취직할 때까지 우리 공장에 와서 잠깐 일 좀 도와줘.”
“제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나요?”
“쉬운 일이니까 그냥 와서 도와주면 돼. 알바비는 넉넉히 줄게. 두어 달만 도와주면 돼.”
그 두어 달이 잠깐 사이에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나는 처음에 딱 한 달만 하리라 생각했으나 어느 날 달력을 보니 1년이 지났고, 또 어느 날 달력을 보니 10년이 지나 있었다. 매형의 구두 공장은 유명 메이커의 하청을 받아 납품하는 가내 수공업이었다. 값비싸게 팔리는 클래식 남자 구두의 앞등에 재봉틀로 일일이 무늬를 새기는 작업이었다. 수작업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루에 30개 이상 만들기 어려웠다. 그래도 단가가 비싸 한 사람이 한 달에 300만원씩은 너끈히 벌었다. 비록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기름밥 먹어가며 일했지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대기업 사원 부럽지 않았다. 매형은 손재주가 좋은 직공 5명을 데리고 일하면서 공장을 차츰 불려 나갔다.
나는 처음에 허드렛일도 하고, 배달도 하고, 서류 정리도 하면서 무늬 기술을 배웠다. 2년쯤 지나 견습공이 되었고 한 달에 150만원을 벌었다. 5년차에 2급 직공이 되어 300만원을 벌었다. 월급제가 아닌 도급제였기에 누구든 자기가 일한 만큼 돈을 받아갔다. 악착같이 10시간씩 30일 일해서 1000만원 가까이 벌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공장 반장님의 소개로 아가씨를 만났다. 반장님은 그녀에게
“곧 사장님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믿었는지 그녀는 내게 호감을 보였다. 나 역시 그녀가 싫지 않았다. 또 실제 나는 사장이 되었다. 2-3년 전부터 몸이 아파온 매형이
“이제 나는 쉬면서 건강에 신경 좀 써야겠다. 처남이 이 공장을 물려받아 잘 키워봐.”하며 공장을 내게 물려준 것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모은 돈과 아버지가 보태 준 돈, 장인어른이 빌려준 돈을 보태 공장을 인수했다.
2-3년 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직공들도 열심이었고 매형도 간간이 일을 도와주었다. 거래처 사람들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두 주문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한 달에 1000개였던 것이 800개로 줄었고, 또 몇 달이 지나자 700개로 줄었다. 다른 공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500개 이하로 떨어졌다. 8개월 사이에 반 토막이 난 것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탐문해 보니 원인은 한 가지였다.
“중국에서 들여온다네.”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국산 제품이 1개에 1000원일 때 중국제는 300원이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차이가 전혀 없었다. 나 같아도 국산을 쓸 이유가 없었다. 직공 4명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가고 한 명만이 내 곁에 남았다.
수입은 한 달에 200만원으로 떨어졌으며 곧 150이 될 수도 있었다. 집을 늘리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빚 독촉하는 전화가 여기저기에서 걸려왔다. 단 1년 사이에 찾아온 변화(사실은‘몰락’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였다. 줄어든 수입과 빚쟁이들의 독촉에 스트레스를 받던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24평 아파트를 팔아 아내에게 주고 딸과 함께 13평 아파트로 이사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 결혼할 자신은 없었다. 빈 음료수 병을 내려놓고 다시 재봉틀을 켜자 우유 아주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내가 일하는 우유 집하장에 경리 아가씨가 있어. 그 아가씨가 아주 참하더라고.”
“그래요? 참한 아가씨라면 벌써 누군가 채 갔을 텐데요.”
나는 재봉틀을 돌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게 말이야, 실은 그 아가씨가 돌싱이거든.”
“돌싱이요? 아니, 우리 사장님더러 이혼녀와 결혼하라는 말입니까?”
옆에 있던 박 기사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돌아온 싱글’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반 년 후 나와 그녀는 동시에 재혼을 했다. 짧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그녀는 공장에 나와 일을 했다. 청소를 하고, 경리를 보고, 거래처를 찾아가 물건을 따오고, 구두를 차에 실어 납품하고, 딸아이도 정성껏 돌보았다. 또 손재주도 좋아 공장에서 나를 도와 일을 하는데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그녀 덕분인지 공장은 조금씩 좋아지고 수입도 많아졌다. 하루는 내가
“13평은 좀 좁지 않아? 곧 둘째도 낳아야 할 텐데.”라고 묻자
“네 명이 살아도 13평은 좁지 않아요. 그리고 둘째는 조금 있다 낳아요. 우선 돈을 더 버는 게 중요하잖아요.”
1년 후 직공은 두 명으로 늘어났고 물량도 늘어났다. 중국산 제품과 경쟁하는 방법은 오직 품질과 성실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내는 영업 실력도 좋아 중소기업을 직접 찾아다니며 판로를 개척했다.
결혼 후 가정에도 행복이 찾아왔다.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돈 걱정없이 미래를 설계해 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딸도 새엄마가 좋았는지 엄마라고 부르며 잘 따랐고, 아내도 딸을 살갑게 대했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이것이 바로 행복이구나’ 하고 느끼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내가 장부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A기업하고 B산업하고 돈이 좀 밀렸어요. 가서 결제를 받아와야겠어요.”
“전화해서 입금해 달라고 말하지.”
“그 사람들은 만날 전화하면, 낼 보내 줄게요 하고서는 감감무소식이에요. 직접 가서 닦달을 해야 받아낼 수 있어요.”
“아무렴 그렇지요, 얼굴을 봐야 한다니까요.”
저만치에서 여태 조용히 있던 조 기사가 거들었다. 아내는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갔다 올게요. 차는 내가 가지고 갈게요.”
7시쯤 공장 문을 닫고 집으로 갔을 때 딸아이 혼자 놀고 있었다.
“엄마 아직 안 왔니?”
“응.”
“엄마한테 전화 좀 해 봐라.”
딸아이는 신난 표정으로 내 휴대전화를 받아 버튼을 누르더니 잠시 후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 전화가 꺼져 있대.”
그 후 서너 차례 전화를 했으나 아내는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A기업 사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오늘 오후에 자네 와이프가 와서 수금을 해 갔네. 나도 사정이 어려운데…. 있는 돈 박박 털어서 외상값 전부 갚았네. 자네 와이프 정말 야박하더군. 뭐, 급히 돈 쓸 일 있어?”
“얼마나 주셨는데요?”
“820만원 주었지.”
“어휴, 많이 주셨네.”
“말도 말게,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곤란하지,”
하지만 그날 저녁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밤새 잠을 못자고 뒤척이다가 딸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공장으로 출근했다. 일손이 잡히지 않아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우유 아주머니가 왔다.
“집에 사모님이 없던데 어디 갔나?”
“그, 그게…”
“일 보러 나갔나?”
“네.”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사모님이 내게 저번 달에 200만원 빌려갔어. 오늘 갚는다고 했는데….”
“?”
나는 순간 현기증이 들었다. 오후에 거래처 세 곳에서 전화가 왔다. 그 사장들은 모두 흥분한 목소리였다.
“자네 말이야, 나랑 거래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나?”
“왜요?”
“왜요라니? 어제 자네 와이프가 와서 한바탕 소란을 떨었네. 내가 급전을 빌려 겨우 돈을 갚았어. 직원들 보기 창피해서 줘서 보내 버렸네. 앞으로 자네와는 거래 끝일세.”
당황한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식당 사장이 공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 공장에 매일 점심을 대는 식당 주인이었다.
“김 사장님. 저번 달에 사모님이 300만원 빌려가셨어요. 오늘 준다고 했는데 사모님이 어디 가셨나요?”
그렇다. 그녀는 ‘어딘가’로 갔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가 은행과 새마을금고로 가서 잔고를 확인했다. 모두 0이었다. 이제까지 돈은 전부 아내가 관리했다. 내가 직접 관리하는 통장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 돈은 100만원이 조금 넘을 뿐이었다.
머릿속이 멍한 상태에서 ‘사모님이 돈을 빌려가셨어요’라고 말하며 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 모두 8명이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 중 차용증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소문은 널리 퍼진 후였다. 그들은 착한 이웃에서 일순간에 험악한 빚쟁이로 돌변해 있었다.
다음 달에는 보험회사 5곳에서 해약 통지서가 날아왔다. 내 생명보험과 종신보험, 딸아이 교육보험, 아내 생명보험, 공장 화재보험이 모두 해약되었고 지금까지 부은 돈은 전부 0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기적금 3개도 0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0이 되었지만 아내에게는 수천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부리나케 등기소로 갔다. 천만다행으로 집은 아직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내가 알 수 없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아파트는 진즉 은행에 저당 잡혀 있었지만 그 숫자가 대출한도의 턱 아래까지 차 있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아파오는 배를 움켜쥐고 허위허위 달려 은행으로 갔다.
“지난달에 대출을 늘리셨네요. 원래 13평은 7000이 한도인데 다른 분이 보증을 서서 1억으로 늘렸어요. 한도가 꽉 찼네요.”
손을 대지 않은 것은 공장 보증금 하나였다. 그러나 그 돈은 겨우 2000만원에 불과했다. 아내가 주장해서 보증금을 낮추고 월세를 늘렸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남은 전재산이었다. 그것까지 손을 대면 들통이 날까 싶어 마수를 뻗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나와 딸이 불쌍해서 남겨 놓은 것일까?
나는 헛된 일인 줄 알지만 처갓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의 행방을 물었다. 역시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모르시겠지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애걸복걸을 한단 말인가? 협박을 한단 말인가? 설교를 한단 말인가? 나는 한 가지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오면, 차를 갖다 놓으라고 말하세요. 도난 신고를 하면 곧 잡히니까.”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파트 주차장에 낡은 내 차가 세워져 있었다. 범퍼 오른쪽에 새로운 흠집이 나 있었다. 나는 그 흠집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나는 아무것도 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이제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도 손해는 아냐. 정말 궁금한 것은 사랑보다 돈이 더 중요하고, 소소한 행복보다 돈이 더 중요하고, 가족보다 돈이 더 중요하고, 정직한 삶보다 돈이 더 중요하고, 참된 인간성보다 돈이 더 중요할까? 그런 삶을 살면 정말 행복할까?”
이 어리석은 넋두리에 현명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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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는 왜 돈 걱정에 잠 못 드는가 정우식 저 | 인사이트북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 문제는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 계속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심각성을 인정하지만, 그 본질적 원인을 명쾌하게 규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책은 재무심리진단 프로그램 NPTI를 통해, 돈 문제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그들을 치유하는 내용을 담았다.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고쳐가는 사람들의 스토리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였으며, 돈에 얽힌 심각한 문제점들을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풀어내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해결책에 접근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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