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미우미우 하이힐 있는 여자야
잠시나마 사랑했던 나의 미우미우…
집이야 다 쓰러져가는 협동주택에 살건 말건, 노인들이 눈이 오면 다칠까봐 밖에 나다니지도 않는, 봅슬레이를 해도 될 만한 아찔한경사로의 산동네에 살건 말건 사서 한 번 신어보지도 못한 미우미우 하이힐을 갖고 있다는 건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여자들이 보통 직장 생활 2~3년차 정도가 되면 루이비통 스피디백 하나씩은 산다고 한다. 남자들은 차를 사는 것 같다. 그 백이 뭐 꼭 그렇게 예쁘다든가 그래서가 아니라 뭐 하나 할부로 질러놔야 직장 다닐 맛도 나고 직장에 억지로 좀 매어두는 고삐 같은 의미도 있고 뭐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내 경우에는 술 마시다가 잃어버릴 염려가 있는 고가품은 절대로 사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럴 여유도 없었다. 천팔백만원도 안 되는 알량한 연봉을 받으면서 루이비통이라니, 루이비통 매장에 사는 바퀴벌레가 웃을 일이었다.
나의 입을 것을 해결해준 것은 수년 동안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였고, 그나마 기분 좀 낼 때면 동대문 도매상가에 가는 정도였다. 그러니 브랜드 제품이라고는 온 옷장을 들었다 털어도 없고 그나마 옛날 남자친구가 뭐라나 하는 크리스털 브랜드 귀걸이를 선물한 적이 있는데 정말 거지같이 헤어지고 난 다음, 야 이 망할 자식아 평생 그러고 폼 재고 살아라, 하면서 랜디 존슨 같은 기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어딘가 타지 않는 쓰레기 노릇이나 잘 하고 있겠지, 어쨌거나.
바로 그때가, 문제의 미우미우 하이힐이 내 손에 들어온 때였다. 명품을 구입한 가격보다 훨씬 싸게 파는 블로거 분이 계셔서 그 사이트에 간혹 들어가서 눈요기만 하곤 했었다. 아무리 싸게 팔아도 명품은 명품이니만큼 최소 몇 십만원 대였기 때문에 눈물의 떨이라고 해도 그림의 떡이고 그냥 모니터가 뚫어져라 구경만 했다. 명품이란 게 이렇게 생겼구나 흐음 그렇군, 하고 신기한 마음뿐이었는데 어느 날 딱 십만원짜리 상품이 나온 거였다. 프라다의 세컨드 브랜드인 미우미우의 심플한 검정색 샌들이었는데, 사이즈도 맞았고 가격도 그만하면 이름값 낼만 하고, 그냥 술 네 번 덜 먹으면 되지, 하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당장 입금하고 물건을 받았다.
두근두근 기대에 차서 받아보니 사실 그 샌들은 내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최소 오십만원은 줘야 하는 크리스찬 루부탱 같은 건 10센티 굽이라도 편하다는데 정말일까. 아마 평생 알 일 없겠지. 지금 당장 내 손 안에 있는 미우미우 하이힐 앞에서 편하고 말고 따위는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민망한 고백이지만 그게 나에게 어울리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 갖고 싶었던 이유는, 그 구두 한 켤레가 그렇게 소중했던 이유는, “나 이래봬도 집에 가면 미우미우 하이힐 하나 있다” 뭐 이런 게 중요했던 것이다.
집이야 다 쓰러져가는 협동주택에 살건 말건, 노인들이 눈이 오면 다칠까봐 밖에 나다니지도 않는, 봅슬레이를 해도 될 만한 아찔한경사로의 산동네에 살건 말건 사서 한 번 신어보지도 못한 미우미우 하이힐을 갖고 있다는 건 이상하게 힘이 되었다. 자본주의가 어쩌고저쩌고 욕하다가도 이럴 때면 어디 숨어버리거나 창피해서 콱 죽어버리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c’est tout(쎄뚜), 그게 다였다. 김밥천국에서 끼니를 때우건 말건, 썩은 고기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슈퍼 식품 코너의 유통기한 지나서 싸게 파는 음식을 노리고 있건 말건 나 미우미우 하이힐 있는 여자야, 하는 쓸데없이 으쓱한 기분은, 그 처량한 허영심은, 오늘도 과장한테 깨지는 하루를,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귀찮아 죽을 것 같은 지루한 회사 회식에서 숙련된 솜씨로 삼겹살을 자르는 365일 중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불가사의한 위안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뭐 그런 걸 다시 가질 기회도 없을 게 뻔했기 때문에, 신을 일이 있건 없건 나한테 안 어울리건 말건 나는 죽을 때까지 그 까만 구두를 안 놓을 예정이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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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안녕』은 이제 막 서른 이후의 삶에 접어든 저자가 써내려간 ‘서울살이’의 회고록이자 비망록이다. 여기에는 저자의 개인적 삶이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리얼하게 담겨 있지만,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소외된 거리와 시대의 풍경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철거촌과 비개발지역, 서울의 소외된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온 삶은 비속하고 하찮고 시시하고 애절한 기억들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정겹고 그립고 끝도 없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 기억의 순간을 새겨놓은 곳들이 재개발의 삽질에 밀려 죄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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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스스로를 도시빈민이라 부르는 그녀는 대구 출생에 목회자인 부친의 모든 희망에 어긋나게 성장하였고 기어코 말 안 듣다가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퇴학에 준하는 자퇴를 감행하였다.
냉소와 분노와 우울을 블랙 유머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을 몸 속에 장착한 그녀가 숨 막히는 고등학교를 용감히 박차고 나온 '불량소녀'로 세상에 알려진 지 이제 10년이 넘어간다. 그녀는 단편영화 <셧 앤 시 Shut And See>(97년) 감독, 웹진 <네가넷>(97년)의 최연소편집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최연소 합격 등의 화려한 타이틀을 가졌다. 그래서 한 시사주간지는 성공한 10대라는 제목으로 그를 표지인물로 내세웠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자퇴생이라는 사실이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텔레비전의 관심도 남달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직시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꾸준히 살아왔다.
<김현진> 저11,700원(10% + 5%)
김현진은 88만원세대를 대표하는 글쟁이다. 사회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생각을 그녀처럼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에세이스트는 흔치 않다. 처음 세상에 내놓은 책 『네 멋대로 해라』 이후 12년여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쓰고, 「한겨레」 「시사IN」 「프레시안」 「경향신문」 등의 매체에 꾸준히 기고해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