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안은영의 여자인생충전기
남자는 욕망을 들켰을 때 가장 치졸하다
당신이 일년 이상 연애하고 있다면… 사랑 앞에 리콜을 계산하지 말 것! 그의 삶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야 진짜 연애
적어도 일년 이상 연애해오고 있다면 그의 눈과 가슴을 보지 말고 당신과 헤어져 집에 돌아가는 뒷모습을 정중하게 바라봐주길 바라.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과 함께 있음에도 그(녀)가 느끼는 고독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함께 가는 것이거든. 그의 고독과 외로움을 이해한다면 사랑에 대고 ‘리콜을 하네 마네’ 경박하게 굴 수 없을 거야.
욕망을 들켰을 때 가장 치졸하다
요샌 이 남자가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낮에는 보고 싶다가도 약속시간이 다가오면 전화를 걸어 “나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오늘 말고 다음에 만나”라고 말하려는 걸 꾹 참기 일쑤다. 슬쩍 건드려 뽀뽀를 얻어낼 타이밍인 것을 알면서, 내게 입 맞추고 싶어하는 그를 모른 척 외면한다. 그냥 나는 요새 이 남자가 하는 모든 행위가 성가시다. 싫어졌느냐고? 권태기냐고? 아니, 나는 요새 이 남자와의 만남이 더욱 밀도를 더해간다고 믿는다. 그냥 뭔가 잘 풀리지 않는 요즘의 일상을 이 남자가 액막이해주고 있는 것이다. 안쓰럽지만 그냥 놔두기로 한다. 나중에 내가 보상해주면 되니까.
이러다가 이 남자가 삐쳐서 멀어지면 어쩌지? 싶다가도 이 무슨 자신감인지, 리콜하면 되지 뭐. 사랑도 리콜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싶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자동차도 아니고 TV도 아닌데 도대체, 사랑이 어떻게 리콜이 되느냔 말이야.
나는 안다. 이렇게 잘난 척 하다가 머지않아 전세가 역전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에게 고양이처럼 다가가 나름 아양을 부리고, 그를 안심시키면서 내 사랑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사랑은 영원한 승자가 없으니까. 지금 당장의 패권을 내가 쥐었다 한들 언젠가 그에게 넘겨줄 것을 알고 있다.
나아가 헤어진 상태에서 사랑은 리콜할 수 있을까? 가끔 친구나 여자후배가 자신의 연애사를 풀어놓으며 헤어진 인연과 재결합 가능성을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나의 대답은 “재결합 가능성은 당신에게만 있다”다. 그는 그저 한번 찔러보러 온 거거든. 여자 마음에 패인 송곳 자국 따위 아랑곳없이 사라질 게 십중팔구다.
남자가 헤어진 여자를 다시 찾아올 때는 ‘뭐가 잘 안 될 때’다. 여자와 헤어지고 시작한 새 연애가 당최 진도를 못 빼고 있거나, 회사에서 뭔가 ‘물을 먹고’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럴 때 아직도 자신이 우위에 있을 수 있는, 말하자면 가장 익숙하고 만만한 존재를 찾는다. 남자는 여자의 미련(혹은 애정)을 자양분 삼아 위안과 자신감을 얻고, 남자가 다시 떠날 때까지의 시간을 여자는 ‘재결합했다’고 착각한다.
남자를 만나온 세월이 꽤 되다보니 찌질한 남자는 거의 판독기계 수준이다. 남자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자신이 불리할 때 찌질하다. 마술사의 부채를 확 펼쳤을 때 푸드덕 하고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처럼 자신이 불리한 순간이 되면 지위와 명예,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내던지고 찌질한 본성을 화르륵 펼친다.
가장 치졸할 때가 욕망을 들켰을 때다. 섹스이건 권력이건 욕망이 좌절됐을 때 남자들이 보이는 찌질함은 위력적이라 할 만하다. 누구도 토를 달 수 없게, 유치하고 맹목적이다. 논리나 기승전결은 찌질월드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누가 내 욕망을 막아서는가에만 집중적으로 화를 내다가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쪼그려 앉아 자학하기 시작한다. 찌질월드의 마지막 단계는 잠적이다. 단기이건 장기이건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으며, 어디 있는지 충분히 짐작되는 곳으로 사라진다. 물론 누구도 찾지 않는다.
『하이 피델리티』 안에 숨 쉬고 있는 실연 치유의 언어
경박한 수다쟁이, 호기심 충만한 영국남자 닉 혼비의 소설 『하이 피델리티』는 특히 ‘이렇게 살아도 되나?’를 자문하는 순간 읽으면 딱 좋다. 실연한 상태라면 더 좋다. 살아갈 힘을 주고, 사랑에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느냐고? 아니, 지도와 나침반을 친절하게 손에 쥐어 주며 “현재 스코어, 당신의 옹졸함은 여기까지 와 있고 소심한 평소 성격으로 봤을 때 당분간 지지리 궁상이 예상됨”이라고 못 박는다. 뭐 이런 까칠한 인간을 봤나 싶어 주먹을 불끈 쥘 때, 불현듯 만져진다. 까불까불하며 바늘 춤을 추다가 반드시 내 위치를 냉정하게 설명해주는, 손안의 나침반.
되돌아갈 수 있는 거리인지, 나로부터 멀어진 그를 리콜할 수 있는 지경인지 아닌지, 책을 읽으면서 나를 파악해간다. 소설이 재미와 투두리스트를 동시에 주기란 흔치 않다. 이게 닉 혼비의 문체다.
주인공 로브의 입을 빌어 닉 혼비는 관찰을 통해 얻어낸 연애론을 슬쩍 꺼내놓는다. 무조건 예뻐 보이는 연애초기가 아니라 서로를 들여다보고 그의 삶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기 시작해야 진짜 연애라고.
“술집에서도 버스에서도 창밖으로도 커플들을 유심히 살핀다. 그중에서 떠들고 만지고 웃고 질문을 많이 하는 건 거의 만난 지 얼마 안 된 커플이다. 나는 그들보다 좀 더 자리가 잡힌, 좀 더 조용한 커플, 얼굴을 맞댔다기보다는 등을 맞대거나 나란히 인생을 걸어가기 시작한 커플이 더 흥미롭다.” | ||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아무것도, 그리고 전부 다.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멋진 밤을 보냈고, 아무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섹스를 했고, 새벽녘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나에게, 어쩌면 그녀에게도) 대화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니, 전부 다 잘못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지 말지 몰라 멍청하게 우왕좌왕한 것, 그 와중에 마리에게 머저리라는 인상을 준 것, 환상적으로 호흡이 맞았다가 별로 할 말이 없어진 것, 헤어질 때의 모습. 이건 ‘물이 반이나 남았느냐 반밖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작은 병에 꽉 차 있던 물을 커다란 빈병에 쏟아 부은 거나 마찬가지다. 예전엔 그 안에 얼마만큼 들어있는지 알고 싶었지. 이제는 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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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하이 피델리티,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존 쿠삭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큼발랄한 조언서 『여자생활백서』로 40만 독자를 사로잡으며 2030 여성들의 멘토로 자리잡았다. 남자와 연애에 관한 지침서 『여자생활백서2』, 연애와 결혼의 갈림길에서 좌충우돌하는 이 시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충고와 따듯한 위로를 담은『여자공감』이 있으며, 소설로는 『이지연과 이지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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