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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하천 걷기

한국에 호수가 몇 개더라? 아니, 한국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서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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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꽃이란 없고, 단지 이름을 모를 뿐이라고. 한강 말고도 서울의 하천이 35개나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복개됐다는 것도. 그리고 하천의 흐름을 알기 위해 도림천에서 안양천으로, 홍제천에서 불광천으로 걸었다. 차츰 서울의 산과 물에 친해지고 나니 콘크리트를 벗은 서울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서울이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4개의 내산과 북한산, 용마산, 덕양산, 관악산 4개의 외산으로 이뤄졌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다못해 뒷산 이름은? 우리 모두는 살면서 그다지 많은 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 한 줄의, 지금 자신이 사는 집 주소지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랬던 나 또한 어느 잡지에서 <최후의 툰드라> 피디가 쓴 다큐멘터리 촬영후기를 읽고 바뀌었다. 묘한 감동을 나누고자 밑줄까지 그었다.

툰드라 사람들은 삶에 필수불가결 존재인 순록을 존경하고, 필요 이상으로 죽이지 않고, 죽일 땐 영혼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을 치른다.

가축에게 조차 예의를 다하고 한 생명체로서 이토록 존중하다니. 특히 다음과 같은 말은 마음에 쏙 들었다.

도처에 심오한 유목민, 종교인, 철학자, 환경론자, 식물학자, 생태학자였다.

문명인들은 철학이니, 종교니, 환경이니 하는 심오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치는가. 하지만 툰드라인들은 정식교육기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촬영을 마친 후 툰드라 인들과의 작별 장면을 묘사한 글은 이렇다.

한국에는 몇 개의 호수가 있는지 어떤 식물이 살고 있는지 진지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어보던 그들.

나는 담당 PD가 마주했을 툰드라인의 해맑은 눈빛을 상상해본다. 그는 시속 300km로 달리는 고속열차나 하늘 위를 나는 비행기, 24시간 잠들지 않는 편의점 같은 문명의 발명품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툰드라가 아닌 다른 곳이 자연. 이런 질문을 한 툰드라인은 분명 여기보다 어딘가를 꿈꾸는 헛된 몽상가가 아닐 것이다. 자기 사는 곳을 매우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리라. 그리고 나는 이 질문을 외면 할 수 없었다. 가만 있어보자, 한국에 호수가 몇 개더라? 아니, 한국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서울에는?

툰드라 아저씨의 영향 탓인지 산에 가면 능선, 나무, 동물의 이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꽃이란 없고, 단지 이름을 모를 뿐이라고. 한강 말고도 서울의 하천이 35개나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복개됐다는 것도. 그리고 하천의 흐름을 알기 위해 도림천에서 안양천으로, 홍제천에서 불광천으로 걸었다. 차츰 서울의 산과 물에 친해지고 나니 콘크리트를 벗은 서울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이게 다 툰드라 아저씨 덕분이라 생각하니 문득 그에게 엽서라도 한 장 띄우고 싶어졌다.

툰드라 아저씨, 한국에 있는 호수와 식물이 궁금하다고 하였지요? 한국은 너무 크니 제가 살고 있는 서울에 대해 조금 알려 드릴게요. 서울 중심엔 한강이 흐르지요. 저 위쪽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흘러온 거예요. 한강은 서해로, 태평양으로 흘러가고요. 지도를 보니 아저씨가 사는 캄차카 반도의 물은 북극해도 흘러가더군요. 그럼 태평양과 북극해가 만나는 알래스카 어디 즈음에서 두 물은 만나겠네요. 참 신기하지 않나요? 물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우리도 언젠가 물처럼 자유롭게 만나는 날이 올까요? 그 때를 위해 저는 더 많이 걸어야 될 것 같아요.
우이천이며, 묵동천이며 아직 가봐야 할 하천이 많다. 툰드라 아저씨에게 보낼 두 번째 엽서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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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서울 김지현 저 | 네시간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자신을 타인화하여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단조롭고 관조적인 감성도 매력적이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 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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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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