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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가 다시 찾아왔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우리 곁에 데미안이 있어 다행이다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 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는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대신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강한 울림을 주는 서문에 이어 싱클레어가 동네 소년 프란츠 크로머에게 사과를 도둑질했다는 허풍을 떨면서 시작되는 『데미안』을 처음 읽던 날, 나는 늘 공정하고 따스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품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싱클레어와 그 타락하고 비열한 세상을 함께 엿보았고, 동화 속 선악의 이분법과 권선징악의 법칙은 ‘어린이의 세계’에서만 통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그랬듯이 내면으로부터 ‘알을 깨라’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누구도 어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무렵, 내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년배보다 발육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몸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나이 또래가 몸이 ‘성장’하고 정신이 ‘성숙’하는 시기라면, 분명 내 몸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정신은 성숙하는 걸 두려워했다. 누구도 어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성장하는 내 몸은 알을 깨고 성숙하라고 소리쳤지만, 도무지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또 몸이 커지면 맞는 옷을 새로 사면 그만이지만, 정신이 성숙해지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도 몰랐다. 아니, 무엇을 위해 성숙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싱클레어가 말하듯 ‘너무 낯익었던 어머니라고 하는 세계이자 아버지라고 하는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밝은 세계와 어둠의 세계, 금욕의 세계와 탐욕의 세계를 오가며 방황하던 싱클레어가 그랬듯이 나도 ‘착한 아이’인 척하면 얻을 수 있는 많은 보상을 포기했다. 옳은 일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던 단순한 세상에서 모두의 이익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결국 그 나이 때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면서 나 역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스스로 세상 밖으로 힘껏 발을 내디뎠다기보다는 시간에 떠밀려 세상 밖으로 밀려 나왔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솔직한 표현이다. 마음속 혼란을 해결하지 않은 채, 너무도 빨리 성장한 몸이 서둘러 뛰어가는 바람에 성년의 문을 지나치고 말았다.
몸이 불어났기 때문에 알은 깨졌을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마흔이 된 지금도 나는 스스로 알을 깨는 방법을 모른다. 이제야 스스로 알을 깨는 새가 되려 하니, 나에게 마흔은 제2의 사춘기나 마찬가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 ||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 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는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대신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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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주
열심히 살면 행복하다는 신념을 가진 전형적인 워커홀릭. 마흔을 앞두고 열심히 뿐 아니라 잘 살고 싶다며 고전을 들었다. 속독과 다독을 통해 며칠이고 마음을 빼앗길 명문장을 캐내는 것을 즐긴다. 현재 서울신문 경제부 기자. 연세대에서 영문학·심리학을 전공했고, 동국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 석사를 받았다. 2012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UNC) 저널리즘대학에서 방문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지내고 있다.
우경임
읽기를 놀이 삼아 자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박한 학습이었다. 딱히 잘못된 것은 없는데 인생의 실타래가 꼬인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용을 써 봤자 더욱 복잡해질 뿐이었다. 행간에서 답을 찾고자 빨간 줄을 정성껏 그어가며 읽었다. 정독을 즐기는 작가는 현재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연세대에서 사회학·심리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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