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를 함께 여행했던 소현의 소개로 말라가 수도원에 계시는 한국인 신부님께 가보고 싶은 곳에 대해 여쭤볼 수 있게 되었고, 숙소도 수도원에 다니시는 신자 분의 집으로 정했다.
산타 후스타에서 기차를 타고 말라가 역에서 내려 신부님을 만났다. 그런데 인사를 나누고는 좀 난감해하시며,
“저…… 그런데 어쩌죠? 그 자매님, 오늘 친구분이 돌아가셔서 병원에 계세요. 집에서 묵을 수가 없게 되었네요. 불편하지 않다면 수도원에서 묵으셔도 됩니다.”
수도원??
갑자기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수도원을 떠올리니 왠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
“아니에요. 다른 숙소를 알아볼게요.”
“다른 여행객들도 종종 묵고 가시고 하니 어려워하지 마시고 가시지요.”
‘여행 경비도 넉넉지 않은데 어쩌지?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소심 길치 드디어 결심!
새로운 곳에 적응해 보기로 한다.
말라가는 역시 알려진 대로 휴양지다운 면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바닷가라 그런지 수영복을 파는 가게가 눈에 띄게 많고 사람들의 표정들도 부드럽고 여유롭다. 음식점이나 상점에 들어가도 다른 안달루시아 지방에 비해 많이 친절한 편이다. 말라가 주에서 운영하는 플라멩코 페냐에 갔지만 문이 닫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옆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가던 길을 멈추고 대답해 준다. 하지만,
“공사 때문일 거예요.”
“이 시간에 열려 있어야 하는데…….”
“휴일 아니야?”
등등 추측만 다양할 뿐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말라가에서의 플라멩코 공연은 포기해야 했다. 대신 세르반테스 극장에서 오페라 「카르멘」을 보기 위해 짐을 수도원에 내려놓고 신부님의 안내를 받아 표를 예매하러 시내로 나갔다. 그런데 도착해서 표를 사려니 너무 비싸다. 10만 원이 훨씬 넘는다. 지금까지의 좋은 공연들도 대부분 4,5만 원을 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고민이 되었다.
잠깐 생각하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다시 매표소로 갔더니 글쎄 마지막 표가 내 앞사람 차지가 되어버렸다. 난감해하고 있으니까 매표소 직원이 공연 시작 30분 전에 와보면 저렴한 티켓을 구할 수 있을 거란다. 그때까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를 하면서 신부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보신다.
“무대에 서는 배우예요.”
신부님은 처음 만나는 직업군에 대해 이곳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신다. 나 또한 신부님께 궁금한 점을 여쭤보는데 나와는 다른 특수한 분야에 계시는 분이라 좀 어렵고 조심스럽다.
식사를 하고 다시 와보니 20유로(약 3만 원) 정도의 표 몇 장이 남아 있었다. 나만 공연을 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아, 그럼 저도 공연을 볼 수 있겠는데요” 하시며 입장권을 사신다.
「카르멘」을 신부님과?
‘앗! 신부님 이것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열정적인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소심 쿠키 혹시 일반인이 아닌 신부님께 나쁜 영향을 드리는 것은 아닌지…….
이런이런……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신부님은 좋은 공연을 보게 되었다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벌써 표를 사서 극장으로 들어가고 계신다. 극을 보면서도 괜히 신실한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을 한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어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공연은 출연진이 100명이나 되는 대형 오페라였다.
비제의 오페라와 원작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은 조금 다르다. 메리메 소설에서는 작가 자신이 등장하며 작가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지만, 비제의 「카르멘」에서는 작가가 등장하지 않고 원작에 없는 인물인 미카엘라를 등장시켜 더욱 극적인 요소를 살린다. ‘호세-에스카미오-카르멘’, 혹은 ‘카르멘-미카엘라-호세’와 같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다.
카르멘 역을 맡은 오페라 가수는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도, 그리고 극중에서 보여주는 플라멩코까지도 모두 잘 소화해 내어 카르멘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다. 다 보고 나서 신부님은,
“좋은 공연 정말 잘 봤습니다. 작년에 「로미오와 줄리엣」 뮤지컬을 처음 보았는데 이런 문화 생활을 종종 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며 오히려 고맙다고 얘기하신다.
내가 공연을 보면서 조금 불편했던 마음을 얘기하니까 신부님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듯 그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신부가 인간을 모르면 어떻게 사목 생활을 하고 고해성사를 듣고 고민을 서로 나눌 수가 있겠습니까? 신부도 다 똑같은 사람이고 계율 안에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저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 그 차이뿐입니다.”라고 하신다.
하긴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을 할 때도 수녀님, 신부님, 스님들을 객석에서 종종 보기도 했었는데 나는 신부님을 대하는 어려움을 넘어서 괜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입견이나 편견은 사람의 눈을 가려 온전히 볼 수 없게 만든다.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없어야 하는 배우가 말이다. 맡은 배역에 다가가기 위해 하고 싶은 것들을 무섭게 인내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 또한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하는 수도자의 마음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할 때가 간혹 있다. 배역에 대한 연민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긴 배우의 기원은 제사장, 즉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었다.
피카소 박물관이나 로만 극장, 알카사바(요새) 등을 돌아보았다.
“이베리아 반도는 지질학적으로 항상 외침에 노출되어 있어 여러 종족과 민족이 자신들의 문화와 더불어 등장하였다가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유럽적 요소, 아랍적 요소, 독창적 요소들이 풍성해져 다양한 문화유산을 지니게 되었다.”
책에서 읽은 내용과 같이 지금까지 둘러본 세비야, 론다, 코르도바, 그라나다, 말라가 모두 너무나 독특한 모습과 문화 유적들로, 마치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처럼 각각의 고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이제 말라가를 떠나야 할 시간.
신부님은 덕분에 공연도 보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이야기 또한 많이 들었다며 내게 묵주를 선물로 주신다. 인사를 나누며 신부님은,
“답답하게 펼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시도해 보세요.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움츠러들지 마시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신부님은 나의 소심함을 꿰뚫어 보신 건가?
그렇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혹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좋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움츠러들고 제자리걸음을 할 때도 많았다. 앞으로는 어깨를 조금 더 펴고 가야겠다. 스페인에 와서 받은 세 번째 ‘좋은 신호’다. 이 좋은 신호는 내가 책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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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카르멘을 꿈꾼다 채국희 저 | 드림앤(Dreamn)
낯선 곳을 여행하며 낯설고 인상적인 것을 기록하는 일반적인 여행서가 아니다. 오히려 낯익은 광경들을 찾아가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혼의 독백과 같다. 바람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인 집시의 춤, 플라멩코를 배우기 위해 떠난 세비야행. 그녀는 세비야에 삼 개월 동안 머물렀고, 플라멩코를 알기 위해 뉴욕, 안달루시아의 도시들, 마드리드를 찾아갔다. 그리고 배우 채국희의 시선과 사색은 그녀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정과 자유의 발견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