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고용이란 정말 먼 옛날의 꼬꼬마 텔레토비 동산에서나 나오는 단어로 들린지 오래.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이 멀지 않은 과거, 그것도 십여년 전에는 어엿한 은행원, 회사원이었다는 것이 신문에서 르포 기사로 밝혀지는 것이 이제는 그리 새롭지 않은 대한민국. 하우스 푸어가 유행어가 되고,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이 시점에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희망의 배신』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탐사형 작가인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이 책을 쓰기 전 3년에 걸쳐 자신이 직접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 등으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위장취업’을 해 경험한 것을 낱낱이 고발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아니고 가난하기 때문에 출발선이 한참 뒤로 쳐져있고, 사는데 돈도 더 드는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책이 2003년 출간된 『노동의 배신』이었다. 이후 그녀는 눈을 중산층, 화이트 칼라로 돌렸다. 그녀의 문제의식은 ‘사무직 근로자는 안전한가?’였다. 한국이 90년대 말 IMF를 경험하면서 시작된 상시적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미국에서도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로 넘어오면서 일상화되었고, 취재를 시작한 2003년에는 이미 중산층의 대열에서 탈락한 이들의 수가 미국 실업률의 20%에 달하는 수준에 도달해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도 『노동의 배신』때와 마찬가지로 위장취업을 해보기로 하고 그 과정을 책으로 쓸 결심을 했다. 9개월간 생존을 위한 돈을 마련한 후 처녀적 성으로 ’홍보 담당 간부‘로 취업을 하기로 했다. 이 책은 2003년부터 약 10개월간 그녀가 했던 처절한 구직체험의 결과물이다.
1941년 미국 몬태나 주에서 태어났다. 록펠러 대학에서 세포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도시 빈민의 건강권을 옹호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다가 전업 작가로 나섰다.
2001년, 저임 노동자의 생활을 잠입 취재해 『노동의 배신(Nickel and Dimed)』을 썼고
이 책이 미국 내에서 150만 부 이상 팔리면서 생활 임금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대단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력서 수 백 장을 냈지만 면접도 하지 못해“, ”관리직 회사원은 퇴사 후에 할 수 있는 것은 치킨집이나 프랜차이즈 빵집뿐“ 과 같은 기사속의 이야기가 바로 이 책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래도 나을 줄 알았는데, 미국식 사회구조는 훨씬 공정하고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유일하게 공정한 면은 승자독식의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현실을 지나칠 정도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만큼 쉽게 취직이 되지 않자 불안이 엄습하게 되고, 저자는 그 불안 때문에 취업시장의 주변부를 떠돌기 시작한다.
먼저 구직활동을 도와주는 코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즈의 마법사를 비유로 정신을 상징하는 허수아비, 감정의 양철나무꾼, 본능의 사자를 그리고 영성과 비즈니스 코너를 운영하면서 애니어그램을 해석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고 60달러를 지불한 저자는 애니어그램에서 지시하는 내용들이 매우 모호하고 개념적으로 구체적이지 못한 면이 있음을 전문가적 관점에서 간파했다. 일종의 꿈보다 해몽류의 해석으로 초심자들을 유혹한다는 심증을 받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는 이력서에서 빈 공간을 메우고 자신의 강점을 상당히 과장되게 쓰는 이력서 업그레이드를 하였다. 처음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면도 있었지만 점차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상당수의 직장이 애니어그램이나 MBTI와 같은 인성검사를 하는 것을 즐겨하는데, 사실 그것이 회사와 사람이 서로 궁합이 맞는지 확인한다는 합리적 가정을 만족시키지만 사실은 ‘기업이 선의를 갖고 직원의 고유 성격을 너그럽게 인정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제스추어’일 가능성이 더 많기에, 실제 의미는 입사거절이나 해고를 합리화하기위해 사용하는 합법적 방편이라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었다.
이어 저자는 비슷한 일을 하는 구직자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정보를 갖고 먼 거리까지 이동해서 다양한 네트워크 미팅에 참여했다. 그러나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녀가 만났던 네트워크 미팅을 주최한 사람이나 참석한 사람 대부분이 사실 ‘구직활동’중이고, 어떻게 보면 이런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자기가 뭘 했었고, 지금은 어떤 일을 찾고 있다고 말을 하는 과정이 일종의 직업화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저자는 발견한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하고 있고 싶고, 그중 제일 좋은 것이 바로 구직활동과 네트워크 만들기였던 것이다. 뭔가에 전념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다소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후 다양한 종류의 코칭, 네트워크 미팅에 참여해서 강의를 듣고, 리더들의 말을 듣는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요새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팔린 ‘자기계발서’나 ‘긍정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경제경영서적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내용들이 담겨있다.
당신 인생의 모든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은 ‘오직 당신’이라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지금의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오직 당신’이 그런 모습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즉, 사회구조의 문제보다 결국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자신이 강해지고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코칭이나 리더쉽 훈련과 같은 재교육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6개월 만에 진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을 한 보험회사로부터 받는다. 기쁜 마음에 면접을 하러 가보니, 관리직이 되기 위해서는 6개월 안에 5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키고 6명의 신규고객 유치, 영업사원을 1명이상 채용하고 나야 수습코디네이터가 되고, 이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성과를 내면 상위직급이 될 수 있었다. 거기에 가기위해서는 자기 돈을 들여서 보험중개사 자격증을 따야했다. 또한 독립계약자로 의료보험을 제공하지 않고 사무실 없이 재택근무를 하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역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 무가지 하단의 구인난에 “50대 간부직 함께 일하실 분, 쉽게 월 5백만 원 가능, 하루 세 시간 근무”라고 써있고 휴대전화번호만 달랑 써있는 메모를 쉽게 볼 수 있다. 막상 전화를 해보면 다단계 회사이거나 이와 유사한 구조의 사업체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년의 여성이 모호한 경력을 갖고 있는 경우 그들을 환영하는 곳은 오직 복지체계도 없고 사무실도 없는 자기 돈을 써가면서 벌어야하는 보험회사뿐이었다.
회사가 요구하는 인간형에 대해서도 저자는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회사는 구성원에게 ‘팀 플레이어’가 되라고 한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팀플레이어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경쟁에서 도태되기 쉽다. 그리고 쾌활, 낙천, 순응을 요구하는데 이는 주인보다는 하인,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어울리는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감원 1순위에 오르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결국 회사가 원하는 좋은 성격은 시키는 대로 일을 하다가 감원을 하면 순진하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라는 뜻이라고 비판한다.
거기다 더 나아가 최근 회사들은 덧붙여 ‘열정’을 가지라고 하지만 한바탕 해고 바람이 지난 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열정을 갖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직업이 배우인 사람이거나, 자기감정을 상실한 사람일 뿐이라고 통렬히 지적하였다.
이렇듯이 저자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현대사회에서 특히 화이트 칼라들이 일을 하는 조직에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사라진지 오래고, 오직 충성서약만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회사가 제공하는 이데올로기는 개인주의적이고 개인의 능력에 집중을 하라고 하기 때문에 능력주의로만 세상을 보며 살아남은 자들이 능력자가 되고, 언제 자기가 대상이 될지 모를 감원대상자는 실패자로 보도록 세뇌를 시키고 있다. 그런 면들을 통해 저자는 무엇보다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 실업수당의 충분한 혜택, 전국민의료보험 등을 당당히 요구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규칙을 지키고 만사를 올바르게 살아온 화이트 칼라들이 왜 몰락을 해야 하는가,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눈앞에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담담히 적어냈다.
『희망의 배신』을 보면서 반복해서 보이는 기시감이 참 불편했다. 또 우리 사회에 유행인 코칭, 리더쉽 트레이닝, 자기계발서등이 역설하는 내용들의 이면에 있는 것들이 중산층에서 떨궈지지 않으려는 불안과 공포를 세련되게 자극하면서 결국 모든 것은 ‘내 문제’로 몰아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질감의 공포였다. 이제 우리가 쥐어야할 다음 동아줄은 무엇일까?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연대와 동맹의 용기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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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저/전미영 역 | 부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3권이자 완결편. 이번에는 화이트칼라 구직 현장에 뛰어들어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마저 배신당하고 일자리 불안과 과다 노동에 지쳐 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중산층의 암울한 현실을 고발한다. 기업 안에 있을 때는 노예로, 기업에서 밀려나고 나면 빈곤에 대한 공포를 안고 워킹 푸어로 전락하는 화이트칼라.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마저 무너져 가는 것이 오늘날 중산층의 아픈 현실을 저자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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