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해외 팬들이 한국 소주병을 찾는 이유 - 생활 속의 미술 눈높이기
꼭 미술관에 가야 공부가 되나? 미술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미술 눈높이기는 우리가 매일매일 보는 일상적 생활 소품속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오창섭 등이 지은『생활의 디자인』(현실문화)은 특히 한국사회에서 매일 무심히 보고 지나치던 철가방, 명조체, 칠성사이다, 바나나맛 우유, 모나미볼펜과 같은 친숙한 생활소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디자인의 관점에서 이 물건의 유래, 현재적 의미,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등 미술적 지남력을 선사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거나 가르칠때 아이의 눈을 조금 ‘고급’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된다. 외국의 유명 작가의 전시회가 개최되거나, 유명 미술관의 콜렉션이 그대로 한국에 온다고 하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아이를 데리고 가지만 막상 가보면 인산인해로 숨이 막힌다. 어두컴컴한 전시관에 들어가서 유명하다는 그림앞에는 사람이 가득하고, 막상 가보면 도록에서 여러 번 그 그림이 있기는 한데, ‘봤다’는 마음속의 인증샷만 했을 뿐, 너무 많은 전시작품 때문에 집중도 안되고, 실제로 기억에 남는 것은 복잡한 전시실의 혼잡뿐, 그래서 내 삶과 미술적 눈높이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다. 생활과 예술이 분리된 덕분에 생긴 부작용이다.
미술 눈높이기는 우리가 매일매일 보는 일상적 생활 소품속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오창섭 등이 지은 『생활의 디자인』(현실문화)은 특히 한국사회에서 매일 무심히 보고 지나치던 철가방, 명조체, 칠성사이다, 바나나맛 우유, 모나미볼펜과 같은 친숙한 생활소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디자인의 관점에서 이 물건의 유래, 현재적 의미,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등 미술적 지남력을 선사하고 있다.
저자는 벤야민을 언급하며 비록 가까이 있다해도 그걸 그 자체로 경험하지 못하고 멀리 있는 무엇인가를 통해 지각하게 되며 삶과 괴리된다고 한다. 그런 디자인은 일상의 삶과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런 아우라적 지각방식이 아닌 기억의 흔적의 지각방식을 통해 디자인을 보자고 제안한다. 일상의 문제로 어디 찾아가서 책 펴들고 이해하려 애를 쓰는 ‘저기’의 방식이 아닌 일상의 생활속 ‘여기’의 관점에서 디자인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사례가 제작시기 미상의 배달용 철가방이다. 저자는 이토록 오랜 세월 원형 그대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인적으로 형태와 기능이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밝은 금속판은 색상이 밝고 번쩍여서 기름진 중국음식을 청결하게 하는 효과가 있고, 기능적으로 봐도 뚜껑이 위가 아닌 옆에 달려서 슬라이딩 개방을 하면 낮은 높이의 음식그릇을 여러개 한 번에 빼기 쉽다. 또 가방이 흔들거려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것, 금속재질이라 세척이 용이하다는 것도 디자인적으로는 장점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런 실용적, 미학적 장점이 철가방의 원형이 수십년째 그대로 보전되고 오늘도 길거리에서 오토바이 등에 타고 달리는 이유다.
두 번째 흥미로운 것은 소주병이다. 한국영화를 많이 본 외국인 영화인들중에 소주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영화에 몰입하다보면 주인공들이 마시는 소주병의 푸른 빛이 그렇게 궁금하고 마셔보고 싶어진다고 한다. 특히 홍상수의 영화를 많이 본 팬들은 한국을 찾으면 꼭 소주병을 찾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소주병은 독특한 자리를 갖는다. 맥주병은 전세계적으로 비슷한 색과 크기지만 소주병만큼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소주가 지금의 유리병에 담기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지만 현재의 360미리리터 용기에 담긴 원형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처음 일위업체인 진로가 주도한 디자인인데, 자원절약차원에서 소주업체가 병을 공유하면서 이 디자인이 일반화되었고 우리에게 ‘소주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완성했다. 소주 한 병에 소주잔으로 7잔 반이 나오는데 그것이 마법의 용량이다. 둘이 먹으면 반 잔, 셋이 먹으면 한 잔 반, 넷이 먹으면 또 반 잔이 모자라는 구조로 꼭 한 병을 더 시키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품 디자인이 미학적 가치뿐 아니라, 함께 짝을 짓는 잔의 용량을 고려해서 구매를 촉진시키는 기능도 있어야한다는 것을 교육하는데 탁월한 예다.
한편 목욕을 할때 때를 밀기 위해 사용하는 이태리 타월은 이태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부산의 한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이가 수입한 까칠한 천의 활용방안을 고민하다가 천을 들고 목욕탕에 가서 우연히 때밀이에 제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상품화하게 되었다는 유래가 소개된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미술과 디자인은 책펴놓고 정색하고 앉아서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먼저 일상에서 시작해도 된다. 매일 보고, 손에 들고 사용하는 많은 생활속의 물건들이 하나같이 깊은 뜻이 있는 명품들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들 손때를 탈 수 있다는 것, 디자인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미학적으로, 기능적으로 충분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큰 결심하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뽑아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 것보다, 지나가다 쓱 손에 잡히는 이태리 타월이나 솥뚜껑 불판을 보면서 생활디자인속에 우리가 알아야 할 미술의 정수에 대해 읊는다면 진짜 내공있는 고수가 지나치듯 무심코 한 수 펼치는 것 같은 효과도 있지 않을까. 미술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을 뿐.
이 책은 14명의 디자인 전문가가 재발견한 한국의 디자인과 그에 얽힌 역사적, 심리적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거의 대부분 일반인들이 열렬하게 사랑했던 물건 혹은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로 자리 잡은 물건들이다. 외형적인 멋을 내세우기보다는 기능성과 편의성으로 우리들의 생활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한국의 디자인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리에서 더 이상 철가방을 들고 배달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면, 혹은 겨울철 갑작스런 허기와 추위를 잊게 할 붕어빵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삭막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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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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