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철학 여행!
세상의 기원을 밝히고 사고의 폭을 넓히는 행복한 통찰
파티가 끝난 뒤 나는 콜레주 드 프랑스를 나와 보슬비가 내리는 파리의 밤 속으로 들어섰다. 나는 에콜 거리를 따라 내려가 레스토랑 발자르로 향했다. 그곳에서 맛있는 슈크르트를 먹고 생테 밀리옹 포도주도 한 잔 마셨다. 그런 다음 아파트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책을 소재로 한 대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오늘밤의 초대 손님은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 이론물리학자, 그리고 불교 승려였다. 세 사람은 심오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바로 300년 전 라이프니츠가 처음 주장한 주제였다. 왜 이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
파리의 센 강 너머
21세기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파리. 나는 서로 알고 지내던 친구를 통해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리는 작은 파티에 초대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바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아흔 번째 생일파티였다.
파티가 열리기로 약속된 저녁, 나는 모베르 광장Place Maubert과 센 강 사이에 있는 16세기풍 아파트를 나와 팡테온을 향해 생 자크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나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잊힌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 귀욤 뷔데Guillaume Bude의 동상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의 웅장함에 비해 건물 내부는 어딘지 초라하게 비교가 되는, 조금은 낡은 모습이었다. 파티장에는 10여 명의 유명 학자들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언론 관계자들이 있었지만 카메라나 마이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에게 제공된 부르고뉴 포도주 몇 잔에 둘러싸인 채 나는 레비스트로스와 직접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내 시원찮은 프랑스어 시원찮거니와,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지성과 실제로 만난다는 놀라움 때문이었는지 대화가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몇 분이 지난 뒤, 사람들이 레비스트로스에게 인사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즉석에서 느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몽테뉴는 노화는 매일 우리를 조금씩 소멸시켜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다가오면 그저 인간의 절반이나 4분의 1쯤만 가져가는 것이죠. 그렇지만 몽테뉴는 고작해야 쉰아홉 살까지 살았을 뿐이고, 그러니 오늘 내가 느끼는 것처럼 이렇게 늙었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이 먹었다는 것, 이것은 내 실존에 있어 가장 흥미롭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산산이 흩어진 홀로그램’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실체는 사라졌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연설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비스트로스는 ‘대화’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자신이 현재 처한 죽어가는 자아eroded self, 즉 ‘진짜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이상적인 자아, ‘비유적 나’ 사이에 있는 대화였다. 야심만만한 새로운 지적 계획을 준비하는 후자가 전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계속 그렇게 나아가야 해.” 그렇지만 전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야. 오직 너만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다음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무익한 대화를 그만두고 자신의 이 두 자아를 다시 한 번 잠시 동안 ‘합쳐질 수 있도록’ 자기를 도와준 파티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짜 나’가 궁극의 소멸을 향해 계속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파티가 끝난 뒤 나는 콜레주 드 프랑스를 나와 보슬비가 내리는 파리의 밤 속으로 들어섰다. 나는 에콜 거리를 따라 내려가 레스토랑 발자르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맛있는 슈크르트를 먹고 생테 밀리옹 포도주도 한 잔 마셨다. 그런 다음 내 아파트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책을 소재로 한 대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진행자는 나도 알고 있는 프랑스 텔레비전의 유명인 베르나르 피보Bernard Pivot였다. 오늘밤의 초대 손님은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 이론물리학자, 그리고 불교 승려였다. 세 사람은 심오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바로 300년 전 라이프니츠가 처음 주장한 주제였다. 왜 이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의 해답을 제시했다. 잘생겼지만 웃음기 없는 젊은 사제는 차가워 보이는 금속테 안경에 도미니크 수도회 특유의 순백색 두건 달린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모든 실체는 신성한 근원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사제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부모의 행위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듯이, 우주 역시 창조주의 행위를 통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신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는 또 신이 속세의 관점에서는 근원이 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빅뱅 이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물리학자는 백발이 성성한 장년으로, 밝은 파란색의 스포티한 외투를 입고 왠지 어울리지 않는 웨스턴 스타일의 가는 넥타이를 매 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초자연적인 말도 안 되는 설명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좌불안석인 모습이었다. 우주의 실존 문제는 순수하게 우연한 양자 파동의 문제라고 그는 말했다. 마치 진공상태에서 입자와 반입자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처럼, 우주 전체의 근원도 그와 같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왜 이 세상이 무가 아니라 유인지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양자이론이다. 우리의 우주는 공허 속 양자 파동으로부터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두 정리가 된다.
불교 승려는 붉은색 옷 위에 노란색 가사를 걸치고 맨 어깨를 드러낸 채 방금 면도한 듯한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주제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태도도 제일 유쾌했다. 체면을 차리듯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사제, 성질 급해 보이는 물리학자와 달리 얼굴에는 행복한 빛이 보였고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승려는 자신은 불교도로서 우주에는 그 시작이 없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시작 같은 것은 없다. 무는 어떤 것이 존재했다는 의미의 정반대되는 개념이므로, 결코 어떤 존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에서 우주를 탄생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승려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시작이 없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으로 가장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었다. 별다른 무리가 없으면서도 단순한 설명이었다.
“그러면 해답을 찾아낸 것인가요?” 베르나르 피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승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근원에 대한 질문을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 질문을 통해 실체의 본성을 탐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주란 무엇인가? 이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무가 아니다. 그리고 우주는 무가 아니다. 그렇지만 텅 빈 공허와 아주 흡사하다. 사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실제로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다. 세상은 꿈이나 환상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 속에서 우리는 그 유동성을 고정되고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렇게 해서 욕망과 교만, 그리고 질투심이 생겨난다. 우리의 형이상학적 실수를 고쳐가는 과정에서 불교는 일종의 치유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불교는 우리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제공한다. 또한 존재의 수수께끼 문제를 해결해준다. 왜 세상은 무가 아니라 유인가? 라이프니츠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의 질문이 전제로 하고 있던 것은 어떤 것이 정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환상이었다.
승려의 이야기를 들은 피보가 대꾸했다. “아, 그런가요?” 그리고 다시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치켜 떴다.
“아, 물론이죠!” 승려가 대답했다. 여전히 밝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쌀쌀한 파리의 밤거리로 나섰다.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며 산책하기 위해서였다. 아파트를 나선 나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센 강 쪽으로 향했다. 강 너머로 벽을 떠받치고 있는 아치형 구조물과 함께 노트르담 성당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는 강 하류 쪽 둑을 따라 조금 걸어갔다. 그리고 보행자 전용으로 차가 다니지 않고 거리의 악사들만 있어 상대적으로 조용한,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퐁데자르Pont des Arts, 즉 예술의 다리에 도착했다. 나는 다리를 반쯤 건너다 걸음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밤중의 파리를 바라보았다.
내 앞에는 그 불교 승려가 언급했던, 거대한 공허를 수놓고 있는 현란한 불빛들이 펼쳐져 있었다. 저것은 정말 비현실적인 꿈이며 공허한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사르트르가 주장했던 것처럼 거대하면서도 끈적거리는, 부조리한 것인가 아니면 조금 전 텔레비전에서 사제가 말한 것처럼 신성한 선물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 모든 것은 그저 설명할 수 없는 양자의 우연에 불과한 것인가?
세상이 왜 무가 아니라 유인가라는 문제는 생각해보니 정말 골치 아픈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게 좋겠어. 어쩌면 언젠가 그 주제에 대해 책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군.
나는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저 아래 어두운 물속으로 던져버리고 집으로 향했다.
_ 『악마의 사전』, 앰브로즈 비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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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홀트> 저/<우진하> 역22,5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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