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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성들 힘내자. 파이팅!”

봉동읍은 생강이 유명하고 카페 이름은 보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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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봉동읍으로 가기 전날 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다시 꺼냈다. 책날개 사진 속의 하루키는 여전했다. 팽팽한 얼굴에 후드티를 걸치고 있었다.

완주 봉동읍으로 가기 전날 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다시 꺼냈다. 책날개 사진 속의 하루키는 여전했다. 팽팽한 얼굴에 후드티를 걸치고 있었다. 하루키처럼 말한다면 ‘벽화를 그리는 작업은 우선 길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감성이 아니라 줄자다.’ 줄자를 얼마나 뽑느냐에 따라 벽화는 달라진다. 줄자를 끝까지 뽑아야 할 만큼 벽이 길다면 준비물은 간단하다. 검은색 페인트 마커 한 통이면 충분하다. 길이가 짧아질수록 준비할 게 더 많아진다. 한눈에 벽이 들어올수록 세부적인 묘사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봉동읍은 생강이 유명하고 카페 이름은 보물섬이고

친해질수록 거리는 가까워진다. 익숙해질수록 작은 것들이 보인다. 구산동에서는 전봇대에 붙어 있는 아르바이트 벽보까지 훑어본다. 하지만 해왕성이라면 기껏해야 몇만 킬로미터 밖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이 전부다. 완주도 그랬다. 처음 완주군에 찾아갈 때만 해도 내비게이션에 ‘완주군청’을 찍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완주군청은 전주시에 있었다. 상관면과 소양면 작은도서관에 벽화를 그린 뒤로 완주를 자주 찾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완주에 갈 때면 내비게이션 목적지에 읍 이름을 넣었다. 이번에는 봉동읍이었다.

완주 도서관장이 벽화 그릴 곳을 사진으로 찍어 메일로 보냈다. 봉동읍사무소 1층에 문을 연 북카페였다. 그림 그릴 곳의 크기는 가로, 세로 3미터 정도로 얇은 나무판을 덧대어 마감했다. 다양한 크기의 붓을 고르고 아크릴 물감도 챙기고 오일 파스텔과 코팅제도 넣었다.

오일 파스텔로 그린 뒤 코팅제를 뿌려주면 묻어나지 않는다.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니 금세 한 상자가 가득 찼다.

‘봉동읍은 생강이 유명하고, 북카페는 읍사무소에 있고, 카페 이름은 보물섬이고.’

묘한 조합이었다. 이번에는 봉동읍에 사는 이주 여성들과 함께 그리기로 했다. 카페 보물섬은 이주 여성들이 운영하는 헌책 나눔 공간이었다. 읍사무소 근처에는 서점이나 도서관이 없다. 학부형들이 마땅히 쉴 공간도 없다. 그래서 군청이 지원하여 읍사무소에 북카페를 열게 되었다.

이주 여성들이 카페를 운영하고 헌책을 팔아 스스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메일로 받은 카페 보물섬 계획안은 그랬다. 하지만 이주 여성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얻거나 예산을 쓰기 위해서 만든 곳은 아닌지 못내 의심스러웠다.

카페란 혼자 있고 싶지만 자신을 이해해줄 동지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다. 그저 카페라테나 갈아 만든 토마토주스를 판다고 해서 다 카페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여기까지 와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가족이요? 네, 좋습니다

재능기부라면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웃으면서 밥 퍼주는 일처럼 여긴다. 그래서 가끔 너무 쉽게 일을 맡기려고 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재능기부라고 무턱대고 돈 안 받고 그림 그려주는 게 아니다. 결제는 안 해줘도 괜찮다. 하지만 내 그림과 작업 방식은 인정해주길 바란다. 돈도 못 받고, 인정도 받지 못한다면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재능기부를 원하면서 내일까지 그려달라거나 일단 스케치부터 보자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이가 없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 웬만하면 참여해주세요”라고 메일 한 통 덜렁 보내면 답장 쓸 마음도 안 생긴다. 엔터키만 누른다고 없던 그림이 인쇄되어 나오는 게 아니다. 1000만 원짜리 기업 프로젝트나 어린이재단에 하는 재능기부나 그림 그리는 방식과 들어가는 수고로 치자면 똑같다.

차로 세 시간을 달려 봉동읍에 도착했다. ‘보물섬’을 둘러보았다. 스무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한쪽에는 주방과 계산대 그리고 테이블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맞은편은 신발을 벗고 앉는 공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손님을 위해서였다. 나머지 벽은 책장이었다. 책이 꽤 많이 꽂혀 있고 얇은 나무를 덧댄 벽에는 접착 시트를 오려 만든 세계지도가 붙어 있었다.

함께 작업할 이주 여성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 명 정도였는데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에서 왔다. 30대 아주머니들일 거라 짐작했는데 모두 스무 살 안팎에 불과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는 대부분 이 나이에 결혼한다고 했다. 반짝이는 머리띠와 귀고리에, 공주 거울도 꺼내 보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깔깔깔 넘어갔다. 영락없는 20대 여성이었다.

첫날에는 나무 벽면 양옆에다 나 혼자 그림을 그렸다. 카푸치노 친구부터 얼음 가득 탄산음료 오빠, 화분, 탄산수 병, 주전자 누나, 로봇, 왕자님까지. 카페에 어울릴 만한 친구들을 그렸다. 나폴리 황색과 분홍에 가까운 부드러운 마젠타 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둘째 날에는 아침 10시부터 그렸다. 이주 여성들은 일찍 모여 아침부터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며 웃었다. 거울도 잊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 전에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가족이요.”

서툰 우리말이었지만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네, 좋습니다. 엄마, 아빠, 언니, 오빠 얼굴 마음껏 그려보자며 페인트 펜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릴지 몰라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한 친구가 오빠 얼굴을 그리자 우르르 몰려와 거침없이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도 그리고 앞으로 낳게 될 딸의 얼굴도 그렸다. 완주군수도 펜을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의 얼굴과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그렸다. 어머니가 참 고왔는데 그림 실력이 모자라다며 무척 아쉬워했다. 두 시간 정도 그리고 나서 기념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었다.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누군가를 위해 시작한 작은 일이 세계를 행복하게 한다

가끔 그림을 잘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본다. 그럴 때는 먼저 그림이란 게 무엇인지 되묻고 싶어진다. ‘그림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말이다. 그림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림을 보면 작가가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나리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도 엿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건 거울을 만드는 일이다. 그림은 제 모습을 비출 뿐 아니라 마음까지 비춰준다. 마음이 보여야 그림이다. 그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인다면 잘 그린 그림이다. 필리핀에서 온 여성이 보물섬 벽에다 엄마 얼굴을 그렸다. 잘 그렸다.


그림으로 먹고사는 기술자가 살짝 거들었다. 아크릴 물감으로 초록 구름과 마젠타 하트를 그리고 가벼운 마린블루로 동글동글한 점을 그려 넣었다. 여러 친구들이 그린 그림이 서로 잘 어울리도록 색깔과 짜임새를 더했다. 베트남에서 온 여성이 까치발을 하면서 그림 꼭대기에 우리말로 또박또박 글자를 새겼다.

“우리 여성들 힘내. 파이팅!”
“옵빠 보고 싶어요.”


난 빨간 크레파스로 글자 주위에 하트 모양을 수십 번 돌렸다. 하트가 짙어질수록 보고 싶다는 마음도 간절해졌다. 그림을 마무리하고 오른쪽 아래에 제목을 붙였다. 나도 필리핀에서 온 여성처럼 검은 크레파스를 들고 우리말로 또박또박 적었다.


<그리움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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