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한국 인디 신의 문제작 < 황망한 사내 >를 선보였던 정차식이 전작과는 다른 파격적인 스타일의 앨범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국내에서 흔치않은 작가주의적 뮤지션인데요, 이번에는 어떤 음악세계를 구축했는지 소개해 봅니다. 아울러 전자음악과 애시드 재즈, 팝의 경계를 넘나드는 크리스탈 레인의 신보와 윤종신과 하림, 조정치의 프로젝트 그룹 신치림의 앨범도 함께 소개합니다.
정차식 < 격동하는 현재사 >
아가씨 참 보드랍소. 이리와 함께 나눠보아요.
안주도 먹고 농담도 먹고 입술도 낚고 오늘 밤은 나랑 지새요. (「풍각쟁이」)
그냥 나랑 잡시다. 당신도 언젠가는 저 달처럼 꺾어진다오. (「옷깃을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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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망한 사내 >를 접했던 사람들이라면 의문이 생길 만도 하다. 내면으로 침잠하면서도 스스로를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던 정차식이 짧은 시간동안(신보는 전작이 나온 지 약 반년 만에 발매되었다) 어떤 변화를 겪었기에 갑자기 여자와 함께 마시며 직설적인 추파를 던지는 난봉꾼으로 변모해버린 것일까. 사람이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만약 이렇게 생각했던 이들이 있다면 앨범에 대한 접근부터가 어긋났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거창하게 해석하자면 - 그리고 정차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
< 격동하는 현재사 >는 사내가 황망해지기 바로 전의 이야기, 다시 말해 성욕과 성취욕, 권력욕으로 엉켜 격동했으나 끝내 뭐 하나 이루지 못해 황망해진 한 남자의 과거사를 그린 앨범이다. 그런데 잠깐, 과거라고? 앨범의 타이틀은 격동하는 '현재사'가 아니었나. (의문스런 점이 있겠지만,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자.)
앨범은 '욕망'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수록곡들은 그의 음악적인 '욕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도 전작처럼 국악, 일렉트로쾴카, 교회 음악, 트로트 등 온갖 종류의 음악과 캐스터네츠(처럼 들리는 출처 불분명한 소리의 악기), 구두 굽 소리 등 흔치 않은 소스들을 뒤섞어 잡탕의 한풀이를 펼쳐낸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리듬에 있다. 전작에 비해 리듬의 음압이 강해진 것이 첫 번째요, '얼쑤', '헤이', '하'와 같은 즉흥적 추임 장단을 리듬의 영역으로 옮겨왔다는 점이 두 번째인데, 흔치 않은 접근법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요소가 더욱 인상적이다. 물론 마감이 잘 되어있지 않다는 감상도 함께 남기기는 하지만, 이런 동물적인 음악에는 오히려 손을 대지 않는 작업 방식이 최선이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덕분에 '즉흥의 미학'은 한껏 살아났다. (여담이지만 '처음'의 느낌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 방식은 한대수의 방식과 맞닿아있는 지점이 있다.)
욕망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일관되어있지 않은 듯 일관되어 있다. 한 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느낌과 비슷한데, 세상사에 혐오를 느끼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숨겨진 욕망을 깨우라 재촉하는 「만추」, 스스로의 욕망을 재확인하며 강한 어조로 노래하다 '살고 싶다고 해도 들어주질 않아서 그런다고' 털어놓는 「파이팅맨」과 같은 곡이 그렇다. 다시 말하면,
< 격동하는 현재사 >는 사내가 왜 황망해졌는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앨범임과 동시에, '욕망'에 넌덜머리를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야 마는 나약한 한 남자의 넋두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연작이 문제작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악을 만나며 우리들 역시 그런 욕망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의 태도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국 겉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설득의 방식은 전작과 마찬가지인 셈, 이번에도 역시 개인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대되고야 만다.
이것이 여러 정황들로 유추한, 앨범의 이름이 왜 '과거사'가 아닌 '현재사'가 되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 내려 본 근거다. 인간의 개인사에 있어 욕망과 허무는 언제나 상존하지 않는가. 사내의 현재가 황망하다한들, 욕망도 어쩔 수 없이 같은 위치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그저 황망하다던 사내, 앨범을 통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네 삶이 황망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이유는 바로 욕망 때문이라고. 그리고는 치부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불편한 이야기들을 꺼내어 툭툭 내뱉는다. 앨범을 만나는 각자가 그것을 인정할 수도, 혹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뭐가 됐든 씁쓸한 뒷맛만 남긴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 앨범 역시 전작에 진배없이 독한 녀석이랄까.
만약 앨범을 듣고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감상자가 삶에 아무런 욕망이 없거나, 삶이 마냥 행복하게 느껴질 만큼 모든 것을 이루었거나.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정차식의 음악이 가지는 설득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의 '주관을 객관화하는' 능력에 다시금 찬사를 보낸다.
글 / 여인협 (lunarianih@naver.com)
크리스탈 레인(Crystal Rain) < Romantic Blue >
크리스탈 레인(Crystal Rain)은 일렉트로니카, 애시드 재즈, 멜로(mellow)한 느낌의 팝을 모두 아우르는 스타일로 우아함을 발산한다. 마니아에게 향유되는 장르를 다루지만 벽이라곤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 들어도, 언제 들어도 편안하고, 까다롭지 않은 것이 크리스탈 레인 음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특정 장르를 추구함에도 그것에 의해 격리되지 않고 다수 청취자를 포섭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첫째로 멜로디에서 기인한다. 산뜻하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으며, 때로는 습하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무겁게 처지지 않는 선율은 뛰어난 흡인력을 낸다. 여기에다가 반주가 기운을 보탠다. 이들의 전자음악은 결코 강성의 소리와는 거리가 멀고, 애시드 재즈를 표현한다고 해도 끈적끈적하거나 재지(jazzy)한 향이 물씬 나지 않는다. 댄서블한 느낌만이 존재하는 담백함으로 듣는 이들의 접근을 쉽게 한다. 또 하나, 보컬 크리시(Crissie, 김수정)의 녹녹하면서도 약간은 고혹적인 음성도 한몫 거든다. 그야말로 안락함과 부드러움이 일렁이는 근사한 팝이다.
2007년 가을에 출시한 데뷔 앨범
< Eternal Love > 이후 무려 4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기타리스트 이수진이 빠지고 키보드 연주자 전해일, 드러머 김상헌, 베이시스트 홍세존, 크리시의 4인조 체제로 바뀌었지만 음악적인 기조는 전작과 동일하다. 타이틀곡 「Super star」는 이전과는 다른 빠른 템포가 돋보이지만 간결한 전자음을 입은 하우스와 깔끔한 멜로디의 발라드가 앨범 전반을 차지한다. 대신 중간 템포의 일렉트로팝 「Like a dream」이나 라틴음악의 정취를 띤 「Tiamo」, 록과 드럼 앤 베이스를 혼합한 듯퇇 구성이 독특한 「마네킹」에서처럼 어쿠스틱 기타를 이용해 수수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뜻함에 신경을 쓴 부분이다.
수록곡들은 크리스탈 레인의 주된 무기가 간결한 펑키함임을 주장한다. 「Party tonight」는 디스코 하우스풍의 편곡으로 자연스러운 흥을 내며, 살랑거리는 기타 리프로 임팩트를 준 「Brunch」, 신스 루프와 명료한 흐름의 코러스가 강한 인상을 남길 「Fall in love」 등이 그렇다. 과한 꾸밈과 억지스러운 수식을 배제해도 충분히 경쾌할 수 있음을 음악으로 검증해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면도 있다. 그룹의 지향이긴 하나 스타일이 데뷔작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마치 연작의 한 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몇 년 터울을 두고 나온 더블 앨범의 다른 한 장을 접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아우트로(「Rain」)만 있으나 만일 지난 음반처럼 인트로(「In rain」)와 아우트로(「Out rain」)를 마련했다면 노래 수도 같아져서 영락없는 쌍둥이 앨범으로 보였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가 덜 행해진 게 아깝다.
그럼에도
< Romantic Blue >는 편안한 댄스음악을 희구하는 이에게 보화 같은 작품이며, 국내에 애시드 재즈의 맥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는 나팔수 같은 존재다. 맹렬한 루프만을 노리는 트렌드에 대안이 될 만한 일렉트로팝이다. 이 소중한 움직임이 4년 만에 재개됐다. 반가움이 큰 게 당연하다.
글 / 한동윤 (bionicsoul@naver.com)
신치림 < 여행 >
수록된 아홉 곡을 듣고 떠오른 것은 한 음악채널에서 방영되었던 < 디렉터스 컷 >이었다. 음악이란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 속에 있음을 새삼 깨닫게 했던 신치림의 행보, 그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이 앨범은 프로그램이 끝난 지점에서 다시 태어난 스핀 오프(Spin Off)작과 같은 인상을 가져다준다. 그 독특한 테이스트는 남겨둔 채 1990년대의 정서를 응축해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감성을 툭툭 먼지를 털어 꺼내보게 하는 덕분이다. 물론 그것을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전부터 상부상조하며 서로의 커리어에 힘을 실어주었던 윤종신과 조정치, 하림의 프로젝트는 기시감은 있을지언정 진부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본래부터 어덜트 컨템포러리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세 명의 뮤지션은 특기를 잘 살려 키치와 복고의 중간점을 잘 찾아내 발굴, 복원시켰다. 무엇보다 같은 노선인 탓에 매몰될 수 있는 개성을 조화시킨 영리함이 돋보인다. 하림이 전반적인 조타수를 잡고, 윤종신과 조정치가 철저히 조력자로 분하며 월권 대신 조화의 기지를 택한 것이 유효타로 직결되었다.
특히나 간만에 듣는 하림의 보컬은 그 반가움을 더한다. 2분 20초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템포를 높이며 후렴구를 들려주는 「퇴근길」은 15년 전에 구입했다는 키보드의 멋스러움이 더해져 직장인들의 애환을 달래며, 「출발」에서는 하몬드 오르간의 미세한 진동과 함께 터져 나오는 '내게로 와'라는 외침이 묵혀 두었던 '떠남'에 대한 열망을 뿌리칠 수 없게 만든다. 자극적인 것들에 묻혀 잊고 있던 수수한 내면의 목소리는 그렇게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너랑 왔던」은 이질적인 첫인상을 준다. 전체 콘셉트 측면에서 보자면 적합하더라도, 갑작스런 윤종신 식 발라드의 출현은 흐름을 끊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코디언과 조정치가 실력을 발휘한 일렉 기타와의 앙상블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소절마다 미세한 편곡의 변화를 줌으로서 감상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신선함을 배가시켰다. '볼매(볼수록 매력있다)'가 아닌 '들매(들을수록 매력있다)'라고 하면 어울리는 표현일까.
자신만의 언어가 실종된 시점에서 이들은 여전히 고유한 어법을 간직하고 있다. 다들 '여행의 설레임'만을 이야기할 때 '여행 후의 휴식'을 이야기하고, '이별의 아픔'만을 직설적으로 이야기 할 때 '모르는 번호'라는 소재로 헤어짐의 상처를 풀어나가는 식이다. 진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에게는 이처럼 전문작가들이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매력과 세계관이 분명 존재한다. '노랫말'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음악가들에게 울리는 일련의 경종이다.
복고를 추구했지만 대놓고 촌스럽지는 않다. 물론 그 밸런스의 모양이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 탓에 세세하게 보면 따로 노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낡았다고 생각할 만한 것들을 가져다 고급스럽게 살리는 동시에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삶의 발견을 통한 공감대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바로 우리들이 알면서도 몰랐던 것들의 재발견이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다가 끝낸 후 '나 좀 멋있지'하며 씩 웃는 슈트 입은 신사, 이것이 위트와 품위를 동시에 지킨 신치림의 정체이다.
글 / 황선업 (sunup.and.down1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