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불길한 1984년과 달리 듀란 듀란, 컬처 클럽 그리고 조지 마이클의 왬!에게 1984년은 전혀 불길하지 않았다. 사실인 즉은 정반대의 대길(大吉)이었다.
밴 헤일런(Van Halen)이 앨범 <1984>를 발표해 팝 메탈이란 새 조류를 만들어내고 티나 터너가 출세작 앨범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곡 「1984」를 불렀던 그 해에 누구보다도 이 세 그룹은 출세와 달콤한 키스를 벌이며 광채의 길로 나아갔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듀란 듀란, 컬처 클럽, 왬!을 ‘1984년의 그룹’으로 기억한다.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열풍은 이 해에도 타이틀곡으로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강도는 눈에 띄게 뚝 떨어졌다. 잭슨 피버(Jackson Fever)가 잠잠해지자 팝의 헤게모니는 순식간에 잭슨의 공식과 유산을 물려받은 이 ‘라디오를 죽여버린 비디오 세대’에게로 이전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국 세력의 재도약을 의미했다.
IMF를 극복하고 미국정복에 성공
이 세 그룹은 영국이 IMF의 파고를 헤치고 안락한 해변에 당도해 국난 극복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고 있던 때에 그 흥취의 주연(酒宴)을 이끌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미국시장마저 통렬히 잠식, 또 한차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닻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 모든 것이 84년에 완성되었다.
듀란 듀란, 컬처 클럽 그리고 왬!은 모두 이 해에 그룹 활동 최초의 미국 넘버 원 싱글을 냈다. 컬처 클럽의 「Karma chameleon」, 듀란 듀란의 「The reflex」, 왬!의 「Wake me up before you go-go」순이었다. 이것은 곧바로 영국의 빅3 간의 치열한 자존심 경쟁을 의미했다.
빌보드 차트 1위가 절대적 우열 판정의 척도는 아니지만 이들과 같은 팝 그룹에게는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던 ‘성공’이란 것의 상징성을 갖는다. 새로운 흐름의 견인차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 차트의 톱10 히트곡 보유는 컬처 클럽의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가 듀란 듀란의 「Hungry like the wolf」보다 조금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영예는 듀란 듀란이 차지해야 맞다.
왜냐하면 듀란 듀란의 이른바 뉴 로맨틱스(New-Romantics) 무브먼트가 컬처 클럽의 브리티시 소울(British Soul)보다는 사조의 측면에선 앞선 흐름이었으니까. 정서적으로 듀란 듀란은 확실히 컬처 클럽의 선배로 느껴진다. 1983년만을 놓고 볼 때 트렌드는 분명 컬처 클럽이 아니라 듀란 듀란이었다.
듀란 듀란이 사조와 시기는 앞서
듀란 듀란의 존 테일러(John Taylor)는 이 부문을 매우 중시한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있었기에 컬처 클럽도 왬!도 있었다는 얘기다.
“80년대의 영국 그룹? 그건 당연히 우리들이다. 듀란 듀란이 80년대 영국 그룹들이 가야 할 길을 터 주었다. 보이 조지나 조지 마이클은 모두 우리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다.”
존 테일러가 이렇게 얘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듀란 듀란은 80년대의 뉴 미디어라 할 MTV가 배출한 사실상 첫 스타라 할 수 있다. 멤버 닉 로즈(Nick Rhodes)는의 데니스 헌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MTV가 우리의 「Hungry like the wolf」나 「Rio」의 뮤직 비디오를 방송하기 전에 미국의 라디오는 우리의 노래를 틀지 않았다. MTV에서 반응이 폭발한 후에 라디오 방송국들이 우리 곡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곳(미국)에서 많이 노출되는 것이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이 MTV를 석권한 것은 듀란 듀란과 같은 탁월한 비디오 조건을 앞세운 영국 뉴 로맨틱스 그룹들이 MTV를 독점한데 따른 일종의 반대급부였다. MTV는 당시 영국그룹들, 다시 말하면 백인의 전자(electronic)음악만을 집중 방송한다는 내외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 대안이 흑인 소울의 마이클 잭슨이었다.
컬처 클럽과 왬!은 마이클 잭슨의 모타운 소울을 영국식으로 계승, 발전시킨 그룹으로 평가된다. 그러니까 경향의 측면에서는 듀란 듀란의 뒤에 위치한다. 듀란 듀란은 이 점을 의식해 그다지 왬!이나 컬처 클럽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드러내지 않는다. ‘시작한 자’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와 위상을 자신들이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고 있던 그 시대에 그것은 어림없는 얘기였다. 잠깐 하는 순간에 MTV는 보이 조지의 여장(女裝)에 카메라를 맞추기 바빴고 잠시 후 말끔한 조지 마이클과 앤드루 리즐리가 출현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컬처 클럽을 버리고 왬!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어지러운 가운데 자의든 타의든 팽팽한 삼각구도가 형성되었다.
컬처 클럽은 영국식 모타운 흑인 소울로 약진
1984년이 개막되자 음악팬들은 온통 컬처 클럽의 보이 조지에게 시선을 뺏겼다. 그의 미녀 저리 가라는 얼굴과 의상은 시청자의 호기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보이 조지는 비디오 아닌 오디오 측면에서 비교 우위를 애써 강변했다. 《타임》지의 ‘컬처 클럽의 음악은 모든 팝을 집어넣은 포켓’이라는 지적처럼 컬처 클럽의 음악은 아주 매끄러운 ‘문화적’ 사운드였다. 통통 튀는 리듬의 변화가 두드러진 듀란 듀란보다는 한결 부드러웠다.
그것은 왬!의 ‘태생적 한계’라 할 버블검(bubble gum) 이미지와도 달랐다. 비록 10대 수요자를 주요 팬 층으로 했으되 성질에 있어서는 훨씬 성인적이었다. 음악이 신세대의 구미가 아닌 기성 세대의 입맛에 충실했다고 할까.
보이 조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듀란 듀란을 ‘우유 병’으로 부르곤 했다. 그들은 너무나 애 같았고 백인 중심적이었다. 우린 스팬다우 발레(Spandau Ballet)와 경쟁한 것도 아니었다. 우린 우리가 존경하는 옛 사람들처럼 되고자 했다.”
아마도 컬처 클럽의 음악 지향은 ‘눈으로는 신세대를 끌고 귀로는 구세대를 끈다’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Karma chameleon」이 그래서 제임스 테일러의 「Handy man」과 유사했고 「It's a miracle」이 길버트 오설리번(Gilbert O'Sullivan)의 곡을 연상시켰고 발라드 「That's the way(I'm only trying to help you)」는 엘튼 존의 「Tonight」를 듣는 듯 했다. 이 과정에서 표절 논란이 야기된 것은 불가피했다.
보이 조지는 자신들의 ‘양면전략’이-비디오는 신세대, 오디오는 기성 세대-당대의 많은 영국그룹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훌륭한 공식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그룹들은 분명히 그것에 착상하여 성공했다. 내 생각에 초기의 왬!이 분명히 우리의 공식을 따랐다.”
왬!이 컬처 클럽의 ‘복사본’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왬!의 음악이 컬처 클럽이 그러했듯이 미국 선대(先代)의 소울에 바탕을 둔 것은 사실이었다. 영국에서는 왬!이 아닌 조지 마이클의 곡으로 발표된 「Careless whisper」가 그러했고 조지 마이클이 솔로 시절에 부른 「They won't to when I go」는 소울의 귀재인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오리지널 곡이었다. 98년에도 그는 베스트 앨범
<Ladies & Gentleman : The Best Of George Michael>을 내면서 다시 한번 스티비 원더의 명곡 「As」를 리메이크했다.
대충 여기서 정리하자면 듀란 듀란은 ‘선지자’의 입장을 강조해 컬처 클럽과 왬!을 무시하고 있으며 컬처 클럽은 듀란 듀란과 왬!에 대해 차별화와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왬!의 음악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조지 마이클
이쪽 저쪽에서 깨진 왬!의 조지 마이클은 그럼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예전 록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말끝마다 해오던 ‘왬! 이미지에 대한 회의’(첫 솔로 앨범을 이 정서가 지배하고 있다)를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왬! 음악에 대해선 자부심을 표명하고 있다.
“난 사람들이 왜 왬!을 혐오했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우린 너무나 으쓱했으며 또한 너무 애들 같았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은 탁월했다. 80년대의 최우수 음반들 가운데 몇 몇은 우리의 것이다.”
이어서 그는 듀란 듀란과 컬처 클럽에 대한 감정의 일단을 슬쩍 내비친다.
“듀란 듀란과 컬처 클럽은 상당히 우리를 조롱하는 듯 했지만 우리가 그들의 인기를 앞지르자 충격을 받았다. 우리의 레코드는 들을 만했다. 다른 그룹과 지향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뮤지션들이 자신들이 심혈을 쏟은 작품에 긍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80년대의 이 브리티시 3강 사이에는 선의의 라이벌 의식이 아닌 ‘유아독존’과 심지어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전투구’의 양상이 감지된다. 자신을 사랑하되 남을 함께 존중하는 ‘깨끗한 매너’는 찾아보기 어렵다.
굳이 이 부분을 들추는 이유는 이러한 치열한 경쟁이 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절의 영국 그룹들과는 현저한 편차를 보였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당시 비틀스, 롤링 스톤스, 애니멀스, 데이브 클락 파이브 등은 미국 땅에 와서 인기 다툼을 벌였어도 서로간 애정과 예의를 잃지 않았다. 1979년 《빌보드》지는 60년대의 영국 침공을 기술하면서 이런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영국 그룹들이 미국에 상륙해서 보여 준 흐뭇한 사실중의 하나는 서로 경쟁하는 입장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할 줄 아는 훌륭한 휴머니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에릭 버든(Eric Burdon)이 지금도 즐겁게 기억하는 일이지만 애니멀스와 비틀스가 어쩌다가 같은 도시에 머물게 될 경우 호텔 방이나 연습 스튜디오에 대해 서로 양보하고 협조하여 전혀 마찰이 없었다고 한다. 롤링 스톤스가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콤비가 만든 곡 「I wanna be your man」을 받아 녹음한 것도 그 일례에 속한다.”
이에 반해 80년대의 영국 그룹들은 서로간 곡을 주고받기는커녕 상호간 양보 베풀기도 없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것은 비아냥과 비난이 전부였다. 왜 이 때의 그룹들은 선배들처럼 아름답지 못했을까?
80년대 대처리즘 하의 성공과 출세 이데올로기의 산물
팝 역사가들은 이러한 차이를 시대정서의 변화로 풀이한다. 60년대의 영국은 비록 경제가 어려웠으되 꿈과 희망이 남아 있었고 공동체의식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80년대의 영국은 IMF와 보수적 대처 정부 정책에 의해 경제는 회생했으되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만연했다. ‘살아남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사고, 그것이었다.
그래서 사가들이 60년대를 이상의 시대, 80년대를 탐욕의 시대로 개괄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마이클은 왬! 시절의 성공 욕구를 피력한 자신에게 기자가 ‘대처식 사고의 일단 아니겠느냐’고 지적하자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대처주의(Thatcherism)란 주변의 누구를 희생하든 간에 돈만을 알고 단지 적자생존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난 그렇게 살지 않았다. 돈이 없을 때도 나는 돈에 별 관심이 없었다.”
조지 마이클의 말은 그 시대가 얼마나 사람들을 성공과 출세 그리고 돈의 현실 이데올로기에 젖게 했는지를 시사한다. 때문에 약간의 좌파적 틀로 음악사를 푸는 사람들은 80년대를 아티스트 자세의 진공기로 매도하기도 한다.
왬!, 듀란 듀란, 컬처 클럽의 음악을 듣고 자라난 사람들에겐 이런 비평계의 해석이 그 시절 음악의 향기를 잔인무도하게 매몰하는 것 같아 불쾌할 수도 있다. 세기말에는 그런 반발의식이 모여 80년대 음악에 대한 마니아들의 재평가 흐름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묘하게도 20세기 말 즈음에 컬처 클럽, 듀란 듀란 그리고 조지 마이클의 베스트 앨범이 거의 동시에 출반된 적이 있었다. 그것이 80년대 가치의 재림일지는 모르겠으나, 80년대 음악의 부활을 의미할 가능성을 이 라이벌들의 음반이 은근히 팬들에게 강제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글/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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