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의 지나친 교육열
월산대군月山大君은 단종 2년(1454) 12월 18일 도원군 이장과 한확韓確의 여식인 청주 한씨(인수대비仁粹大妃) 사이의 맏아들로 경복궁 근처에 있던 할아버지 수양대군의 살림집에서 태어났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조정의 권력을 휘어잡은 수양대군이었지만, 아직 단종이 재위 중이었던 때라 경복궁과 민가의 살림집을 오가며 정사를 보고 있었기에 궁궐이 아닌 민가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역모 성공에 맏손자 출생이라는 경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듬해인 단종 3년(1455) 7월에 드디어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여 그의 가족이 궁궐로 들어오면서 월산대군 역시 동궁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드라마 ‘인수대비’ 캡쳐 [출처: JTBC]행복이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였던 월산대군의 궁궐생활도 그의 나이 네 살 때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세조 3년(1457) 9월 2일, 의경세자가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했던 것이다. 단종을 무참하게 죽인 데에 대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저주라고 생각했던지 일단 맏손자 월산대군과 차남 해양대군海陽大君 이황李晄(예종) 모두를 황급히 경복궁 밖의 민가로 피신시키게 한 세조는 둘 중 누구를 세자자리에 앉힐지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해양대군을 책봉하기로 결정했다. 법도대로 하자면 죽은 의경세자의 적장자인 월산대군이 책봉되어야 하나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서 왕위를 차지한 세조였기에 혹시 모를 유사한 상황의 재현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차남 해양대군의 나이 역시 여덟 살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월산대군의 생모 한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궁궐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2월 15일, 이제 막 세자로 책봉된 해양대군에게 동궁을 내주고 경복궁을 나와야 했다. 갑작스럽게 민가 살림집에 살게 된 모자를 안쓰럽게 여긴 세조가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죽은 세자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그 옆에 한씨 모자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친정아버지 한확이 명나라 사신길에 객사해 친정부모 모두 여읜 상태에서 남편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리자 어디 한곳 괴로운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어져 버린 한씨 부인은 자연스럽게 자식들의 훈육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시부모가 폭빈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붙여주었을 정도로 자식에게 엄격하게 굴던 한씨 부인이었으니 이제 얼마나 더 가혹하게 대했을지는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2남 1녀의 자식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 바로 월산대군이었다. 잘산대군은 생후 5개월된 갓난아이여서 당장에는 훈욕을 시킬 것이 없었을 테고 월산대군 바로 밑에 있는 명숙공주明淑公主 역시 여자아이인데다 아직 어린 두 살배기여서 훈육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에 비해 월산대군은 네 살이라 말귀도 알아들을 나이였고 무엇보다도 장차 집안을 일으켜야 할 막중한 의무를 진 장남이었으니 어머니의 혹독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훈육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한창 뛰어놀며 어리광 부리고 싶어 할 나이이다 보니 바라는 대로 다 잘했을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의 독기에 찬 훈계와 회초리를 견뎌내야 했던 월산대군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몸에 밴 소극적이고 나약한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병약한 것으로 비쳐졌다.
철저한 계산하에 후사로 임명된 잘산대군세조 14년(1468) 9월 8일, 세조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해양대군이 열아홉 살 나이에 예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미 장성한 나이에 즉위한데다 첫째부인과 사별한 뒤 결혼한 둘째부인 안순왕후가 낳은 세 살배기 아들 제안대군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 예종의 앞날은 순탄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종 1년(1469) 11월 27일, 즉위한 지 1년이 조금 지나 예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급작스럽게 병석에 드러눕더니 곧바로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 남은 자식마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 정희왕후는 충격에 빠졌고 한명회, 신숙주申叔舟 등의 원로대신, 삼정승三政丞들도 뜻밖의 급보에 놀라 한 걸음에 궁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에 예종의 죽음을 기다리며 경복궁 사정전(편전) 앞에 모여 길고 긴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8시경 예종이 경복궁 자미당紫薇堂에서 절명하자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정희왕후가 주최하는 대신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이 세자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예종이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서둘러 후사를 뽑아야 했고 그 최종 결정권은 왕실의 최고어른인 대비 정희왕후가 쥐고 있었다.
만약 정희왕후가 제안대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굳이 원상들과 상의할 필요 없이 다음 날 대신회의에서 새 국왕으로 발표하면 되는 일이었다. 예종의 하나뿐인 혈육이니 누가 보아도 순리적인 처사이고 명분 또한 분명한 결정이었을 테지만 정희왕후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원상들과 상의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정희왕후는 어째서 적장자였던 제안대군을 왕위계승자에서 배제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의경세자가 급사했을 때, 월산대군이 아닌 의경세자의 동생 해양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 즉 나이 어린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했던 한 사람으로서 또다시 그와 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준의 몰락과 월산대군의 유배 아닌 유배생활잘산대군이 새 국왕으로 즉위하자 자연히 당장에 곤란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 의경세자의 적장자이자 잘산대군의 큰형인 월산대군, 그리고 왕실종친 구성군 이준, 세 사람이 그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모를 리 없는 이준은 조그마한 트집도 잡히지 않으려고 몸을 사렸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원상들이 아니었다. 성종 1년(1470) 1월 전 직장直長 최세호崔世豪와 그의 숙부 길창군吉昌君 권맹희權孟禧가 내뱉은 불손한 난언에 대한 고변이 있었는데, 난언 가운데 구성군 이준의 이름이 거명되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아 역모로 몰더니 기어이 이준을 경상도 영해로 귀양 보내고 불손한 발언을 한 최세호와 권맹희는 처형했다.
이준의 몰락을 조용히 지켜본 월산대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역적으로 몰릴 수 있는 세상이었고, 다음 차례는 바로 월산대군 자신이었다. 아무리 형제애가 지극한 친동생이 국왕이라 해도 실권을 원상들이 쥐고 있는 이상 그들의 눈 밖에 나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월산대군은 주어진 명예와 부에 안주하고 있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조심하고 또 자제하려 애를 썼다. 정치 문제 등의 국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던 연회석에서 단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주정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왕실ㆍ종친과 관련된 송사에서도 원칙과 명분에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해 종종 약자의 입장인 민간의 편을 들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나 가까운 친척, 그리고 집안의 종까지 엄하게 단속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처신에 세상 여론은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이 직접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실제 삶이란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우아한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셔도 기생질은커녕 그 흔한 주정 한 번 할 수 없었고 여유 있는 사대부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즐기는 사냥이나 온천 가는 것조차도 간관諫官의 힐난을 꺼려 궁중 행사 이외에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엉뚱한 모함에 휘말릴까 사람들과의 교분도 가급적 자제했으니 그의 시작품이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실제 교유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성종과, 종친으로 당숙이었던 부림군富林君 이식李湜, 문인 조신曺伸 정도로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기도 어려웠다고 전한다. 말이 왕공ㆍ귀인이었지 세상과 단절되어 지내야 하는 유폐생활과 별반 차이 없었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자기 절제력을 발휘해야 했던 그의 삶은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가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품위를 연출해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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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조선 프린스 이준호 저 |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흔히 부귀영화, 명예, 권력을 모두 지녔으리라 생각되는 조선 왕실의 제2권력, 세자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흔들렸는지, 그들의 희생이 가져다준 조선의 정치적 이익 등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조선왕조의 경우, 일찌감치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유난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어려서부터 강요받았던 고달픈 생활이 끼친 영향도 분명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왕조 특유의 권력세습 형태인 ‘적서차별’과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어떻게 조선시대 왕자들의 삶을 무너뜨렸는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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