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자들은 파리 바티뇰 가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자주 모였다. 1865년경, 마네와 그의 친구들은 이 카페의 단골이었는데, 그들은 곧 금요일마다 모여 정기적인 회합을 갖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들레르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근대미술의 진정한 주제는 근대생활의 영웅주의’라는 그의 사상에 고무되었다. 이곳에 자주 모인 예술가는 1863년에 마네의 초상을 그린 레그로를 비롯하여 팡탱-라투르, 르누아르, 드가, 나중에 레그로와 함께 런던에 정착한 제임스 맥닐 휘슬러, 프레데리크 바지유, 그리고 폴 세잔이 있었다.
[마네, 「맥주잔을 든 여종업원」, 캔버스에 유채, 77.5x65㎝, 1878~79,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앙리 팡탱-라투르, 「바티뇰의 화실」, 캔버스에 유채, 204x273㎝, 1870,
파리 오르세 미술관(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오토 숄더러, 에두아르 마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자샤리 아스트뤼크, 에밀 졸라, 에드몽 메트르,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
이 모임에는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폴리트 바부, 세잔의 고향 친구인 작가 에밀 졸라,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에드몽 뒤랑티, 미술평론가 필립 뷔르티 등도 참여했다. 이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 않고, 주로 새로운 미술 경향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이 그룹의 보스 격인 마네는 1864년 카페 게르부아 근처의 아파트로 집을 옮겨, 자신의 피아노 선생인 연상의 네덜란드 여인 수잔과 동거하고 있었다. 게르부아는 바티뇰 그룹의 본부나 마찬가지였고, 세간에서는 그들을 마네파 혹은 바티뇰파로 불렀다. 이들은 1863년부터 1875년까지 주로 이 카페에서 만났다. 금요일이면 카페 주인은 입구 왼쪽의 두 테이블을 그들을 위해 비워두었다. 팡탱-라투르가 1870년 국전에 제출한 그림 「바티뇰의 화실」에는 중앙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마네가 등장한다. 이 그림을 통해 마네가 바티뇰파의 공식적인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바지유가 동일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자신의 화실 장면을 그린 작품에서도 마네는 여전히 이젤 앞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 그룹에서 훗날 인상주의 운동이 태동한다.
모네 역시 게르부아에서 마네와 자주 어울렸다. 모네가 마네를 처음 만난 것도 게르부아에서였다. 마네는 모네보다 여덟 살이 많았고, 젊었을 때는 각자 고집이 세 친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모네가 생라자르 역 앞의 호텔에 머물며 게르부아에 자주 드나들면서 둘은 친분을 쌓게 된다.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고,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배우고 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등 좋은 조건에서 출발할 수 있었지만, 모네는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그림을 익혀야 했다. 마네는 일찌감치 국전에 입선하고 문인들의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아 유명세를 얻었기에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었다. 모네는 그런 마네를 존경했고, 그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인상주의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르왈드는 “소심한 예술가들은 코로의 영향을 받은 반면 대담한 예술가들은 쿠르베와 마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마네는 세련된 매너와 지적인 품위를 지닌 신사였지만, 잘난 척하는 기질은 없었다. 이런 마네는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는 등 미술의 흐름에 지각 변동을 가져온 화가로, 당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풀밭 위의 점심」이나 「올랭피아」에 담긴 도발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잔은 마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는 예술적 차이뿐만 아니라 신분 차이도 있었다. 평범하거나 어려운 집안 출신의 화가들은 보헤미안적 기질을 보였다. 세잔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며 남부 사투리를 강조하고, 찌그러진 모자에 여기저기 물감이 묻은 코트를 입고 다녔다. 한번은 게르부아에 앉아 있는 마네를 발견하고 “지금 악수를 할 수 없겠군요 마네 씨, 제가 일주일 동안 손을 안 씻었거든요”라고 공격적인 어조로 말한 적도 있었다. 손을 내밀지 않은 세잔의 행동은 우아한 마네를 배려한 행동이라기보다 그의 댄디즘을 조롱한 것에 가깝다.
인상주의자들의 역사적인 모임이 이루어졌던 카페 게르부아는 차츰 소란스러운 장소로 변질됐다. 너무 유명해진 탓이었다. 화가들은 다른 아지트를 물색해야 했다. 좀 더 조용한 곳을 찾아 처음으로 카페 드 라 누벨 아텐에 자리 잡은 사람은 불운한 화가이자 몰락한 귀족, 그리고 마네가 근방에서 가장 비범한 인물이라고 칭했던 마르셀랭 데부탱이었다. 천장에 죽은 쥐를 커다랗게 그려놓은 것으로 유명했던 이 카페는 과거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하던 지식인들이 모이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이곳의 분위기는 과거 게르부아의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와는 사뭇 달랐다. 르누아르와 모네가 이곳을 자주 찾았고, 시슬레와 세잔은 가끔 방문하는 정도였다. 이 카페를 변함없이 지켰던 이들은 마네와 드가였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마네와 드가가 서로 알게 된 곳도 바로 여기다.
몽마르트르의 피갈 광장에 있었던 카페 드 라 누벨 아텐은 흔히 ‘누벨’이라 불렸는데,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마네와 드가를 포함, 로트레크, 반 고흐, 고갱, 세잔, 휘슬러에 의해 번영을 누렸다. 저녁이 되면 테라스에 일군의 예술가들이 모여 베로네제, 고야, 들라크루아는 물론 신인상주의의 점묘화법에 대해 논쟁했다.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는 역시 마네였다. 마네는 숭고하리만치 차분한 빛의 분위기와 색채의 아름다움을 찾아 인상주의 회화를 세상에 알렸다. 이 카페는 마치 19세기의 진정한 미술학교와 같았다.
-
- 아트 살롱 유경희 저 | 아트북스
책 속의 글들은 몇 년 전부터 저자가 대중강좌를 해오던 결혼, 패션, 카페, 여행, 요리 등의 테마들이다. 미술 이야기 뿐만 아니라 영화, 문학, 드라마, 인간관계, 온갖 사회문제 등 종횡무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한 화가, 한 그림의 에피소드만 얘기해도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른다. 소소하지만 그 배경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는 알 수 없는 코드들을 하나하나 해석하며 첫걸음을 떼는 이 책은 2004년에 나온 『테마가 있는 미술여행』의 개정증보판으로, 책 내용 중 결혼, 아동, 요리, 살롱, 카페, 여행의 여섯 개 테마는 개정증보판에 새로이 추가한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