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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거야” - 연극 <이제는 애처가>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하는 게 좋습니다 “몰랐네… 나를 이렇게 사랑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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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절없이 변해 가는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함께 깊어지는 거다. 시간이 흐르고 사랑도 사람도 변한다면, 이왕이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해가는 거다. 슌스케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가까이 있는 연인의 미지 영역을 탐구하고, 매일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건 자기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랑한다면, 그리고 사랑하려면, 이렇게 노력할 수밖에 없다.

잡은 물고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절규했던 <봄날은 간다>의 상우. 그에게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만약 할머니가 상우의 절규를 들었다면, 이렇게 답하지 않았을까? “얘야, 잡은 물고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단다.”라고. 나 역시 할머니에게, 엄마에게 들어왔던 그 얘기다.

이성에게 호감을 느낀 두 남녀 사이에 분비되는 도파민 덕분에 사랑이 시작된다. 뇌에서 페닐 에틸아민이 분비되면서 행복을 느끼고, 감정이 깊어진다. 뇌하수체 후엽에서 뿜어져 나오는 옥시토신을 친밀감, 신뢰감, 편안함으로 느끼며 남녀는 연애를 지속해나간다. 문제는 이 호르몬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분비를 멈춘다는 거다.

동화 신데렐라 속에서 열두 시가 지나면 황금 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듯, 눈에 덮인 콩깍지가 벗겨진다는 불편한 진실! 이게 과학자들이 말하는 사랑의 유통기한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호르몬은 다시금 활동을 개시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통기한에 맞춰 매번 사랑을 바꿀 수도 없는 일. 추억으로, 신뢰로, 편안함으로, 그동안 쌓아둔 나만의 이유로 사람들은 사랑을 계속해나간다.


남녀관계의 가장 큰 비극은, 남녀 간의 목표 설정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남자는 사랑에 빠지면, 여자의 마음도 몸도 사로잡겠다는 목표로 마구 돌진한다. 일단 서둘러 목표는 달성했는데, 결혼해야겠다든지, 영혼까지 사로잡겠다든지 식의 다음 목표가 부재한다면? 의도치 않게(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점차 시들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다.

반면, 여자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나면, 절친과도 다르고 일개 남자친구들과도 다른 이 특별한 ‘연인 사이’라는 걸 좀 더 깊게 꾸려가고 싶어진다. 나만의 남자라고 생각하니 더 애정이 깊어지고, 사랑에 빠져든다. 사귀기 전에 새침했던 여자가, 막상 교제를 시작하고 나면 없던 애교도 부리고 다정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점부터 생기는 감정의 간극이 비극의 시작이랄까.


“다들 이럴 때 어떻게 살아가지?”


여기 <이제는 애처가> 속 6년 차 부부의 갈등도 여기에 있다. 합법적인 섹스만이 결혼의 이유였다는 남편과 아기자기한 가정을 꾸려가고 싶은 아내는 오늘도 티격태격한다. 가족이 되어버린 연인. 남편 슈스케는 아내가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자는 말에 기겁한다. ‘가족’하고 어떻게 잠을 자냐는 거다. 그러면서도 젊은 여자를 집에 불러들여, 어설픈 외도를 끊임없이(6년간 10번이나!) 시도한다. 왕년에 이름 있는 사진작가로 잘 나갔지만, 지금은 지지부진한 사진 실력만큼 바깥일도 잘되지 않는다.

그는 남의 얼굴에서 실제 이상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사진작가다. 그러나 정작 아내의 사랑스러움은 좀체 알아채지 못하는 둔한 남편이다. 이지하가 연기하는 사쿠라는 얼마나 애교가 넘치고 사랑스러운지. 다른 무대에서 온 세상의 비극과 허무를 감당해내기도 했던 그 얼굴로, 이지하는 간드러지는 애교에 살랑이는 걸음걸이까지 장착한 사쿠라를 연기한다. 그녀의 연기변신이 굉장하다.

아내의 엄청난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다른 형국으로 흘러간다. 눈앞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반찬을 입에 넣어줘도 꿈쩍하지 않던 남편 슌스케는 그제야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비밀 앞에서 꼼짝하지 못한다.


원래 깊은 사람을 만나거나, 함께 깊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역시 비밀이어야 하는 걸까.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내보이고, 모든 것이 읽히게 되면 그 관계는 시시하게 귀결되는 걸까. 그래서 연애 고수들은 그토록 ‘밀당’을 강조하나. 나를 좀 더 알고 싶게 만들고,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게 만들라고 말이다. 하긴 작가 이상도 이렇게 말했다. “비밀이 없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라고. 사랑은 먹고 입고 씻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창조활동처럼 느껴진다. 긴장감을 가지고 가꾸고 노력해야 하니까 말이다.

관계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게 꼭 비밀이 될 필요는 없다. 설렘을 유지하며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연인이 보이는 아름다움보다 알면 알수록 더 깊은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끝을 모르고 빠져들 만큼 이미 웅숭깊은 사람이라면, 최선의 경우다. 하지만 이건 상대의 깊이의 문제이므로,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속절없이 변해가는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함께 깊어지는 거다. 시간이 흐르고 사랑도 사람도 변한다면, 이왕이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해가는 거다. 둘이 함께 배우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노력하면서 서로 넓고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함께 TV보고 쉬는 시간 말고, 함께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사랑만 하고 사는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이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슌스케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가까이 있는 연인의 미지 영역을 탐구하고, 매일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건 자기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사랑한다면, 그리고 사랑하려면, 이렇게 노력할 수밖에 없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하는 게 좋습니다


극 중 배우 김응수는 사진작가 집에 종종 들르는 게이로 등장한다. 솔직하고, 남들에게 단소리, 쓴소리 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상처 주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거야.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어떻게 어른이 돼?” 이런 명대사도 그의 몫이다.

인심도 좋아서 좋은 얘기도 맛있는 음식도 퍼준다. 덩치도 크고 남성미 가득한 외모의 김응수의 천연덕스러운 게이 연기가 눈길을 끈다. 슌스케 역의 배성우는 철없는 남편의 모습부터 애절한 감정연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관객을 여러 번 울컥하게 한다.

<이제는 애처가>는 일본의 여류작가 나카타니 마유미가 쓴 희곡이다. 원제는 ‘좋은 남편’이다. <워터보이즈> <뷰티플 데이즈> 등의 작품으로 감성 넘치는 극을 쓰기로 잘 알려졌다. 공감 가는 이야기, 일본 특유의 감수성이 묻어 있는 이 작품은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작가의 말에서 나카타미 마유미는 이렇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가능한 뒤로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11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제부터라도’ 애처가, 그것도 괜찮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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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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