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은 ‘영화 산업에서 나온 유일한 천재’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극장에서 3D와 4D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관객은 소리 없이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화면만 봐야 했다. 1926년부터 유성영화가 도입되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무성영화를 고집한 한 사나이가 있었다. 둥근 챙모자에 꽉끼는 웃도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지팡이를 든 찰리 채플린이다.
극장에서 3D와 4D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관객은 소리 없이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화면만 봐야 했다. 1926년부터 유성영화가 도입되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고 무성영화를 고집한 한 사나이가 있었다. 둥근 챙모자에 꽉끼는 웃도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지팡이를 든 찰리 채플린이다.
찰스 스펜서 ‘찰리’ 채플린 경(Sir Charles Spencer Chaplin)은 미국 할리우드 무성 영화 시대에 활약한 영국의 희극 배우이자 영화 감독이며 제작자였다. 그는 프랑스의 코미디언 막스 렝데르로부터 영향을 받아 무성 영화 시대에 가장 창의적인 영화인으로 평가받았다. 조지 버나드 쇼는 채플린을 ‘영화 산업에서 나온 유일한 천재’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세계2차대전 때 공산주의자로 몰리면서 미국에 입국 금지를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바로 오늘!)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는 뮤직 홀에서 공연하는 가수이자 배우였다. 채플린이 3세가 되던 해 부모가 이혼하였으며 이후 어머니와 함께 여러 곳을 이사하며 자랐다. 그는 부모로부터 노래를 배웠으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뮤직 홀의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섰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5세 때 첫 무대에 섰고 10세에 극단에 들어가 연기 경험을 쌓았다. 17세 무렵 당시 영국 최고의 인기 희극극단 프레드카노극단 단원이 되었다. 1912년 카노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 영화제작자 M. 세네트는 그를 할리우드로 초청한다.
카노와 채플린의 연기는 맥 세넷과 같은 코메디 영화 제작자의 눈에 들었다. 맥 세넷은 채플린을 자신의 영화사 키스톤의 배우로 채용하였고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 《생활비 벌기 Making a living》를 제작하였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였다. 채플린은 해고 당할 위기에 봉착했지만 여배우 마벨 노르만이 세넷을 설득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채플린은 맥 세넷의 키스톤에서 영화 배우를 시작하였다. 그는 초기 영화에서 좌충우돌하는 캐릭터를 창조하였고 영화 제작을 매우 빨리 배웠다. 채플린이 24세이던 1914년 제작된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채플린은 이미 전형적인 그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바로 이어 제작된 영화 《마벨의 이상한 재난 Mabel's Strange Predicament》에서 맥 세넷은 ‘코메디 다운 영화’를 주문하였고 채플린은 둥근 챙모자에 꽉끼는 웃도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지팡이를 든 그의 전형적 모습을 선보였다. 채플린은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당시 둥근챙의 더비 모자와 바지는 채플린의 장인이었던 희극 배우 “뚱보” 알버클의 것이었다. 거기에 동료 희극배우 채스터 콘킨이 꽉끼는 웃옷을 구해주었고 14 싸이즈의 구두는 동료 희극 배우인 포드 스텔링이 준 것이었다. 채플린은 구두의 좌우를 바꾸어 신었다. 콧수염은 희극 배우 맥 스웨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붙였다. 채플린이 스스로 구한 것은 작달막한 지팡이뿐이었다.
“난 정말이지 뭘 어떻게 해야 코메디 답게 보일 수 있을지 몰랐다. 어찌되었든 지난 번 영화 《살리기》 같은 모양새여서는 안 될 것이기에 모든 것을 한 번 뒤집어 보기로 했다. 작은 모자에 꽉끼는 웃도리를 입고 헐렁한 바지를 준비했다. 거기에 큼직한 구두를 신고 맥 세넷에게 보여주었다. 세넷은 좀 더 나이든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작은 콧수염을 붙였다. 콧수염은 내 원래의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나이들어 보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난 이 캐릭터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막상 분장을 마치자 나는 그 캐릭터가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무대에 오르자 캐릭터가 완전히 태어나게 되었다.”-찰리 채플린 (1964년)
키스톤에서 활동하던 초기 채플린의 작품은 과장된 제스쳐와 슬랩스틱 코메디가 주를 이루었다. 채플린의 판토마임은 이전의 키스톤 작품보다 더욱 섬세하였다. 키스톤의 핵심은 보여주는 개그였고 이를 위해서라면 등장 인물을 짖밟고 차는 장면도 서슴없이 집어넣었다. 비평가들은 이 새로운 코메디가 저속하다고 평했지만 대중들은 열광하였다. 대중의 인기를 얻자 채플린이란 이름은 곧바로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1914년 채플린은 《틸리의 구멍난 로맨스 Tillie's Punctured Romance》를 비롯한 34편의 단편 영화에 출연하였다.
채플린의 캐릭터는 “방랑자”(The tramp)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채플린은 꽉낀 웃옷과 헐렁한 바지로 유랑민의 모습과 함께 신사적인 면모를 표현하였다. 채플린의 영화는 무성영화였기에 언어의 차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있었고 런던에서 온 이민자였던 찰리 채플린에 열광하였다.
1916년 뮤추얼 필름은 채플린에게 12개의 영화를 제작할 것을 요청하면서 67만 달러를 지급하였다. 채플린은 이후 18개월에 걸쳐 12개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의 영화들은 크게 성공하였으며 채플린은 미국의 대표적인 배우로 떠올랐다.
1918년 이후 채플린은 독자적인 영화 회사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키스톤, 에사나이, 뮤추얼 시기의 영화들은 이름을 바꾸고 재편집 되면서 끊임없이 재상영되었다. 훨씬 이후의 시기인 홈 비디오 시장이 만들어진 때에도 채플린의 영화들은 비디오로 다시 제작되어 팔려나갔다. 심지어 에사나이는 채플린의 옛 영화들을 잘라모아 채플린의 새영화로 판매하였다가 처벌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뮤추얼 시기의 12편의 영화에 음성을 입혀 다시 상영되었다.
뮤츄얼 필름과의 계약이 끝나자 채플린은 퍼스트네셔널 픽처스와 8편의 영화 제작을 갖고 계약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제작된 《어깨총 Shoulder Arms》은 제1차 세계대전을 가지고 풍자를 다루었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채플린은 《집 없는 아이》의 촬영을 시작하면서 재키 쿠건을 만나게 된다. 재키 쿠건을 이끄면서 촬영되는 영화는 《키드 The Kid》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영화는 성공을 거두게 되며 채플린은 드디어 명장 반열에 오르게 된다. 《키드 The Kid》는 채플린 최초의 장편 영화로 평가 된다.
눈물과 웃음, 유머와 페이소스가 당시 그의 희극에 대한 대명사였으나, 《어깨 총 Shoulder Arms》(1918) 무렵부터 인간적 성장의 자취가 작품에 투영되어 사회적 풍자와 비판이 곁들여졌으며 《황금광 시대 Gold Rush》(1925)와 같은 걸작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파리의 연인 A Woman of Paris》(1923)은 그가 감독만 한 비련(悲戀)의 운명 드라마로 뛰어난 심리묘사를 보여주었다.
1926년부터 발성 영화가 인기를 끌지만 채플린은 이를 거부하고 1931년 무성 영화인 《시티 라이트 City Lights》를 제작해 개봉한다. 놀랍게도 대성공이었다.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 City Lights》의 개봉을 위해 피카소, 아인슈타인, 간디, 처칠 등 여러 부류의 인사들과 만나고 수개월 동안 여행을 하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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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춤을 추러 온 화성인입니다. 여행과 영화 감상을 좋아하며, 책을 사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잘 읽지는 못하고 쌓아만 둡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게 삶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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