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왕의 여자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의 살롱 살롱은 부활할 수 있을까 예술과 철학의 지지자, 혁명의 동반자
18세기 사교계의 핵심이었던 살롱 문화를 이끈 대표적 인물로는 퐁파두르 부인을 꼽을 수 있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술사학자들은 로코코 예술의 절정은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이 없었다면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혹자는 이 시대의 예술을 로코코 양식이라 또는 루이 15세 양식보다는 마담 드 풍파두르 양식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18세기 사교계의 핵심이었던 살롱 문화를 이끈 대표적 인물로는 퐁파두르 부인(Marquise de Pompadour, 1721~64)을 꼽을 수 있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술사학자들은 로코코 예술의 절정은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이 없었다면 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혹자는 이 시대의 예술을 로코코 양식이라 또는 루이 15세 양식보다는 마담 드 퐁파두르 양식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퐁파두르 부인은 평민 출신으로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20년을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으로 지내며 온갖 영화를 누렸고 급기야 후작 작위까지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녀는 단순한 애첩을 뛰어넘어 왕의 비서실장이자, 애인이자, 친구이자, 어머니 역할을 했다. 사실 그녀는 왕의 위해 준비된 여자였다. 오늘날 엄나들이 자식의 인생을 기획하듯이, 퐁파두르 부인은 어머니와 외삼촌뻘 되는 남자의 합작품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의 어머니는 돈 많은 늙은 남자와 재혼하는 등 매춘부에 가깝다는 평판을 들었던 여자였다. 평소 점성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점술가에게서 장차 딸이 왕의 여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딸을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쌓고 교양과 예절을 갖추도록 교육했다. 왕의 여자가 되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했으니, 우선 왕가와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적당한 남자와 딸의 정략결혼을 성사시키고 왕의 영지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런 다음엔 눈에 잘 띄는 분홍색이나 파란색 승마복을 차려입고, 사륜마차를 타고 왕의 사냥터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런 노력 끝에 퐁파두르 부인은 결국 왕의 눈에 드는 데 성공한다. 스트레스와 권태 속에서 지내며 사냥과 섹스에 에너지를 쏟고 신선한 자극을 찾아 헤매는 왕에게 그런 전략이 효과적으로 통한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은 어떻게 그토록 오래 왕의 여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왕과의 관계를 사랑에서 우정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성적인 애정 관계를 동반자적 우정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특히 이야기를 극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말재주는 왕을 유쾌하고 신나게 해주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그 어떤 주제로도 왕과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대화가 시들해지면 피아노를 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격식을 따지지 않고, 고상한 척하지 않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왕을 어려워한 나머지 더 우아하고 고상한 척하는 게 보통이었을 텐데, 그런 틀을 과감하게 깬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외동딸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을 때도 화려한 의상과 웃음으로 치장하고 왕의 곁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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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 대학교에서 예술행정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수년간 미술잡지 기자와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를 운영하며 예술과 인문학을 통한 상상력과 창의력, 힐링과 멘토링에 관한 글쓰기, 상담, 특강 등을 기획ㆍ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예술가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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