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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왜 이런 ‘위험한’ 책을 샀을까?

아버지의 책을 뒤적이며 과거로 떠나다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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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더 이상 한 곳에 모여 살 수 없었다. 새 집은 좁았다. 형편껏 돌봐줄 새 주인을 찾아야 했다. 입양을 가기도 했다. 결국, 절반은 타향으로 떠났다. 나와 형제들의 운명이 아니다.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더 이상 한 곳에 모여 살 수 없었다. 새 집은 좁았다. 형편껏 돌봐줄 새 주인을 찾아야 했다. 입양을 가기도 했다. 결국, 절반은 타향으로 떠났다. 나와 형제들의 운명이 아니다.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명의로 된 주택에서 산 적이 없다. 젊은 시절 잠깐 사글세방에서 산 것을 제외하면 20대 이후 평생을 직장이라 할 만한 어떤 기관의 사택에서 지냈다. 1993년 1월, 죽음을 맞이한 곳도 사택이었다. 아버지가 일을 보면서 기거도 했던 그 건축물은 80년대 초에 아버지 자신이 직접 건립을 기획해 지은 곳이었다. 그 중의 일부분이었던 사택엔 거실과 안방과 주방 말고도 10평 (33.058㎡) 남짓한 서재가 따로 있었다. 그곳에선 아들의 출입도 반기지 않았다. 서가의 구성과 소품들의 배열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머리에서 나왔다. 내 기억 속에서도 서재란 아버지의 어떤 정성과 끈질긴 애착이 묻어 있는 공간이다. 바로 그 곳에 사방 벽면을 가득 채운 5,000여권의 자식들이 살았다. 책은 정말이지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이었다. 1959년부터 1992년까지 아버지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스크랩북을 만든 배경엔 책에 대한 사랑이 자리했다고 믿는다.

물론 지금도 아버지의 서재는 남아있다. 1/3 정도의 크기로 축소되었지만, 고향에서 홀로 사는 어머니의 집 방 한 칸에 그 원형은 살아있다. 이 글을 쓰기 직전 아버지의 서재를 찾아 책을 뒤적이며 과거로 떠나보았다.




지금도 족히 2,000권은 된다. 분야는 문학, 철학, 사회, 종교, 역사, 경영을 넘나든다. 1970년에 나온 『컬러판 세계의 문학대전집』 22권이나, 1976년 어문각판의 『신한국문학전집』 50권에선 전집의 진열에 대한 허영심이 읽혀진다. 학원사에서 1973년에 나온 『세계원색백과대사전』 20권과 삼성출판사에서 1982년에 나온 『대세계의 역사』 12권도 마찬가지다. 시나 소설도 덩어리째 꽂힌 게 꽤 된다. 김지하 시인의 『황토』(1984년)를 제1권으로 한 풀빛출판사의 풀빛시선 시리즈는 박영근 시인의 『대열』(1987)에 이르기까지 27권에 이르고, 신경림 시인의 『농무』를 1권(1975년)으로 한 창작과비평사의 창비시선 시리즈는 40여권이다. 황석영의 『장길산』(현암사, 1983년), 홍벽초(홍명희)의 『임거정』(사계절출판사, 1985년), 김주영의 『객주』(창작과비평사, 1981년), 정비석의 『손자병법』(고려원, 1983년), 유주현의 『조선총독부』(신태양사, 1967년)등은 각각 5~10권에 걸친 대하소설들이다.

책장 곳곳엔 잡동사니들이 산재해 있다. 밥상이 세 개나 세워져 있고 각종 액자들이 서가 곳곳에 놓였다. 할아버지 사진, 할머니 사진, 손자 손녀들 사진에 가족사진들. 아버지 생전에 쓰던 각종 살충제와 모기향, 랜턴도 있다. 여행을 다녀올 때 기념품으로 사왔을 풍경사진틀, 시계, 주전자, 소라, 모형 삽, 거북이, 바가지, 야구공도 보인다. 여러 종류의 감사패도 있고 동전꽂이에 꽂힌 10원짜리 동전들도 그대로다.

서가는 예전의 장중한 자태와 일목요연함을 잃었다. 100여권의 어떤 책들은 마구잡이로 쌓아놓아 제목조차 볼 수가 없다. 전집류를 제외하곤 질서 없이 꽂혀져 있다. 그 책들을 다시 꼼꼼히 들여다본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매해 발간된 조선일보 보도사진집과, 『사회만평-만화로 보는 세태』(학문출판사, 1989년)는 신문사 일을 하는 내게 특별한 눈길을 끈다. 1980년에 발간된 「TIME」과 「뿌리깊은나무」, 「주간조선」등의 주ㆍ월간지도 그렇다. 입화륭(立花陸)이 쓴 『일본공산당사』(고려원, 1985년)와 『1968세계국방연감』(삼국문화사, 1968년)을 대할 땐 “별 책을 다 샀네”라는 혼잣말이 나왔다. 그 밖의 책 이름들을 스쳐 지나쳐본다. 『여자란 무엇인가』(김용옥, 통나무, 1990년), 『삼청교육대 악몽의 365일』(정충제, 청사, 1988년), 『신들의 주사위』(황순원, 문학과지성사, 1982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이문열, 자유문학사, 1988년), 『박목월 시선집』(서문당, 1984년), 『노래』(서정주, 정음문화사, 1984년), 『하늘의 별처럼 들의 꽃처럼』(김형석 지음, 주우, 1981년』, 『정신력의 기적』(단 카스터, 문예출판사, 1980년), 『인생을 긍정하라』(시드니 그린빅, 원음사, 1983년), 『휴일의 에세이』(이어령, 문학사상사, 1978년), 『죽으면 죽으리라』(안이숙, 기독교문사, 1976년), 『죽으면 살리라』(안이숙, 기독교문사, 1976년)….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별한 직후, 둘째 아들인 나와 서울에서 함께 살았다. 아버지 서재의 5천여 권을 서울의 스무 평짜리 아파트에 다 가져올 수는 없었다. 일부의 책을 고향의 할머니 집(지금 어머니가 기거하는 집이다)에 덜어낸 뒤 서울로 가져왔다. 그럼에도 다 놓을 데가 없었다. 결국 2,000여권의 종교서적을 아버지가 졸업한 신학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일부는 형이 가져갔다. 내가 결혼하고, 어머니가 다시 고향의 할머니 집으로 내려간 뒤 아버지의 책들은 또 제각기 흩어졌다. 어머니는 “웬만하면 책 좀 버리자”는 하소연을 했고, 실제로 일부를 재활용 쓰레기로 내놨다. 또 얼마간은 필요한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는 책을 내다버리자는 어머니를 수시로 말려야 했다. 그렇게 하여 사수한 책이 지금 어머니 집에 남은 2,000권이고, 두 아들의 집에 도합 500여권이 더 있다.

어머니는 1970년대 중반의 ‘나무 책장’ 하나를 기억했다. 전라북도의 농촌마을에 살 때였다. 아버지는 어느 날 읍내에 나가 나무 재료를 사왔다. 그리곤 하루 종일 톱질을 하고 목재의 아귀를 맞추며 부산을 떤 끝에 책장 하나를 짰다. 그것은 어머니가 기억하는 아버지 최초의 책장이었다. 그곳에 책 100여권을 가득 꽂아놓고 흐뭇해하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은 어떤 열망의 시작이었다. 그 뒤 아버지는 책에 집착했다. 세월이 얼마간 흐르고, 전라북도에서 강원도의 고향으로 되돌아온 뒤엔 아버지가 짠 책장의 수는 너 댓 개로 늘어났다. 조금의 여유가 생긴 뒤엔 가구점에서 책장을 구입했다.

어머니는 책 때문에 늘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살림할 돈도 부족한데 쓸데없는 지출을 한다고 못마땅해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속였다. “다른 문으로 서재에 먼저 책을 부려 넣은 뒤 맨 손인 듯 시치미를 떼며 집에 들어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게 어머니의 증언이다. 그중엔 새 책도 있었고 헌 책도 있었다.

내 기억에 남은 풍경도 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1985년의 봄이었다. 아버지가 올라와 다른 볼 일을 본 뒤 아들을 만나러 대학 캠퍼스 안에까지 들어왔다. 당시엔 마침 정부당국이 306종의 책을 ‘불온ㆍ불법 출판물’로 규정하고 단속하던 ‘금서파동’이 있었다. 아들과 함께 도서관 앞을 지나가던 아버지의 발길이 멎었다. 총학생회 간부들이 가판대에 그 문제의 금서들을 쌓아놓고 팔던 중이었다.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살펴보던 아버지가 지갑을 꺼냈다. 난 조금 놀랐다. “아니, 이런 위험한 책들을 왜 사세요?”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는 10여권의 셈을 치렀다. 아버지가 현실사회에 비판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기에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베트남전쟁』 등을 포함해 시대정신이 담긴 문제적 저작물이 많았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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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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