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
-앙드레 지드
예기치 않은 겨울비가 제법 거칠게 쏟아졌다. 나는 반쯤 열린 창밖으로 부서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차디찬 비 냄새가 와락 끼쳐왔다. 저만치 다른 세계에서는 간간한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먼지가 잔뜩 낀 회색빛 눈동자로 점멸하는 네온사인을 멍하니 응시했다.
서른 해 남짓을 살아왔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정말이지 내게 서른 살 이후의 시간이 찾아올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출렁이는 검은 우물 한가운데서 홀로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희미한 시간 속에서 어느덧 청춘의 나날들이 내 몸을 통과하려 하고 있었다. 그 잘난 청춘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고 있는 서른 살의 몸을 가진 다섯 살 여자아이. 세상에, 그게 나였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가지지도 못했다. 그 무엇을 발견하지도, 얻어내지도 못했다. 더 이상 젊지도 않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직 늙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늙었더라면, 누가 보아도 ‘늙은 여자’였더라면 포기해야 마땅한 생의 일부분쯤은 체념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삶의 모퉁이 어딘가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쓰디쓴 희망이나, 좀 더 훌륭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짓된 기대 따위. 마시멜로를 갖지 못해 애걸복걸하는 다섯 살 아이처럼 찾아오지도 않을 지니의 마법 램프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이상한 하루하루를 그저 흘려보낼 뿐이었다.
온 세상이 찰랑거리는 비에 갇힌 그 추운 겨울밤. 나는 드디어 내 공식적인 청춘이 막을 내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잠시 뒤 툭툭 터지는 새벽빛처럼 어떤 문장 하나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내 청춘에 독서를 빼면 과연 무엇이 남나.놀랍게도 그 문장은 묘한 안도감을 전해주었다. 그러니까 내 삶에는, 몇 차례의 실패한 연애, 유치한 일탈과 방황과 객기, 결혼식 직후 끊겨버린 싸구려 우정들, 늘어가는 뱃살과 눈가의 주름, 나이에 반비례하는 철딱서니 말고도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엄청난 무언가가.
독서란 것은 늘 그랬다. 내 삶이 마치 하루에 열 시간씩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느끼한 부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태어난 것인 양 느껴질 때, 일상이 공중화장실 낙서만큼이나 구차하고 지저분하고 옹색할 때, 옆자리 남자의 들숨과 날숨소리가 생생한 만원 지하철을 꾸역꾸역 타고, 폐까지 굳어버릴 만큼 칙칙한 회사 공기를 온종일 들이마시며 건너는 시간 속, 그 구석구석에서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느껴질 때, 지금껏 어쭙잖게 배워온 삶의 규칙들이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절절히 깨닫게 되는 순간,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었어”를 외치며 지구의 중력 밖으로 튕겨나가고 싶은 위기의 시간에도 책은 나를 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내 청춘에는 셰익스피어와 하루키와 신경숙이 있었다. 기형도와 스캇 펙과 장 그르니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되었다. 아주 넉넉했다. 그들은 지치고 힘든 날 혹은 아프고 슬픈 날, 즐겁고 유쾌한 날 그리고 행복하고 달콤한 날에도 조용히 내 곁에 서서 비밀의 문을 열고 나를 이끌었다. 그 문 너머에는 놀랍게도 닫혔던 세상의 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문 너머에서 그들과 숱한 축제의 시간, 찬란한 만찬과 황홀한 파티를 즐겼다.
이 책은 내 독서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청춘의 일기 같은 것이다. 부서지고 깨지는 순간, 넘어지고 찔리는 순간 그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고 행복한 그 숱한 순간들 속에 자리매김하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함께 견뎌준 은인들에 대한 추억의 회상이기도 하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거나 경영학 학위를 취득하거나 일찌감치 결혼해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여행을 다니거나 좀 더 그럴듯한 커리어를 구축하거나 두세 가지 외국어를 익힐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 청춘을 견디는 수단으로 하필 독서를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가 이제와 스스로에게 감탄한다. 독서가 아니었더라면 내 삶은 중간 중간 페이지가 뜯겨나간 낡은 책처럼 의미의 공백이 가득했을 것이다. 끝내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거나 부표처럼 천지를 떠돌며 기웃거렸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고, 발견하거나 얻어내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시간을 견디는 법은 제대로 배웠다. 감성의 면역력을 조절해 영혼을 치유하는 법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자부한다. 그렇다. 바로 책을 통해서.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말처럼 삶은 그 자체로 무릎을 꿇고 떠받들어도 부족할 만큼 경이롭지만 한편으론 손톤 와일더의 고백처럼 거짓된 상황의 끝없는 연속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젓가락질과 운동화 끈 매는 법을 배우듯 삶의 악천후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문제는 이토록 엄청난 기술을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일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고, 사랑의 상처에 타버리지 않는 법도 익혀두어야 한다. 비겁하게 뒤통수를 때리는 운명에 산산조각 나지 않는 법도, 불공평한 세상에서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법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 서평집이 아닌 영혼의 테라피가 되었으면 하고 조용히 바란다. 아니면 최소한 ‘이 사람도 나처럼 방황하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을 줄 수만 있어도 내 하찮은 수고가 보상받을 것 같다. 나는 여기 소개한 책들로 불가능 하리라 여겼던 혼란과 상처를 치유했다. 내 안의 세상과 바깥의 세계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한 발은 녹록치 않은 현실에, 다른 한 발은 꿈 가득한 어떤 지향에 발 딛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스무 살에는 서른 살이 되면 모든 방황이 당연히 사라질 줄 알았다. 내가 상상했던 ‘어른’이란 모든 불안정한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쓸모없는 감정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평화로운 존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무 살에는 스무 살만의 방황이, 서른 살에는 또 서른 살만의 불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마흔 살에도, 쉰 살에도, 나름의 좌절과 아픔이 끝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다행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속삭이며 나를 위로해주는 책이 곁에 있기에. 늘 같은 온기로 흔들리는 내 손을 잡아줄 책 속 스승들이 곁에 있는 한 나는 기꺼이 일어나 손바닥에 묻은 흙을 툴툴 털어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책들을 통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당신만의 마음의 지도를 그려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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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언제나 내 편이었어 김애리 저 | 퍼플카우
작가 김애리는 ‘책’을 ‘내 편’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르케스, 카잔차키스에서 산도르 마라이……. 고전부터 근래의 베스트셀러까지 100여 권의 책들이 작가를 통해 방황의 터널을 먼저 지난 선배로, 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로, 혹은 나보다 더 방황하고 있는 친구로 다시 태어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친구(책)를 소개받고, 잊고 지낸 친구(책)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김애리라는 청춘이 길어 올린 찬란한 ‘인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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