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내려놓자. 마음을 비우자. 마음을 다스리자. 최근 ‘힐링’, ‘치유’, ‘멈춤’ ‘비움’이란 단어들이 유행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비우고 다스릴 수 있을까.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 있기에 어떻게 멈추고 비우란 말인가.
세상살이의 고달픔 속에서 언제나 분노의 파도에 휩쓸려 다니지만, 정작 그 분노와 화(火)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모르기에 상처와 후회만 반복된다. 계속된 분노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상대의 허물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서 분노의 실체부터 찾아야 한다.
분노, 화냄, 짜증의 실체는 한마디로 ‘게으름’이다. 이는 이제마 선생이 창안한 사상의학적 결론이다. 흔히 사상의학은 외모나 겉보기 성격 등으로 체질을 넷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약이나 음식을 가려먹는 정도로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상의학은 인간이 타고난 정신심리구조를 분석하는 일종의 한방정신분석학에 가깝다.
사상의학에서는 분노의 실체를 ‘노성’(怒性)과 ‘노정’(怒情)으로 설명한다. 성이란 내면의 본질, 정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분노의 실체 역시 둘로 구분된다. 진정 화가 난 사람은 눈빛에서만 분노가 엿보인다. 요란하게 화내거나 소리지르지 않는다. 대신, 혼자라도 할 일을 찾아 분주히 노력한다. 이것이 노성이다.
반면, 노정은 겉으로 소리 지르고 화내고 짜증낸다. 그 실체는 진정한 분노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 마음은 조급하지만, 실천할 마음은 이미 식었고 게을러진 것이다. 나는 할 마음이 없는데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남을 탓하는 자기방어적 태도가 바로 화냄이나 짜증의 실체다.
주역 팔괘 중 불을 상징하는 리괘(離卦)와, 우레를 상징하는 진괘(震卦)에 담긴 이치도 마찬가지다. 불은 조용히 자신을 태워 주위를 뜨겁게 만든다. 반면, 우레는 세상을 뒤집을 듯 순간 요란한 천둥번개를 동반하지만 콩 한쪽도 익히기 어려울 정도로 내실이 없다. 그 실체가 바로 마음이 게을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환자 사례를 보자. 시도때도 없이 주변사람들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는 ‘분노조절장애’(Anger disorder)로 내원한 40대 여성. 아이와 남편에게 매일같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순간 이유없이 감정이 동요하면 참을 사이도 없이 폭언까지 쏟아낸다. 금방 심했다 싶어 후회하고 안 그러리라 다짐해보지만 허사다. 오히려 주기가 짧아지고 화내는 수위나 표현도 거칠어진다. 이러다보니 몸도 종합병동이다. 아침마다 심한 두통으로 시작해 밤에는 수면제 없이 잠들기 어렵다. 신경성 소화장애는 물론이고 화병으로 여러 가지 약을 달고 산다.
도대체 왜 이토록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생기는 것일까. 그녀가 실제 화를 냈던 사례들을 분석해 보자. 어느날 놀다가 다쳐서 들어오는 아이를 보는 순간 극도의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엄마가 조심해서 놀라고 분명히 말했잖아”라며 다친 아이를 더 때리고 나무랐다. 병원 치료를 마친 뒤에야, ‘너무 심하게 야단쳤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오는 길에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줬다.
아이가 다쳤는데 왜 화부터 났을까.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흉터는 남지 않을지부터 걱정했다면 측은함이 먼저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은 ‘안 그래도 바쁜데 또 귀찮은 일이 생겼다’, ‘가뜩이나 경기도 어려운데 병원비 들어가겠다’며 아이보다 자신부터 걱정한 것이다. 이런 게으름이 바로 화(Anger)의 실체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게으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대신, 스스로를 감쪽같이 속여줄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하다. ‘나는 분명 조심해서 놀라고 했다, 그런데도 네가 잘못해서 다쳤고, 그래서 나는 화가 난 것이다’라며 합리화해 버린다. 이로써 아이에 대한 자신의 거친 분노는 정당성과 면죄부를 획득한다. 당연히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고 아이가 자신의 짜증을 유발한 원인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아이만 달라지면..., 아이만 고쳐놓으면... 내가 화를 덜 낼 텐데...’라고 여긴다. 이처럼 바꾸기 힘든 상대나 세상을 바꾸려고만 하니 분노는 멈추기가 힘들다.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다. 금방 못 알아먹으면 아이를 심하게 윽박지르고 야단친다. 이때도 엄마는 착각한다. 조금 전 자세히 설명했는데도, 아이가 집중을 안 해서 자신이 힘들어졌고 화를 낸다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분노나 짜증의 실체는 게으름’이란 사상의학적 결론에 대입시켜보면 금방 드러난다.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차분히 설명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화는 나지 않는다. 대신, 이런 노력이 귀찮아질 때 버럭 화가 난다. 애초에 가르치기가 귀찮았던 엄마의 마음이 화의 본질이다. ‘사실은 내가 가르치기 귀찮았다’라는 자신의 게으름을 황급히 가리려고, 화부터 내고 상대의 크고 작은 잘못을 명분으로 삼는 것이다.
만약, 이 아이를 과외선생이 가르쳤다면 어땠을까. 알바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던 대학생이 어렵게 기회를 얻은 과외자리였다면? 아마도 아이가 모르는 것이 많아도 짜증은커녕 반갑기만 할 수도 있다. 아이가 모르는 게 많아야 자신의 과외자리가 계속 유지될 테니, 열 번이라도 다시 설명하고플 것이다.
“아이가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머리가 참 좋네요”라며 칭찬이라도 하고 갈지 모른다. 반면, 이미 다른 과외자리도 많고, 이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보수가 적어 불만인 과외교사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쉽게 짜증내기 일쑤였을 것이다.
이처럼, 화나 짜증은 언뜻 상대방인 아이의 잘못이 상황을 유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각자가 처한 상황과 마음속 게으름 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언제나 상대나 외부상황을 핑계삼아 자신의 게으름을 교묘히 가린 것뿐이다.
만약,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졌는데 짜증이 확 치밀어 술이라도 마시고 취해 버릴까 싶다면 이는 어떤 마음일까. 다시 공부해서 시험봐야 하는 게 귀찮은 것뿐이다. 이를 들여다보지 않고 운전면허시험의 불합리성을 운운하거나 다른 핑계를 대면, 분노의 실체를 보지 못하니 짜증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괴테는
“내면의 자아를 다스릴 줄 모르는 자일수록 자신의 오만한 뜻에 따라 이웃의 의지부터 지배하려 든다”고 일갈했다. 자신의 게으름을 모르고 보지 않았기에, 상대나 세상 탓으로 더욱 검게 덧칠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화병이나 우울증, 공황장애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곤 언제나 상대나 세상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여긴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자 다짐해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순간 억압했다가 폭발하기만 반복한다.
화냄과 짜증의 밑바닥에 가려진 자신의 ‘게으름’을 바로 보아야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고 힐링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공자는 ‘군자는 남이 아닌 자신에게서 구한다’고 했다. 이제마 역시
“사람의 마음에는 무릇 자신과 세상을 속이려는 심욕이 있으니, 이를 스스로 꾸짖어야 비로소 요순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냥 짜증난다’, ‘그냥 화가 치민다’는 말 속에 감춰진 자신의 게으름부터 돌아볼 수 있어야 진정한 힐링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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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 K의 마음문제 상담소 강용혁 저 | 북드라망
이 책은 한방정신분석학이라 할 ‘성정분석’을 전공한 한의사이자 칼럼니스트인 강용혁이, 그간의 상담사례를 바탕으로, 현대인과 가족의 문제를 풀어낸 심리치유서이다. 폭식, 부부관계, 공황장애, 강박증, 학습장애, 고부갈등, 장서갈등, 위경련 등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앓고 있고, 고민하는 몸의 문제와 스트레스에 대해 각자의 성정 기질에서 기반한 마음의 문제를 찾고 이를 이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 가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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