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가족제도에 대한 의문 - <셰임(Shame)>
‘수치심(Shame)’에 관하여
이 영화는 외피에 드러낸 허무의 냄새와 우울의 감성만으로도, 하늘의 별들을 자신의 육체까지 끌어당겨 놓을 인력(引力)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과민한 캐릭터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가령,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은 마치 애인처럼 등장한다. 현대 사회의 인물들이 모두 외롭고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기행을 일삼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그 보다 좀 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서없이 보일지 모르는 이 칼럼에도 나름대로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유쾌하고 재밌게 쓰려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상의 평과 상관없이 ‘내가 재밌게 보고 훌륭하다 여긴 영화’만 쓴다는 것이었다. 이 두 원칙을 그럭저럭 지켜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오늘은 첫 번째 원칙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재미를 포기할 만큼, 오늘 쓰고자 하는 영화는 훌륭하다. 비록 내가 진지하고 분석적인 글을 써서 지구상에 남아있는 나의 모든 독자 13명이 실망하고 떠나더라도, 이 영화의 격에 맞는 평 하나쯤은 기록돼야 한다는 게 나의 심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엄숙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현재 유통되는 <셰임>에 대한 거의 모든 평은 극찬일색이다. 고맙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그 극찬의 화살이 다른 과녁에 맞아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 구조를 띠고 있다. 물론 표면에 드러난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만 보더라도 괜찮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이 영화는 외피에 드러낸 허무의 냄새와 우울의 감성만으로도, 하늘의 별들을 자신의 육체까지 끌어당겨 놓을 인력(引力)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과민한 캐릭터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가령,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은 마치 애인처럼 등장한다. 현대 사회의 인물들이 모두 외롭고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기행을 일삼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그 보다 좀 더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현재까지 생산된 이 영화에 대한 지배적인 감상과 평은 이러하다.
주인공에게 문신처럼 달라붙은 육체적 욕망과, 이를 해갈하기 위해 시도하는 휘발성 강한 성적 행위들, 주인공은 이것이 ‘수치(Shame)’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는 오늘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성에게 뜨거운 점액 같은 시선을 묻히고, 이를 거부하지 않는 상대 역시 그에게 자신의 결핍된 욕망을 드러낸다. 자신의 손가락에 (결혼) 반지가 껴져 있더라도 말이다.
이렇듯 영화는 덧없는 공기와 시린 영상만으로도 관객을 어느 정도 만족 시키고 있다. 그러나 언급했듯, 이것은 이 영화의 외피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의 내피가 ‘가족제도에 대해 근원적 의문을 제기한다’고 가정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현대인의 허무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수면 위를 흐르는 물결이고, 수면 아래서 휘몰아치는 정서는 바로 ‘오이디푸스적 욕망’이다. 남자 주인공은 여동생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둘이 어린 시절 관계를 가졌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주인공이 성에 탐닉하는 것에 ‘수치’를 느끼지만, 근원적으로는 동생과의 관계를 다시 욕망하고 있다는 것에 ‘수치’를 느끼는 것이다. 동생은 백치 같은 여성이며, 주인공은 동생의 백치미에 이끌려 행위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그 행위를 지속할 수 없기에 의미 없는 성행위와 자위에 탐닉한 채 살아간다. 마치 다른 객체(사람이든, 사물이든)와의 행위가 유일한 응급치료제인 것처럼(그래서 영화는 초반에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해 언급하고, 주인공은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한 인물처럼 그려진다). 적어도 내가 느낀 영화는 그러했다. 아마 감독이 좀 더 직접적인 작법을 추구했다면, 제목으로 Love Affair(정사)의 색채를 투영할 수 있는 Family Affair를 택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주의 깊게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것이다. 스티브 맥퀸은 절대 직접화법을 구사할 사람이 아니다. 그라면 표면적 오해를 받더라도, 이중적 구조를 띤 제목인 ‘Shame(즉, 수치)’를 택했을 법하다(물론, 나의 상상이다).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전 오늘 밤 떠나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는 작은 마을의 우울이 없을 거예요. 뉴욕에서 내가 해낼 수 있다면(make it) 난 어디서도 해낼 수 있을 거예요.” | ||
관련태그: 셰임, Shame, 스티브 맥퀸, 마이클 패스벤더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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