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는 고기집에서 뭘 먹냐고요?
나는 반쪽짜리 채식주의자입니다 채식주의 커밍아웃
불편하고 유별난 행동이라 해도 채식주의를 알리고 채식주의 윤리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인도 외교관이 식당에서 밥에 간장을 비벼 먹었다고 해서 까탈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원래 채식주의자가 많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면 채식주의자임을 일찌감치 커밍아웃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좀 구질구질하지만 현재 나의 식습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한편으로는 완전한 채식을 실천하지 못하는 의지 박약자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완전한 채식을 실천하기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말해둘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고기가 아닌 고기는 먹지 않지만 고기가 지나간 ‘흔적’까지 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고깃덩어리나 고기조각은 먹지 않지만 고기로 우려낸 국물은 어쩔 수 없을 때는 먹는다는 얘기다. (물론 일부러 먹지는 않는다.) 가령 설렁탕을 먹게 되면 고기는 건져 내고 국물만 먹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설렁탕집의 경우 설렁탕이나 수육 말고는 팔지 않는데다가 반찬도 깍두기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식 때 가장 많이 가는 곳이 고깃집이다. 나는 고깃집을 가게 되면 고기 굽는 불판에 버섯을 구워 쌈에 싸 먹곤 한다. 버섯이 아예 없거나 조금만 주는 고깃집도 많은데, 그런 집들은 영 곤란하다. 그럴 때면 배가 더 고파지는 것 같아 ‘에라이, 치사하게 이런 것까지 아끼냐!’ 하고 속으로 투덜대곤 한다. 아무리 버섯이라 해도 고기 기름이 묻은 불판에 구워먹을 수 있느냐고 하는 채식주의자도 있을 텐데, 아마도 종교나 건강을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그런 이유가 아니므로 고기 불판에도 잘 구워 먹는다. 그조차 꺼려질 때는 그냥 상추에 밥을 싸 먹으면 된다. 상추 안 주는 고깃집은 없으니까.
고깃집들은 대부분 된장찌개가 있으므로 그것을 시켜서 먹기도 한다. 아마 그 된장찌개에도 고기 국물이 들어 있겠지만 거기까지 따지기는 어렵다. 고기를 안 먹으니 된장찌개를 미리 달라고 하면, 아주 가끔은 국물을 고기로 만드는데 괜찮겠느냐고 걱정스레 묻는 집도 있다.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목소리가 기어들지만, 그런 배려의 마음에 고마움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어떤 채식주의자는 식당 주인에게 고기나 멸치 육수를 넣지 말고 맹물로 된장찌개를 끓여 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을 신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부탁을 해 본 적도 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생각이다. 정 먹을 게 없으면 밑반찬에 밥만 먹어도 되고, 그런 사람이라면 김치에도 젓갈이 들어 있어서 못 먹을 테니 간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 된다. 우리나라에 주재하던 어떤 인도 외교관은 식당에 채식 메뉴가 없자 간장을 달라고 해서 밥에 비벼 먹었다고 하는데,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한 끼 그렇게 먹는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은 아니니까.
비빔밥이 메뉴에 있다면 그것을 시켜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단, 고기 고명은 넣지 말아 달라고 미리 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애를 먹기가 십상이다. 큰 고깃덩이라면 골라내기가 쉬운데, 꽤 유명한 한정식 집에서 잘게 볶은 고기를 뿌려 넣어서 그걸 골라내느라 끙끙거린 기억이 난다. (비빔밥은 한국의 대표적 채식 메뉴로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고기를 꼭 넣어주고 싶다면 따로 그릇에 담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혼자 외출해서 식당에 갈 일이 있으면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프랜차이즈인 ‘김밥천국’에 간다. 거기서 햄 빼고 김밥을 싸달라고 하면 아주머니가 흘낏 한번 쳐다보기는 하지만, 어쨌건 훌륭한 한 끼 식사를 할 수가 있다. 달걀까지 안 먹는 채식주의자라면 계란지단도 빼달라고 하면 된다.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없어서 굶고 들어온다고 하는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있던데, 이 천국 같은 김밥천국을 모르나보다. 김밥에는 시금치, 우엉, 당근, 깻잎, 오이 등이 들어가니(가끔 볶은 김치도 들어간다.) 채식주의 식단으로는 이만한 게 없다. 밥에 식초를 섞기도 하고, 시금치를 참기름으로 무친 다음에 다시 김에 참기름을 바르니, 오히려 열량이 높은 것을 걱정할 정도로 영양가도 많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것들은 모두 동물성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김밥을 사 오거나 만들어 오면 조용히 햄을 빼내고 먹는다. 고기만 따로 골라낼 수 없는 만두가 가장 쥐약이다. 만두는 그냥 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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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채식, 채식주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강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호주 멜버른대학교, 캐나다 위니펙대학교,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했다. 현재 강원대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정에서 가르치고 있다.
전공분야인 논리학, 과학철학, 윤리학 등 철학의 응용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과 함께, 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대중적 눈높이에 맞는 철학서 집필에 꾸준히 힘쓰고 있다. 그런 결과물로 논리ㆍ논술 분야의 대표적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논리는 나의 힘』(2003)을 비롯하여 『데카르트 & 버클리: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벤담 & 싱어: 매사에 공평하라』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변호사 논증법』 『좋은 논증을 위한 오류 이론 연구』 등을 펴냈고, 청소년 교양도서로 『생각을 발견하는 토론학교, 철학』 『나는 합리적인 사람』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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