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5월의 광주. 30년 전 그날의 사건을 아프게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때는 사랑했으나, 지금은 멀리서 이따금 소식을 전해 듣는 사이. 지금은 지긋한 중년의 남녀지만 30년 전 이 둘은 젊었고, 함께 있었다. 광주에 울려 퍼지던 사이렌 소리가 이 둘을 갈라놓았다.
“아, 저기 저 여자는 푸르른 날의 나, 윤정혜!”
“저기 저 남자는 푸르른 날의 나, 오민호구나!”
“비록 지금은 똥배도 나오고 트림도 꺼억꺼억 해대지만,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사이!”
인사동에서 옷을 만들고 있는 윤정혜, 그리고 스님이 된 오민호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엉키고 엉킨 인연의 매듭을 풀어나간다. 젊은 두 사람이 사랑하고, 갈등할 때에도 30년 후 중년이 된 두 사람이 멀리서 말을 더한다. “아, 저 때, 나는 정말 어리석었구나!” “아, 저 때, 나는 무엇 때문에 당신을 떠나지 못했나!”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무대는 그렇게 그려낸다.
3년째 이 연극을 관람하고 있지만, 언제나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연극이 담고 있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지나간 소중한 젊은 날이 있다는 것. 그때는 의도치 않게 우리는 어리석었고, 소중한 것을 놓치기도 했다는 것을 오민호, 윤정혜 두 사람을 통해 보여준다.
연극 <푸르른 날에>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2012년 공연 당시 전석 매진행렬을 이어가고, 모든 연극상을 휩쓸면서 평단과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까닭은, 이 연극에서 그날의 사건이 단순히 역사적인 차원에 놓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과거를 돌아봤을 때, 후회 없는 사람이 있을까? 과거에는 누구에게나 잡았어야 했는데 놓치고만 기회가 있었고, 붙들어야 했는데 놓쳤던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극히 불완전한, 지극히 보편적인 과거를 가지고 산다. 30년 전 그때, 광주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푸르른 날에>가 그리고 있는 ‘과거’의 시간에 낯설어할 사람은 없다.
연극 <푸르른 날에>는 오늘날까지 잊지 못하는, 지금의 삶에 끈질기게 영향을 끼치는 그날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그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에 휘말린 한 연인이 있었다.(이들 뿐이랴!)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사랑을 나누지 못한 연인이 있었다. 오늘날까지 그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 그리고 거기에 있다.
진심과 재미, 두 마리의 토끼 잡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영화로, 만화로, 소설로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 연극의 가장 큰 미덕은, 그날을 다룬 어떤 작품보다 가장 재미있다는 거다. “명랑하게 과장된 통속극”이라는 연출의 말처럼, 공연은 시작되자마자 대사로, 슬랩스틱 코미디로 객석을 흔든다. 개인적, 시대적 아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장황한 문어체 대사나 연극적인 연출을 통해 때론 낯설게, 때론 파격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즉,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제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관객이 듣지 않으면, 지루해한다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연출가는 이러한 ‘전략’으로 관객을 집중하게 한다. 그렇게 웃기면서도, 그날에 관한, 우리의 푸르른 날에 관한 진심을 전달해낸다. 이게 연극 <푸르른 날에>가 그토록 호평을 받으며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까닭이다.
3년 전, 처음에 이 연극을 봤을 때는, “아니, 5.18을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 밤 12시 나는 보았다 /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 전투 경찰이 군인들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 밤 12시 나는 보았다 /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이 차단되는 것을 //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배우들이 김남주의 시 <학살2>를 강렬하게 낭독할 때, 가슴 깊숙이 울려대는 전율은 매회 거듭해도 변함없었다.
내년에도 보고 싶다 <푸르른 날에>
푸르른 날은 점점 멀어질 것이다. 공연이 거듭 될수록, 그날을 이야기 속에서 접한 사람들이 객석을 채우게 될 거고, 30년 전의 일이지만 나중에는 먼 역사 속의 일처럼 여겨지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오늘날 5월 18일에 광주를 떠올리지 않고 그저 5월의 하루로 넘기듯이 말이다. 공연이 끝나고 마련된 연출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극 <푸르른 날에>는 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면서, 생명을 연장하려 한 것 같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들, 혹은 혁명을 꿈꿨던 청년들, 군인들 손에 맞아 죽어가는 친구를 지켜주지 못해 평생 마음 빚을 지고 사는 소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겠다며 그날 도청으로 향한 사람들, 자신의 비겁했던 과거 때문에 평생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 - 극 속에 나오는 여러 사람 중 오늘날 당신의 마음을 두드린 게 누가 될지 모르겠다.
그 누구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이 연극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어딘가에는 그날의 사건으로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이 있다는 것, 평생 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게 그들만의 아픔으로 기억되지 않는다면, 연출가가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진심이, 본질이 객석에 닿은 것이리라. 차범석 희곡상을 받은 정경진 작가가 썼고, 연출가 고선웅이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이명행, 김학선, 정재은, 정승길 등 초연 당시 배우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더 반가운 무대다. 내년에도 보고 싶다. <푸르른 날에>. 남산예술센터에서 6월 2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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