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만나기 불편하고 왠지 죄인이 된 듯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이의 담임선생님일 것이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는 암만 생각해도 갑을관계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모든 엄마들은 등교하는 아이들 뒷통수에 대고 똑같은 잔소리를 해댄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초등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이 부모 다음으로 만나는 세상의 척도이다. 어찌 보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건지, 좋은 행동을 했을 때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부모보다 더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학교 선생님이다. 그러다보니 부모 입장에서는 학교라는 곳이 내 아이가 평가를 받는 곳이고, 선생님은 평가를 주도하는 무서운(?) 사람으로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 학년 첫 학기가 되면 모든 부모가 긴장한다. 어떤 선생님을 만날지가 아이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일 년을 무사히 보내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숙제를 많이 내주어서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선생님, 과제물을 안 해왔을 때 집으로 바로 연락을 해서 엄마를 긴장시키는 선생님, 아이들이 잘못해도 크게 관여치 않아 아이 습관이 나빠지지 않을까 불안하게 만드는 선생님 등등.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아이와 부모에게 큰 비중을 갖는다. 특히 아직 어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저학년들에게 선생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아이 편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에는 간혹 수긍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는 경우도 있다. 어린 아이일 뿐인데 꼭 벌을 주어야 했나? 아이에게 상처가 될 것 같은데 그런 말을 꼭 했어야 하나? 우리 애가 마음에 안 드나? 결국은 나를 비난하는 건가?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지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할 법만 머리띠가 유행이었다. 머리띠는 빨간 색 머릿수건 모양이었고, 머리띠 양쪽 끝에는 조롱조롱 따내려간 금발의 머리카락이 붙어있었다. 가게에서 머리띠를 본 순간 집에 있는 딸아이가 생각나서 제일 예뻐 보이는 것을 샀다. 아이도 몹시 마음에 들어 했고 다음 날로 당장 새 머리띠를 하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 다녀온 딸아이가 나에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엄마, 이 머리띠 예뻐?”
“엄마가 예뻐서 사온 건대 왜 그래?”
“선생님이 이거 하지 말라고 하셨어.”
“왜?”
“왜 이렇게 애기 같은 걸 했니 그러셨어.”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상황이 이해되었다. 당시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출산휴가로 학교를 비운 상태였고, 그 기간 동안 임시로 다른 선생님이 오셨는데 연세가 꽤 있는 분이었다. 아마도 그 분의 눈에는 빨간 머릿수건과 금발의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의 말을 종합해볼 때 머릿수건보다는 특히 금발을 눈에 거슬려 했던 것 같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고민이 되었다. 당시에 정말로 많은 아이들이 그 머리띠를 하고 다녔는데, 내 눈에는 예쁘게 보이기만 했는데 선생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선생님의 기준이 엄마의 기준이 충돌한 상황이었다.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애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저게 뭐 어때서?’ 처음에는 기분이 상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혼자서 툴툴대고 있는데 아이가 다시 질문을 한다.
“엄마, 이 머리띠 예뻐? 나 이거 하면 안 돼?”
엄마라는 자리는 감정에 온전히 자리를 내어줄 틈이 없는 자리였다. 시간을 벌기 위해 우선 밥을 먹으라고 하고 이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내 생각에는 이게 맞는데 선생님은 아니라고 하네. 여기에서 뭐가 제일 중요하지?’ 답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내 기분이나 기준이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점이었다.
아이는 세상에 나아가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 중에서는 뜻이 잘 맞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서로 생각이 다르고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도 만날 것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나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준이 다른 선생님은 아이에게 생애 초기에 만난 교과서였다. 엄마인 나는 과연 이 상황에서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할까?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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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도 아주 많다.”
“내 생각이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해야 한다.”
“때로는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이라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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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이를 데리고 내가 정리한 내용을 가르쳐야 했다.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이 머리띠가 정말로 예뻐서 사준 거야. 지금 봐도 정말 예쁘고 너한테 잘 어울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람은 서로 생각이 달라. 엄마 눈에는 예쁜데 선생님은 다르게 볼 수도 있어. 너하고 엄마도 어떤 때는 서로 생각이 다르잖아.” 이번에도 아이는 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어려운 고비가 남았다.
“집에서는 네가 이 머리띠를 해도 괜찮아. 그런데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너희들을 가르치고 너희들이 뭘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는 분이잖아. 그래서 엄마 생각에는 학교에서는 선생님 생각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 표정에는 이번에도 별다른 거부감이 어리지 않았다.
“엄마, 그럼 이거 하지 마?”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집에서만 하고 학교 갈 때는 다른 머리띠를 하고 가는 거야. 또 한 가지 방법은 여기 있는 이 금발머리를 자르는 거야. 그럼 학교에서도 할 수 있어.”
잠깐 생각하던 아이는 금발머리를 자르겠다고 했다. 나는 곧 가위를 가져와 싹뚝, 머리카락을 잘랐다. 머릿수건만 있는 머리띠는 나름 아이에게 잘 어울렸다.
물론 선생님이 대체 왜 그러냐고, 별 걸 다 갖고 트집이라고 불평을 할 수도 있었다. 솔직한 감정은 사실 그 쪽에 더 가까웠다. 그렇지만 내가 나서서 화를 내고 선생님에게 불평을 말하면 아이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의견을 내는 건 짜증나는 일이구나. 저 사람이 틀렸어. 세상에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결국 부정적인 생각만을 배울 것이다.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선생님을 따르라는 건 아이 나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더 크면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나는 잘 가르친 모양이다.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지각을 해서 반성문을 쓰고 수업시간에 못 들어간 일이 있었다. 당시 반성문에 아이는 이렇게 썼다고 했다.
‘지각을 한 건 제 잘못이고, 반성문을 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제가 공부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부당한 것 같습니다.’ 다행이 선생님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이었다. 반성문을 보고 수업에 들어가라고 하셨단다. 아이는 어느 새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선별하는 능력까지도 갖추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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