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절에는 환자가 아프면 피를 대량 뽑아내는 ‘사혈’ 요법이 의사들이 하는 기본 치료법이었다. 항생제가 없던 때에는 발에 염증이 생기면 발을 잘라내는 것도 다반사였다. 만약 요즘 의사가 그런 치료를 하면 쇠고랑을 찬다. 이제는 컴퓨터로 조작되는 로봇 팔이 실제보다 열 배 확대된 인체 영상을 보면서 수술을 대신하고, 환자의 유전자를 분석해 개인에게 맞는 약물을 골라주는 시대다. 덩달아 환자들의 의학 지식은 20세기 의사를 뛰어넘고 있다.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했다. 많은 과학적 성과가 그렇듯이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면 발전의 단계가 몇 계단을 훌쩍 뛰어넘는다. 해부학의 발견이 인간의 몸을 어림짐작 관념의 대상에서 실존으로 옮겨놓았고, 청진기의 발명은 의사가 환자를 보기만 하던 것에서 들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 물리학적 진보였다. 통증 없는 수술을 가능케 한 마취의 발견, 헌 심장을 새 심장으로 바꾸어준 심장 이식 등도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들이다.
21세기 초 의료 분야에서 그러한 혁신을 꼽으라면 당연히 유전자 의학이다. 이 분야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를 생각하면 의사인 나도 어지럽다. 의료의 근본을 흔들 학문이자 메가트렌드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그 냄새를 맡고 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서 대장내시경 검사 결과, 대장암 세포가 섞여 있는 여러 개의 혹(용종, 茸腫)이 발견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자. 이 경우 대장암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용종 제거는 물론 대장을 광범위하게 잘라내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그는 항암 치료가 잘 듣고 다른 장기로 전이되거나 재발할 확률이 낮은 유전자형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다행히 그는 대장의 절반 정도만 잘라내는 식으로 수술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 유전자 검사로 치료 방향이 달라진 사례다.
지난 2003년 미국 국립 보건원(NIH) 등이 인간 유전정보가 담긴 유전체(게놈, Genome) 지도를 공식적으로 완성했다고 발표한 지 10년이 되었다. 개인의 유전적 특성에 따라 차별화된 진료를 하는 이른바 ‘맞춤형 의료’가 이제 싹을 틔우고 있다. 병원에서는 똑같은 약을 먹어도 효과가 달리 나타나는 환자들에 대해 이제는 유전자 검사로 유전적 특성에 따른 치료를 한다.
약을 복용하는 데도 유전자 검사는 상당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유전적으로 약발이 듣지 않는 유형에게는 일반적인 용량의 두 배를 처방하기도 한다. 그래야 겨우 약효를 낼 수 있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체질로 치부할 일이었다.
유전자 검사는 암 조기 진단과 예방에도 활용되고 있다. 유방암으로 유방절제술을 받은 환자에게 유전자BRCA1 돌연변이 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다면, 다른 쪽 유방에 유방암이 생기거나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60에서 80퍼센트다. 예방의 처치가 필요한 이유다.
수술 범위 결정이나 약물의 선택을 의사의 경험이 아니라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하게 될 것이다. 불필요한 의료 행위를 줄이고 최적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유전자 정보와 진료 지침을 통합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장수인이 급증하는 ‘100세 시대’에는 질병 관리 방식도 획기적으로 바뀐다. 지금까지는 환자가 증상이 생기면 직접 병?의원을 찾아가 문제와 해결책을 찾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첨단 IT 기술로 의료 기록과 개인의 고유 생활습관, 유전적 특성, 건강정보가 통합되면서 ‘환자 맞춤형 예방의학’ 체계로 패러다임이 달라질 것이다.
초고령 장수 사회는 ‘만성 질환 반려 시대’다. 노년의 질병은 노화의 파생물이자 오랫동안 이어진 잘못된 생활습관의 축적물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개의 질병이 씨줄과 날줄이 엮이듯 서로 영향을 미친다. 당뇨병이 뇌졸중을 일으키고, 고혈압이 만성 신장병을 야기하는 식이다. 이에 따라 건강과 관련된 모든 기록과 정보를 한곳에 모아 시간 경과에 따른 변화와 트렌드를 잡아내고 조기 관리에 나서야 한다. 이른바 ‘헬스 아바타’ 프로젝트다. 환자의 각종 의료?바이오 정보와 의료 전문가 그룹의 다양한 진단?처방 프로그램이 사이버 상에서 만나는 새로운 장(場) 플랫폼(platform)이 필요한 것이다. 그곳에서 환자는 수천 명의 의사를 한꺼번에 만나는 셈이고, 의사는 수만 명의 환자 데이터를 활용해 질병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프로그램의 중심에 설 것이 유전자 정보다.
1,000달러만 내면 개인의 모든 유전자를 분석해주는 의료 서비스가 상용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암환자에게 가장 잘 듣는 유전자 맞춤형 항암제를 골라서 처방하는 시대가 온다. 현재의 항암 치료가 ‘폭격기를 이용한 무작위 폭탄 투하’ 방식이라면, 유전자 맞춤형은 정조준된 미사일로 핵심부만 정확히 때려잡는 방법이다. 30,000개에 이르는 인간 유전자의 위치를 파악한 10년 전의 ‘게놈 프로젝트’가 길 찾기 지도였다면, 이제는 개인의 질병과 싸우기 위한 작전 지도가 완성된다는 의미다. 암 발생 단계별로 관여하는 유전자를 모두 찾아내는 퍼즐 게임이다.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를 완전히 파악한다면, 항암 치료는 그 길목만 차단하면 된다. 그동안 같은 항암제를 써도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이는 효과가 없을 때 이를 체질 차이로 여겼지만, 이제는 개인별 유전자 특성 차이로 알게 되므로 진정한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지레 흥분하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유전자 정보가 인간에게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존재하는지는 알았지만 이를 완벽하게 차단할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해당 그룹의 사람에게 과도한 공포심만 줄 우려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 의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암 발생을 줄이기 위한 금연과 운동, 적정 체중을 유지하는 생활습관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대머리가 되는 것은 유전자의 힘이지만 현재의 체중을 유지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이와 같은 유전자 의학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담겨 있다. 소설처럼 흘러가는 스토리와 다양한 사례들이 넘쳐난다. 100세 장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안내서이자 보물지도다. 우리 몸을 알고 이해하는 21세기판 설명서이기도 하다.
김철중, 《조선일보》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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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 달러 게놈 케빈 데이비스 저/우정훈,박제환,금창원 공역/김철중 감수 | MID 엠아이디
이 책 『천달러 게놈』은 지난 2000년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역사와 우리들 개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게놈 혁명, 개인 유전정보 시대를 이끌어온 과학자들, 기업가들, 유명 인사들 그리고 수많은 선구자들의 지난 10년간의 도전과 실패 그리고 성공의 이야기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놀랄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개인 유전정보의 물결이 만들어온 지난 역사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개인 유전정보 시대라는 용감한 신세계의 필수적인 가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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