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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 우리의 소리를 추구한 ‘작은 거인’

김수철의 꿈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낸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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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4년 겨울, 그토록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의 타계로 충격에 휩싸인다. 삶의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에게 생전 ‘이제 음악 하지 않고 공부 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 것이 괴로웠다. 부친의 사후 그는 ‘음악공부도 공부니까 열심히 하겠다’고 속으로 아버지와 다시 약속했다. 그리하여 부친의 한을 소리로 풀어주려는 뜻에서 1986년부터 이듬해까지 2년간 황천길 테마의 국악을 쓰게 된다.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정작 요즘 가요에서 한국적인 소리를 찾아보기는 힘들죠. 1989년에 발표한 이 앨범에서 김수철은 태평소, 아쟁, 대금 등을 통해 전통의 소리를 재현하고,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를 표현했습니다. 한국의 소리를 담은 앨범 <황천길>을 소개해드립니다.


김수철 <황천길> (1989)

1980년대 중반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나도야 간다」, 「젊은 그대」 등 가공할 히트 연발로 당대 최고인 조용필에 버금가는 인기를 과시한 김수철은 대중가요에 머물지 않고 국악의 영역을 넘보기에 이른다. 그는 이미 그룹 ‘작은 거인’(이 밴드이름 때문에도 그에게는 이후 ‘작은 거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시절인 1981년, 「별리」와 같은 곡을 통해 국악과 가요의 접목을 시도한 바 있다.

지극히 음악적이었지만 민족적 사고의 발로가 작용한 이유였다. 훗날 그는 “작은 거인 시절 내가 과외로 만든 영화소모임에서 <탈>이란 8㎜ 영화를 제작해 프랑스청소년영화제에 출품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그 영화가 본선에 진출하면서 거기에 들어갈 영화음악을 신경 써서 만들어야 했다. 이때 ‘우리 것을 보여줘야 한다. 양악을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스타덤을 어지러이 만끽하는 순간에도 그때 들었던 의문과 수치심(“왜 우리가 허구한 날 외국의 것만 해야 하나. 정말 창피했다!”)을 잊지 않았다. 가슴 속의 ‘우리 것’에 대한 가눌 수 없는 호기심을 확인하고 국악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자각하고는 마침내 그 음악적 욕구의 실천에 나선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배워야 했다. 방송활동 때문에 낮 시간을 내지 못하자 밤에 짬을 내 열심히 거문고 가야금 아쟁 피리 등 국악 연주자들에게 사사받는 방식으로 그는 서서히 소리에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1987년 <영의 세계>라는 제목의 대한민국 무용제 음악으로 사용된 곡들로 발표한 국악 연주음반은 본격적인 국악앨범 탐구의 서막이었다. 여기서 피리로 연주해 처연함의 극치를 선사한 곡 「비애(Sorrow)」와 대금 연주의 「삶과 죽음(Life & death)」 등은 적어도 대중가요에 전통의 숨결이 부재한 것을 아쉬워한 사람들에게는 ‘국악을 통한 새 조류의 대중음악’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제공했다.


그러한 접근은 2년 뒤의 앨범 <황천길>로 완성의 문을 두드린다. 황천길은 주지하다시피 인간이 죽을 때 들어가는 길이며, 그것을 음반타이틀로 내건 것은 우리 전통 정서의 정체인 한(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1984년 겨울, 그토록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의 타계로 충격에 휩싸인다. 삶의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아버지에게 생전 ‘이제 음악 하지 않고 공부 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 것이 괴로웠다. 부친의 사후 그는 ‘음악공부도 공부니까 열심히 하겠다’고 속으로 아버지와 다시 약속했다.

그리하여 부친의 한을 소리로 풀어주려는 뜻에서 1986년부터 이듬해까지 2년간 황천길 테마의 국악을 쓰게 된다.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의 피날레로 사용된 「풍물」을 포함해 그 무렵 만든 8곡을 묶어 발표한 앨범이 바로 <황천길>이었다.

곡마다 우리의 대표적 전통악기인 태평소, 아쟁, 대금, 피리 등이 중심에 서서 다양한 소리풍경을 그려낸다. 앨범의 첫 문을 여는 1986년 작곡의 「황천길」에서 태평소의 강한 음색은 어떤 가수의 보컬보다도 더 진하고 두꺼운 중심 선율을 품고 곡 전체를 헤쳐 가면서 애절함의 극치를 선사한다. 이보다 더한 진혼곡은 없다. 마지막에는 이 곡의 리메이크 버전을 붙여 수미를 맞추면서 앨범의 테마가 아버지에 대한 헌정임을 명백히 한다.

대금으로 연주한 「나그네」(1987년 작곡), 음의 색깔이 진하기로 따지만 대적이 어려운 아쟁소리가 전편을 아우르는 「한」(1986년 작곡), 피리의 독주가 중반 신시사이저의 현대 음과 편안하게 조우하는 「외길(피리)」 등 수록 곡 전편을 흐르는 그 절절한 비감(悲感)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김수철의 일렉트릭 기타와 신시사이저 그리고 국악 연주자들이 연주한 악기의 어울림은 곧 국악과 양악의 퓨전이요, 전통과 현대 정서의 조화였다.

그 외에도 「슬픈 소리」는 국악인 성창순의 창이 감동을 부르며,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에서 피날레로 사용되었던 곡 「풍물」에서는 두레패사물놀이가 참여한 사물놀이 속에서 곧 그의 전문분야가 될 기타산조를 최초로 선보이고 있다. 김수철의 국악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었던 기타산조는 일렉트릭 기타를 통해 사물놀이 장단에 즉흥성을 부여하면서, 서양악기로 우리의 전통음악을 연주한다는 사고를 실현한 쾌거였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그 주제음악을 녹여낸 <기타산조> 독집앨범을 내놓는다)

전통악기들의 소리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본연(本然)과 뿌리를 홀대하고 있었는가를 일깨워준다. 죽은 자의 위무인 동시에 산 자들한테는 ‘우리가 정작 우리 자신을 모른다!’는 자성의 촉구라고 할까. 최소한의 반성이 깃든다면, 한국 사람이 이 앨범의 소리에 둔감하기는 어렵다.

동양과 서양 사람들에게 같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하고자 한 김수철의 꿈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낸 앨범이다. 돈 되는 대중가요를 버리고 흥행이 어려운 국악으로 미련하게 달려간, 그 지순한 자기전복은 이 수작 음반으로 조그만 보상을 받는다. 앨범은 ‘예상대로’ 철저히 망해 1억의 빚이란 고통과 좌절을 안기며 그를 눌렀지만 그 영예의 보상을 누르지는 못했다.

글/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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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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