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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기억 사이의 공백, 헛헛한 삶의 여백 메우기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오늘은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수록된 작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읽어드릴 구절은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가 있는 소설인데요. 지금 읽어드릴 구절이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호 작가 스타일에 가장 비슷한, 유머러스한 부분이어서 먼저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소리 나는 책
오늘 ‘소리 나는 책’에서는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수록된 작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읽어드릴 구절은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이라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가 있는 소설인데요. 지금 읽어드릴 구절이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기호 작가 스타일에 가장 비슷한, 유머러스한 부분이어서 먼저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슈퍼에 담배를 사러 갔는데 워낙 짧은 반바지를 입어서 그게 반바지인지 팬티인지를 놓고 슈퍼 여주인과 실랑이를 하는 장면부터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돈을 받고 담배를 꺼내려는 부인이 한참동안 내 행색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담배만 받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나가려던 나는 슬슬 짜증이 치밀어오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열쇠 때문에 이미 한번 잡친 기분이었다. 부인은 특히 내가 입고 있는 반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총각,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그렇게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면 어떡해?” 처음에 나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짧으면 무조건 팬티 아니면 수영복, 혹은 기저귀라고 생각하는 세대이니까 그냥 혀 몇 번 차고 등 돌려 잊어버리겠거니 생각했다. “이거 반바지입니다. 담배 빨리 주시겠습니까?” 제대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던 그때, 내 말은 거의 ‘다,나,까’로 끝나곤 했다. 고치려 해도 잘 고쳐지지 않았던 화법. “무슨 소리야! 빤스 맞구만. 젊은 사람이 우길 걸 우겨야지.” 그제야 남편도 자리에서 일어나 부인 옆에 앉았다. 덩치도 왜소하고 이마도 좁고 눈 꼬리만 길고 가늘게 관자놀이 쪽으로 뻗은 의심 많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는 아예 그들 부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빤스라고 생각하면 생각하라지’하는 심정이었다. 한데 담배를 안 주니, 돈은 냈는데… “이게 최신 유행이라 아주머니가 잘 모르실 겁니다. 올 여름엔 다 이런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닐 겁니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부인을 설득하려고 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저/문학과지성사)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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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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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젊은 재담꾼 이기호의 세번째 소설집. 신작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는 제11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을 비롯한 여덟 편의 소설이 수록돼 있다. 이번 소설집은 작가가 기억과 기억 사이의 공백을 ‘이야기’로 보수해가면서 삶과 ‘이야기’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을 규명하는 데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