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에서 썼던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서 베로나까지는 기차로 5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지도를 보고 며칠을 고심하던 저는 ‘고음악축제’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를 들르기로 했습니다. 고음악축제는 8월에 열리기 때문에 축제를 즐길 수는 없었지만, 인스부르크는 도시 자체가 1년 내 음악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에게는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하지만, 인스부르크는 막시밀리안 1세 통치 때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과 현대적인 멋이 공존하는 감각적인 도시이기도 하고요.
제가 인스부르크를 방문했을 때도 궁전 앞마당에서 매일 저녁 무료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는데요. 그날따라 장대비가 왔습니다. ‘설마 이 비를 맞고 사람들이 공연을 볼까’ 싶었는데, 왠걸요? 공연을 즐기는 멋쟁이들은 비옷도 어찌나 완벽한 걸 준비하는지요. 그 빗속에서도 클래식 공연은 2시간여 이어졌고, 객석에서는 ‘브라보’와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인스부르크를 찾는 여행객들이라면 알프스 산맥 아래서 펼쳐지는 한밤의 콘서트를 잊지 마세요.
베로나는 이탈리아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는 기차로 3시간 만에 갈 수 있습니다. 베로나로 가는 내내 알프스 산맥을 볼 수 있는데요. 베로나로 들어서면 알프스에서 시작된 아디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내에서는 밀라노와 베니스 사이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여행일정에 추가하기 딱 좋습니다.
베로나는 ‘사랑의 도시’로도 유명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이죠. 그래서 도시 중심에는 ‘줄리엣의 집’이 있습니다. 연중 많은 여행객들이 ‘줄리엣의 집’을 찾는데요. 줄리엣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줄리엣 동상 주변에는 잠시 ‘변태’로 돌변한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몇 년 전 ‘이몽룡과 성춘향’의 도시 남원과 베로나 시가 정책교류 협약을 맺기도 했답니다.
2세기 초에 건설된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아레나극장. 아레나는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과 나폴리 근처 카푸아에 있는 경기장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원형경기장입니다. 원래 투기장이었던 이곳에 해마다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오페라를 보기 위해 찾아듭니다. 축제는 베로나 출신의 테너 지오반니 제나텔로(Giovanni Zenatello)와 극장 기획자 로바토(Ottone Rovato)가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1913년 여름 야외 오페라를 공연하면서 시작됐는데요. 올해로 장장 90회를 맞았습니다.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인 만큼 대부분의 무대는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을 중심으로 공연되는데요. 베르디의 <아이다(AIDA)> <리골레토(RIGOLETTO)>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나부코(NABUCCO)>, 푸치니의 <투란도트(TURANDOT)> <라보엠(LA BOHEME)> 등이 공연되고, 비제의 <카르멘(CARMEN)> 등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원형경기장은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안전을 위해 만여 명만 입장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티켓은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홈페이지(
www.arena.it/en-US/HOMEen.html)를 통해 예매할 수 있는데요. 티켓을 출력해가면 바로 입장이 가능합니다. 저는 이번에도 가난한 유학생 버전으로 가장 저렴한 자리에서 봤는데요. 오케스트라 바로 뒤쪽 자리는 VIP석으로 드레스와 슈트를 갖춰 입은 이들이 화려한 몸놀림으로 입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는 고대 원형경기장이 갖춘 울림 현상을 이용해 따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데요. 그래서 자리가 너무 멀 경우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올해 90돌을 맞은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은 지난 6월 22일 모차르트의 <돈 조바니(DON GIOVANNI)>로 문을 열었습니다. 9월 2일까지 베르디의 <아이다(AIDA)>로 막을 내릴 때까지 날짜별로 투란도트, 토스카, 카르멘, 로미오 앤 줄리엣 등이 함께 공연되는데요. 모든 오페라가 탐이 났지만 줄리엣의 고향에 간 만큼 저는 <로미오 앤 줄리엣>을 보기로 했습니다.
오페라 <로미오 앤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샤를 구노가 엮어낸 작품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베마리아>로 잘 알려진 프랑스 출신 작곡가이지요. 오페라 <로미오 앤 줄리엣>은 지난 1867년 파리의 테아트르 릴리크에서 초연됐는데요. 국내에서는 자주 접하기 힘든 작품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공연 레퍼토리에서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공연은 밤 9시에 시작하는데요. 매일 공연되는 작품이 바뀌는 만큼 고정된 무대장치를 설치할 수 없어 무대연출이 다양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원형경기장을 한껏 이용한 웅장한 고전미는 고대 문화유산을 지닌 이탈리아만이 뽐낼 수 있는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대규모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화려한 하모니, 그 장중한 울림에 반해 있는 사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원형경기장에는 지붕이 없습니다. 무대는 물론이고 오케스트라 피트에도 지붕이 없으니, 공연은 당연히 중단됐습니다.
관객들은 우르르 비를 피할 수 있는 계단으로 몰려갔고, 신기한 것은 그곳에서 별 걱정 없이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근심 있는 사람은 저 뿐입니다. 공연이 너무 늦게 끝나면 숙소에 돌아갈 때 무서운데, 내일은 베로나를 떠나야 하는데 비가 계속 오면 어쩌나... 일단 오페라가 시작하면 중간에 비가 와서 공연이 취소돼도 환불은 안 됩니다. 몇 년을 기다려 찾아온 베로나, 그러나 빗속에 30분을 기다린 저는 씽긋 웃으며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역시 둘 다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는 건 없습니다.
베로나 역시 알프스 산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오는 편입니다. 또 도시 구석구석에 자리한 아름다운 성당과 박물관, 활기가 넘치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 자꾸 발목을 잡는 쇼핑 숍이 넘쳐나기 때문에 베로나를 여행할 때는 이틀 정도 머물면서 안전하게 공연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년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아이다> <나부코> <나트라비아타> <일트로바토레> <메사다레퀴엠> <로미오 앤 줄리엣> <리골레토> 등이 공연될 예정인데요. 공연 때 제 옆에 앉았던 중년 여인은 어릴 적 부모님과 베로나 페스티벌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딸들과 함께 왔다고요. 근사하지 않나요?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아도 혹은 잘 몰라도,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은 오랫동안 마음을 출렁이게 만드는 멋진 축제입니다. 저는 올해 공연을 제대로 못 봤으니, 내년을 기약해봅니다. 저는 딸이 없으니, 조카들한테 같이 가자고 졸라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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