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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에서 “여기가 평양이니 내려라”

김포공항선 인공기 휘날리고, 다방에선 카빈총이 불을 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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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다. 거 참 괴이하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이 사건의 성격을 무어라 정의하면 적절할까. 고심을 하다가 세 가지 영어단어를 조합해보았다. 블록버스터 새드 코미디(Blockbuster Sad Comedy).

괴이하다. 거 참 괴이하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이 사건의 성격을 무어라 정의하면 적절할까. 고심을 하다가 세 가지 영어단어를 조합해보았다. 블록버스터 새드 코미디(Blockbuster Sad Comedy). 동경-후쿠오카-서울-평양 4개 도시를 거치며 승객 1백 여 명의 목숨을 담보 잡은 ‘하이재킹’(비행기 납치)이었다는 점에서 스케일이 장대한 블록버스터였다. ‘분단국가’라는 특수상황에서 벌어진 위장 촌극이었다는 점에서 ‘슬픈 코미디’이기도 했다.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에 포커스를 두고 다시 정의해본다. 복잡한 조합이지만 다음과 같다. 일본 적군파 인질 비행기 김포공항 경유사건.


피랍 JAL기 김포공항에 착륙
여기는 평양, 안심하고 내려라
“김일성초상화 가져오라”


JAL기가 서자 비행기 문이 열리고 몇 명이 내려서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도로 기내로 사라졌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공수단원들은 북괴군을 가장, 비행기에 접근했다.
조종사석 쪽 문을 연 납치범에게 “평양이니 내리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납치범들은 “평양같지 않고 서울인 것 같다”면서 내리기를 거부 평양이란 걸 증명할 때까지 내리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북괴군을 가장한 공수단원등 6명은 기체로 다가가 조종사석쪽문을 열고 납치범들에게 비행기에서 내리도록 종용했다.
공수단원=평양이다. 환영한다. 모두 내려라.
납치범=평양 같지 않다. 김일성의 초상화는 왜 없느냐
공수단원=우리도 많이 발전했다.
납치범=비행기는 왜 이렇게 많으냐. 평양시가도나 김일성초상화를 가져오라.
공수단원=우리나라도 국제선이 많이 날아온다.
납치범=어쨌든 평양이란 증명을 할 수 있는 물건을 가져오라. 그때까지 내리지 않겠다.
하오3시30분께 JAL김포사무소차장 ‘야마모도’가 납치된 비행기에 접근 “나는 아사히신문 평양특파원인데 수고 많았다” “곧 버스가 도착할 테니 내려라”고 말을 건넸다.
납치범들은 창문에 머리를 내보이며 “북괴깃발과 김일성초상화를 갖고 와라”고 요구, 비행기문을 열지 않았다.
이 동안 납치비행기 주위엔 ‘범퍼’ ‘넘버’등을 지운 지프, 버스 등 7,8대의 헌차들이 돌면서 급히 만든 북괴깃발을 흔들었다.
(1970년4월1일치 신문)

김포공항은 ‘김포공항이 아닌 것처럼’ 행세했다. 승객을 구출하려는 선의의 ‘꼼수’였다. “여기는 평양”이라며 납치범들에게 빨리 내리라고 종용했다. 평양인 척 하기 위해 공항에 ‘평양 도착 환영’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북한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돌아다니게 했다. 북한 깃발(인공기)을 흔드는 차들을 운행시켰다.

납치범15명 공수단원과 대치

승객 못 내린 채 평양위장유도…눈치챈 듯
31일 상오 일본항공의 ‘보잉727’기(기장 石田眞二)가 동경(東京)-복강(福岡, 후쿠오카-필자 주)비행중 일본좌파학생들에게 피랍, 북한으로 향하다 기수를 돌려 이날 하오 3시13분 납치범을 포함한 승객 1백8명과 승무원 7명을 태운 채 김포공항에 내렸다.

어제 하오3시13분 조종사 기지로 기수돌려

당국은 김포를 북괴비행장으로 위장, 승객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납치범들은 이에 불응, 위장전술을 눈치 챈 것 같아 하오7시까지 긴장 속에 대치를 계속하고 있다.

폭파위협에 ‘연료없다’ 복강(福岡)에 불시착.
백38명중 부녀자23명 내리고 다시 이륙


동기(同機)는 상오7시10분 동경 우전공항(하네다 공항-필자 주)을 떠나 비행 중 名古屋(나고야)상공에서 승객중의 적군파학생 15명으로부터 비행기를 폭파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피랍, 평양을 향하도록 강요당했으나 기름이 모자란다는 핑계로 8시55분 복강(福岡)에 일단 착륙, 기름을 보급 받고 하오2시9분 평양을 향해 떠났다.
일본당국은 전투기와 경찰 7백여 명을 동원했으나 비행기 폭파위협 때문에 5시간 14분 동안 손을 못 썼고 납치범들을 설득하여 승객 1백31명중 노약자와 어린이등 23명만을 내리게 하는데 성공했다.
복강 ‘이다쓰께’ 비행장을 떠난 동기(同機)는 처음 동북으로 방향을 잡아 우리나라 강릉 동쪽20마일 동해해상까지 비행, 여기서 서북방으로 선회하여 2시45분 철원북방에서 휴전선을 넘었으나 곧 기수를 김포로 돌렸다.
(1970년4월4일치 신문)

오늘은 인질극에 관해 쓴다. 1969~72년 국내외 관련 사건들을 추려보았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7권과 8권을 세 번째로 꺼내는 셈이다.

세계정세는 극도로 험악했다. 베트남전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미국은 그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다. 세계의 좌파들은 곳곳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으려 기회를 엿보았다. 국내에서는 박정희의 종신집권 프로그램이라는 ‘큰 독재’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공장과 학교 등 생활공간 구석구석에선 ‘작은 독재’가 시스템으로 뿌리박혔다. 사람들은 웅크린 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의 폭탄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7권부터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질사건은 그러한 국내외 정세를 반영한다. 위의 케이스는 그 중에서 가장 핵폭탄급이다.

일본에서는 짧게 줄여 ‘요도(Yodo)호 사건’이라 부른다. 적군파 요원들에게 납치된 일본항공(JAL) 351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북한에 아직까지 ‘납치국가’라는 오명을 씌우고 있다. JAL351기는 1970년3월31일 오전 7시10분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해 후쿠오카 이타즈케 공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적군파 요원들은 나고야 상공에서 기장에게 평양으로 가라고 했지만, 국내선이라 기름을 주유한 뒤 가야 한다는 이유로 후쿠오카 공항에 기착한다. 여기서 일본당국은 납치범들 제압에 실패한다. 비행기는 다시 평양으로 가는 척하다 기장이 머리를 써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평양이라고 속였지만, 상황을 눈치 챈 적군파 요원들은 내리지 않았다.

납치 계획은 성공했다. 협상 끝에 적군파 요원들은 탑승객 전원을 김포공항에서 풀어줬다.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삼아 김포공항 착륙 71시간 만에 북한으로 떠났다. 납치범들은 4월3일 평양에 도착해 북한당국에 망명을 요청하고 눌러앉았다. 요도호 기체와 기장, 인질로 잡혔던 운수성 정무차관은 4월4일 귀환했다. 북한은 일본의 납치범 인도 요구를 거절했다. 납치범 9명중 4명은 지금도 북한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일본 최초의 항공기 공중납치사건이다.


당시 남한 당국은 요도호의 북한행을 두고볼 수만 없었다. 세 달 전의 뼈아픈 기억 때문이었다. 1969년12월11일, 강릉발 서울행 대한항공(KAL) YS11A기가 승객을 가장한 간첩들에게 납치되어 원산비행장에 착륙했다. 승무원4명과 승객 47명이 납북됐다. 평양방송은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고 주장했고, 남한 경찰도 일부 인정했다. 아버지의 스크랩에 있는 1969년12월16일치 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최두열 치안국장은 KAL기 납북사건의 주범은 고정간첩 채헌덕(49?강릉시 성남동205의32?자혜병원장)이며 채에게 포섭된 조창희(42)와 납북 KAL기의 부조종사 최석만(37?서울 영등포구방화동583의21)이 행동대원으로 가담, 범행은 이들 3명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대한항공 측은 “최석만이 간첩행위를 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면서 “경찰의 발표는 단순한 추정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는 1958년2월16일 부산-서울간 대한민항공사(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 납북 이후 남북간 두 번째 비행기 납치사건이었다. 북한은 1970년2월14일 KAL기 기체와 탑승자 51명 중 승무원 4명(기장2명, 여성 승무원 2명)과 승객 8명 등 12명을 제외한 39명만을 귀환시켰다. 북한에 남은 승무원과 승객의 남측 가족들은 ‘납북 KAL 미귀환자 가족회’를 만들어 송환촉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 1년에 한 번 꼴이었다. 69년12월 KAL기 납북사건과 70년3월 JAL기 김포공항 경유 납북사건에 이어 1971년에도 KAL기를 납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71년1월23일 낮1시7분 승객55명과 승무원5명을 태우고 속초에서 김포로 가던 KAL F27기에서 벌어진 활극이다. 이륙 반시간 만에 괴한 1명이 수류탄을 들고 스튜어디스들을 위협, 월북을 강요했다. 이럴 땐 언제나 기장이 기지를 발휘한다.^^ 교신을 통해 공군기 2대의 엄호와 유도를 받아 낮 2시20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해안 모래밭에 불시착. 범인은 착륙 뒤 3분 만에 갖고 있던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승객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 11명은 경상을 입었다. 기체도 파손되었다. 아버지의 스크랩엔 수사 상황만 나온다.


뇌관은 친구 집서 얻어

【속초=이성준?윤창형 기자】KAL기 납북미수사건에 대해 현지수사반은 25일 범인 김상태 집 사랑방에 세든 정재식 군(20)이 김에게 폭발물제조법을 가르쳐주는 것을 보았다는 정군의 어머니 심순덕씨(56)와 김의 가족들의 진술을 듣고 정군을 공범 용의자로 전국에 수배했다. 68년 문산고등공민학교를 졸업한 정군은 작년12월말 김의 방에서 이번 범행에 사용된 것과 같은 깡통과 대나무통에 선박시동용 화약을 넣은 뒤 밀폐하여 만드는 폭발물 제조법을 그림을 그리며 가르쳤다고 한다.
(1971년1월26일치 <한국일보>)

당시는 하이재킹의 전성시대였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69년 한 해만도 82건이 발생했다. 1968~82년에 총 684건이 벌어져 평균 8일에 한 건씩이었다. 1968~73년은 그 중에서도 절정의 기간이었다. 하이재킹의 중심엔 적군파가 있었다.

적군파란 한마디로 세계혁명을 꿈꾼 좌파 군사조직이다. 일본 적군파와 서독 (1990년 동독과 통합하기 전 서쪽 독일) 적군파가 가장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두 조직의 수장은 모두 여자다.(일본은 시게노부 후사코, 서독은 울리케 마인호프. 서독 적군파 이야기는 <바더 마인호프>(2009)라는 독일영화를 참고하시라) 공항과 대사관 등 공공기관을 습격하거나 여객기를 납치하고 유명인사를 살해했다. 서독 적군파의 하이재킹으로는 1977년 10월13일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사건을 들 만하다. 다치거나 죽지 않고 평양에 날아간 70년 JAL기 납치사건과는 달리, 서독 적군파 범인 4명은 특공대에 의해 소말리아 모가디시오 공항에서 전원 사살당했다.

일본, 서독과 더불어 두 개의 적군파를 추가해본다. 북한은 국가 자체가 적군파였다. 그들의 항공기 납치는 위에서 본 대로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거점을 둔 ‘아랍 적군파’도 있다. 아버지의 스크랩엔 그들이 일으킨 1972년 뮌헨 올림픽 인질극도 나온다. 1972년9월6일 아침 복면을 쓴 ‘검은 9월단’ 소속 게릴라 9명이 선수촌에 잠입해 이스라엘 올림픽 팀을 인질로 잡고 팔레스타인 양심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게릴라들은 인질들을 데리고 뮌헨 교회 퓌어슈텐펠트브루크 공군비행장에서 헬리콥터로 탈출하려다 서독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스라엘 선수단 9명(다른 2명은 선수촌에서 사망)이 이 과정에서 살해됐다. 게릴라들도 4명은 사살되고 1명은 자폭했으며 3명은 생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검은 9월단’ 간부들에 대한 암살 작전에 들어간다.


이제 국내로 눈을 돌려보자. 이념이나 국제분쟁에 관계없이 인질을 잡고 세상을 총으로 위협한 ‘작은 적군파’들이다. 블록버스터급 하이재킹에 비해서는 찌질(?)해 보이지만, 나름 세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스토리도 있다.


무장군경과 대치 35시간만에
M1든 탈영병 피체(被逮)
-외딴집서 나와 다방에 들어갔다가


【진주=백학준?곽상구 기자】진주시 장재동 ‘새밋골’에서 애인을 인질로 가둬놓고 발사위협을 했던 무장탈영병 이판이(李判伊 일병(23)은 군경과 대치한지 35시간만인 19일 하오 6시 애인과 함께 민가를 빠져나와 진주시 계동 성림다방에 들어간 것을 헌병대가 체포했다.
한때 진주 시내를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었던 이 일병은 체포되어 39사단헌병대에 연행되기까지 갖가지 위협과 3발의 총까지 쏘았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체포직후 이 일병은 “약혼까지 한 사이인 애인 김숙자양의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한데 초조 한데다가 애인과 함께 조용히 하룻밤을 지내려고 한 고종사촌형 집에 갑자기 무장군경들이 달려들어 반사적으로 위협을 느껴 대항한 것뿐, 처음부터 이런 일을 저지르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주시에서 6km떨어진 ‘새밋골’ 고종사촌형 서도수씨(31)집 문간방에서 무장군경과 대치하던 이 일병이 집 밖으로 나온 것은 19일 하오4시47분. 때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이 일병은 서씨와 어머니 김귀순씨의 끈질긴 자수권고를 받고 약혼녀 김씨를 앞세우고 집을 나왔다.
이때 이 일병은 진한 옥색 ‘투피스’차림의 약혼녀보다 3m쯤 떨어져 총을 앞으로 겨눈 채 서씨 집 앞 논두렁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굴이 몹시 상기된 채 비를 맞으며 15m쯤 나온 이 일병은…(기사잘림)
(1970년8월20일치 <중앙일보>)

스트레이트 기사는 여기서 끝났다. 아버지가 <중앙일보>기사를 스크랩 하다 잘라먹었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기 위해 인터넷에서 <동아일보>기사를 참고해보았다. 이판이 일병은 육군제2사관학교 사격훈련기간병이었다. M1한발과 실탄 64발을 사격장에서 훔쳤는데, 이 일병이 워낙 사격술이 뛰어나 군경이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이 일병은 사건이 일어난 해 봄에 결혼하려 했으나 양가 부모가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이 일병은 인질극 현장에서 애인 김양에게 “형기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변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요구도 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 일병은 김양을 비봉산 기슭으로 끌고 다녔으며 따라오는 헌병대와 경찰을 향해 “김양과 자주 만났던 성림다방에서 차 한 잔 마시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성림다방에서 차를 시키기도 전에 그는 무기력하게 체포된다. <중앙일보> 해설기사는 그를 ‘카르멘’에 견준다.

진주의 탈영병 사건은 현대판 ‘카르멘’을 연상하게 만든다.
불 작가(佛 作家)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엔 ‘돈?호세’라는 기병하사가 등장한다. 이 청년은 ‘세빌리이’의 한 연초공장에서 경비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 ‘카르멘’이라는 ‘집시’ 여자에게 매혹되어 탈영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카르멘’이 한 밀수입자를 숨겨준 것에 질투를 품고 ‘호세’는 그 남자를 죽여버린다. 사랑의 풍랑 끝에 ‘루카스’라는 사내도 등장한다. 그는 ‘카르멘’의 연적이 된다. 투우사인 ‘루카스’는 투우장에서 심한 중상을 입는다. 그 사이에 ‘호세’는 ‘카르멘’을 납치하여 산중으로 도망간다. 하지만 이들의 연사(戀事)는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진주사건은 이것의 개작(改作)이라고나 할까. 이 일병은 약혼녀를 만나지 못해 귀대날짜를 어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탈영병이 되어 애인을 납치한다. 그리고는 산중의 한 초옥(草屋)으로 도망을 간다. 이 일병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무려 35시간을 대치하게 된다. 약혼녀를 만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항거였다.
(1970년8월20일치 <중앙일보>)

사람을 해치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총으로 항거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한 달 뒤인 9월2일엔 강원도 양구에서 인질극이 벌어진다. 역시 인터넷으로 1970년9월4일자 <동아일보>를 찾아보니 ‘피로 물든 심야의 찻집’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양구군 양구면 상리 소라다방에서 박추수(朴秋秀?27)라는 인물이 여종업원 5명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하다 36시간만인 3일 밤 12시경 자기 가슴에 다섯 발의 총탄을 쏘아 자살했다는 내용이다.


양구 인질살인범 朴-
다방구석에 피투성이로
‘돈 있으면 뭘하느냐...’ 낙서도


이날 밤 포위망 속에 갇힌 다방에서 9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먼저 4발이 1분 간격으로 울리고 잠시 쉬었다가 연달아 5발. 그리고는 다시 다방 안은 잠잠해졌다.
그 후 1시간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어 수상히 여긴 경찰은 구영일(具永一) 경사(34)를 다방주방 뒷문으로 잠입시킨 결과 박이 다방 뒤쪽 구석에 피투성이가 되어 왼팔을 바닥에 깐 채 쓰러져 있었다. 가슴에 4발, 허리에 1발의 총알을 맞은 채 였다. 바닥위에 뻗어있는 오른팔에서 50센티 거리에 ‘카빈’이 팽개쳐진 채 그 옆에 나동그라져있는 의자에 흥건히 피가 묻어 있었다.
다방 안에는 박이 그동안 쏜 탄피 12개가 흩어져 있었고 의자, 탁자 등 집기가 어지러웠다. 박이 기자들에게서 얻은 담배2갑중 한 갑은 없었고 나머지 한갑은 담배가 반쯤 남은 채 탁자위에 놓여있었다.

“권태와 실의의 생활서
총보고 순간적 발작”


범행동기-현지 경찰은 3일 범인 박의 범행동기를 “평소 권태롭고 실의에 찬 생활을 해오던 박이 총을 보자 순간적으로 영웅심리가 발동, 평소의 불만을 엉뚱한 방법으로 터뜨린 것” 으로 봤다.
박의 설득작업과 함께 박의 행적?연고자의 진술을 토대로 범행동기를 수사해오던 경찰은 이날 박이 우연히 총을 얻고 총을 얻은 지 1시간 안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 인질로 잡혔던 소라다방 종업원 5명과 박은 전혀 면식이 없었다는 점, 박 자신이 “이유 없는 반항이다. 무조건 난폭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점 등으로 “사전에 계획된 범행이 아니라 순간적인 범행”이라는 심증을 굳힌 것이다.
(1970년9월5일치 신문)

그는 다방 앞에 정차중인 군 지프에서 M2 카빈총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신문들을 찾아보면 한결같이 ‘군 무기관리의 허점’을 성토하고 있다. 인질극 도중엔 현역 경찰 한 명이 박추수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범행동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는 “무조건 반항하고 싶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화통화를 하면서는 “형과 형수를 만나고 싶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신문기사 중에는 “따뜻한 회유작전을 폈더라면 쉽게 끝났을 텐데 경찰이 무리하게 지연작전을 폈다”는 비판도 나온다. ‘순간적 발작’이라는 표현이 애처롭다. 그렇다. 이때의 인질극은 전혀 계획적이지 않았다. 용의주도하지 않았다. 그저 충동이었고 발작이었다.(1973년으로 가면서 순진한 인질극은 계획적인 강도극으로 발전한다) 아버지는 ‘심리전염병의 발작’이라고 했다.

허무의 공(空)

자멸의 웅덩이에서 자화상을 그린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지한 인생
순간도 영원도
삶도 죽음도 없다
초조한 광란의 총구-
그는 사회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인간상실의 좌절
심리전염병의 발작
오- 이는 온 인류의 표본이다

일주일도 안돼, 양구인질범 모방사건이 목포에서 일어난다. 9월9일 스물한 살 젊은이의 수류탄 인질극이었다. 숙모를 볼모로 50여 명의 군경과 대치했다. 진주와 양구사건에 비하면 평화적으로 끝났지만.


목포 숙모인질범 체포-
대치 3시간 만에
수류탄은 모조로 밝혀져

【목포=이상문?김수영?박희서 기자】목포 ‘서울’다방에서 숙모와 조카 등 3명을 인질로 수류탄을 들고 군경과 대치하던 이명진 군(21?해남군 화원면 산호리)은 대치 3시간 반 만인 9일밤 8시50분께 체포됐다.

“진학 못해 비관”

범인 이(李)는 경찰에서 진학을 못해 비관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심한 꾸지람에 살맛을 잃은 데다 양구인질사건을 듣고 일을 저질렀다고 범행동기를 털어놨다.
체포된 뒤 이(李)가 가진 수류탄은 연습용 모의탄임이 밝혀졌다. 이(李)는 이날 아침 숙부인 210전경대 이병진 순경(26) 집에서 자폭하는데 쓰려고 이 수류탄을 훔쳐냈으며 체포될 때까지도 모의탄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李)는 8일 상오 아버지 이한배씨(42)로부터 일은 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는 꾸지람을 듣고 다음날 목포로 나와 산정동 숙부집을 찾았다.

수류탄은 숙부집서

숙부집 쌀뒤주 위에 있던 수류탄3개를 보자 자폭하고 싶은 충동에 3개를 훔친 뒤 근처 시장에서 빵, 감, ‘박카스’, 담배 등을 샀으며 동생하숙에서 ‘트랜지스터?라디오’도 가지고 나왔다. 수업중인 우진 군(15.목포 문태중2)에겐 급히 할 말이 있다고 꾀어 다방으로 함께 갔다. 이때가 하오 3시15분께. 이(李)는 ‘코피’를 마시면서 양구사건이 실린 모 주간지를 읽었다.

전화로 숙모 불러

4시께 전화로 오뚜기만화점의 숙모 김영심씨(25)를 다방으로 나오게 했다.
4시 반께 조카 은경 양을 업고 숙모 김씨가 나타나자 세상이 싫어 못 살겠다며 가정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숙모와 다퉜다.
김씨가 계속 귀가를 종용하자 5시15분 이(李)는 양구사건이 실린 주간지로 탁자를 치면서 “나도 이놈같이 한바탕 해치우겠다”며 가방에서 수류탄 2개를 꺼내 “안 나가면 터뜨리겠다”고 위협 다방 종업원과 손님 8명을 몰아냈다.

문걸고 바리케이드

이(李)는 주방으로 통하는 뒷문을 못질하는 등 모든 문을 닫았다.
의자등 집기를 출입문 앞에 쌓아 ‘바리케이드’도 쳤다.
5시40분 군경이 출동, 송무강 목포경찰서장과 숙부 이 순경이 전화로 자수를 권고했으나 이(李)는 “괴롭히지 말라. 세상이 살기 싫을 뿐이다”고 답했다.
6시 ‘라디오목포’를 불러 ‘심야의 블루스’를 신청하기도 했다.

경관6명이 덮쳐

8시 넘어 경찰은 계속 전화를 걸어 이(李)의 정신을 전화에 쏟게 하곤 경찰관 6명이 앞뒷문으로 접근, 8시50분 일제히 다방에 뛰어들어 뒤에서 이(李)를 덮쳤다.
이(李)는 체포되자 발악하다 넋을 잃고 쓰러졌으며 김씨는 남편 이순경이 “창피해서 살겠느냐.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하자 까무러쳐 인근 인동욋과에 입원했다.
(1970년9월10일치 신문)

1988년10월16일, 교도소 이감 도중 탈주해 서울 북가좌동에서 인질극을 벌였던 지강헌 일당의 ‘즉석 노래신청’은 유명한 에피소드다. 경찰에게 비지스의 <할리데이>를 틀어달라고 요구했다.(한데 경찰은 스콜 피온스의 <할리데이>를 틀어주었다) 그보다 17년 전 목포의 인질범 이명진도 인질극 현장에서 목포 라디오방송국을 연결해 노래를 신청했다. <심야의 블루스>였다. 이 노래는 1960년10월 개봉된 <심야의 부르스>의 주제가로 주연배우 중 한 명이었던 문정숙(남자배우는 김진규 최무룡)이 직접 불렀다. 가사를 찾아보니 이렇다. “사랑이 그리운 그 이름이여 나를 울게 하고 가버린 그대여/ 사랑아 애달픈 그 이름이여 나를 다시 웃게 하여 주려나// 이 가슴에 맴도는 설움 뉘라서 알리오 나누리오/ 외로운 이 밤을 홀로 지새는 슬픈 나의 노래 심야의 블루스.”

이명진은 평소 주벽이 심한 아버지의 학대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던 중 평소 허물없이 지내던 숙모에게 사연을 털어놓고 수류탄으로 자폭하려 했다는 사연이다. 한데 왜 <심야의 블루스>를 시켰을까. 온갖 상상력을 발동시켜 보려다 참는다. 아버지는 ‘유행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행병

병들고 시들은 물고기
뜨거운 태양이 물감을 빤다
여자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방
젊은 냄새가 무대 위에서 화장을 한다
제기랄 것 ---------------------------
관중이 없다

진주, 양구, 목포 찍고 이번엔 1년 후 서울이다. 연령도 20대에서 10대로 대폭 낮아졌다. 서울에 처음 올라온 ‘겁대가리 없는 열여섯 살 소년’들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우등생이었다는데 왜 이토록 난폭해졌을까. 다방 안에서 실탄 100여발을 난사하고 2명을 쏴 죽였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10대2명 다방점거 카빈 난사
경관 등 2명 피살-4명 총상
광란 3시간 전화 받는 새 인질손님이 덮쳐 잡아


17일 밤 10시 40분께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가2 한일은행 영등포지점 옆 제일라사2층 대호다방(주인 朴東根?42)에서 훔친 ‘카빈’을 든 김진호(金鎭昊)군(16?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운학리)과 친구인 박상준(朴相俊)군(16?同)이 1백여 발의 실탄을 난사하여 다방주인 등을 인질로 다방을 강점, 출동한 영등포경찰서 중앙파출소 소속 정윤종(鄭允鍾)순경(41)과 행인 김봉주(金奉周)씨(30?영등포구 신광동188) 등 2명을 쏴죽이고 행인 한병호(韓炳鎬)씨(34?영등포구 봉천동101) 등 4명에게 총상을 입히는 등 광태를 부렸다. 이들 두 소년은 다방 안과 길거리에 멋대로 ‘카빈’을 난사했으며 광란 3시간만인 18일 새벽 1시45분 다방에 걸려온 전화를 받다가 인질로 잡혀있던 세 시민에 의해 격투 끝에 잡혔다. 이 사건으로 한밤중 영등포 일대는 시가전을 연상케 할 만큼 긴장과 공포에 싸였고 구경나온 주민 수 천 명이 몰려 부산했다.

무기

범인들은 ‘카빈’ 2자루와 실탄 4백48발을 지난 16일 밤 11시께 범인들의 고향인 영월군 수주면 운학리 3반 예비군 무기고에서 훔쳤다. 이날 밤 이들은 동네 동쪽 산 밑에 있는 무기고에 침입했는데 이때 경비하던 예비군 2명이 숙직 방에서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김군은 10센티 가량의 대못을 두들겨 만든 쇠꼬챙이로 자물통을 열었다.
김군은 무기와 탄창 28개를 가지고 한동네 사는 친구 김모군(16) 집에 가서 30분 동안 박군에게 탄창 끼는 법, 총기사용법을 가르쳐 줬다.
17일 새벽 4시30분께 김군과 박군은 각기 훔친 ‘카빈’ 한자루씩과 탄대 2개씩을 나눠 옷속 어깨에다 메고 서울을 향하던 중 동네 어귀서 10리쯤 떨어진 (기사해독 불가) -턱서 어깨가 아파 총탄 절반을 버리고 탄대 하나씩만 가졌다.
이들은 횡성군 안흥면서 버스를 타고 원주까지 와 가진 돈 6백원 중 3백40원밖에 남지 않자 박군의 시계를 4백원에 팔아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횡성-원주까지의 버스검문소에서는 이들이 검은 보자기에 총을 쌌으나 이를 검문.검색하지 않았으며 원주-청량리간 열차 속에서도 공안원에게 검색 당한 적이 없었다.
범인 중 김군은 주머니에 50원밖에 없다고 박군에게 “찻값을 내라” 말하고는 ‘카빈’이 든 보따리를 들고 다방을 나와 2층 입구서 기다렸다. 5분쯤 기다리다 다방으로 다시 들어간 김군은 “찻값도 없냐”고 신경질을 부리며 중구 충무로2가 52의6 백향사 세탁소에 종업원으로 있는 조카 김모양(15)에게 전화, “돈 좀 갖고 나오라”고 했으나 “어딘지 모르겠다”는 대답만 듣고 전화를 끊고 다시 다방에 주저앉았다.
맥이 빠진 듯 5분쯤 앉아있던 김군은 검은 보자기를 풀어 장전된 ‘카빈’을 꺼내 2,3분 주물럭거리더니 느닷없이 천장을 향해 2발을 발사했다. 이때가 10시40분께.
또다시 2발을 창문을 향해 쏜 김군은 “남자들만 나가라”고 하더니 “모두 서라”고 외쳤다.
이때 주인 박씨와 손님 4,5명은 뛰쳐나왔지만 4명의 손님과 박씨의 처 김귀숙씨(37)등 박씨 일가 7명, 여종업원 2명 등 13명은 빠져 나오지 못했다.

범행

김군이 보자기를 풀고 총을 꺼내는 것을 발견한 주인 박씨는 밤10시36분 “총을 가진 거동수상자가 나타났다”고 112에 신고했다. 죽은 정 순경이 2명의 예비군과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신고 4분후인 10시40분께로 범인이 첫 공포를 쏜 바로 뒤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순경이 헐레벌떡 다방 문을 여는 순간 다방손님과 종업원들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있던 김군과 눈이 마주쳤다. 김군은 그대로 한발을 발사, 정순경이 비틀거리며 계단 밑으로 구르자 뒤쫓아가 내리 2발을 쐈다. 다시 5.6발을 계단 창문에 발사한 김군은 떨고 있는 박군에게 “순경만 나타나면 무조건 쏴죽이라”고 했다.

가난한 화전민의 아들...국교 6년 우등
“처음 마셔본 냉커피 10원 정도인 줄”


(배경) 경찰이 조사한 김군과 박군의 환경은 모두 화전을 부치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
김군은 4남매 중 막내로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에서 국민학교를 졸업, 4년 전 1백여 호가 모여 사는 운학리로 이사왔다. 화전은 2만평을 경작하는데 팥2가마 콩16가마 옥수수20섬을 거두는 가난한 집안. 맏형이 2년 전 첩을 얻어 집을 나가자 형수마저 1남 2녀를 버리고 뛰쳐나갔다.
생활이 쪼들릴수록 불화가 계속될수록 아버지의 화풀이는 김군에게만 쏠렸다. 툭하면 “모두 나가서 죽으라”고 욕지거리뿐이었다.
더군다나 국교6년 줄곧 우등생이었던 김군에겐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밭일하기란 “정말 괴로왔다”는것.
김군은 냉‘코피’를 마신것도 처음이며 10원정도인줄 알고 마셨다고 말했다.
박군은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간 후 편모슬하에서 4년 전 운학국교를 나와 어머니와 함께 화전2천5백평을 경작해왔다.
박군은 “서울 가서 한 달만 수고하면 1만원은 쉽게 벌수 있다”는 김군의 말을 듣고부터는 “밭일하기가 싫어져” 김군을 따라 서울에 오게 된 것이라고 진술했다.
(1971년8월19일치 신문)

봬는 게 없다. 커피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다방에 들어갔다. 커피 값이 모자란 상황에서 양구 사건처럼 ‘순간적 발작’을 일으켰다. 순경에게 닥치는 대로 카빈총을 갈겼다. 그 순경이라고 사고를 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다. 다음은 순경이다. 인질사건은 아니지만, 한 달 뒤인 1971년9월23일엔 순경이 만취해 M2 카빈총을 갈겼다. 기동순경 고명준(27)이 주인공이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 소재 기동내 내무반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는 “이 새끼들아 모두 죽인다…고위층과 만나고 싶다”며 창문과 천장에 3백여발을 난사했다. 이 난동으로 시경국장 등 고위간부와 2백여 명의 무장경관이 동원돼 14시간 갈팡질팡하며 경찰 체면에 먹칠을 했다고 한다. 고명준 순경은 해가 밝자 순순히 자수했다.

1971년9월28일치 신문엔 ‘총기사건-허약한 방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등장한다. 다방 인질극에 더해 무장간첩과의 도심 교전도 심심찮게 터지던 때였다. 9월25일엔 서울 성동구의 한 여인숙에서 경찰검문에 걸린 무장간첩 박춘도가 군경과의 8시간 총격전 끝에 생포됐다. 이 과정에서 전우옥 경장이 총탄 2발을 맞고 사망했다. 전우옥 경장은 솥뚜껑을 들고 진압작전에 나섰다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경찰에는 지금 방탄 ‘재키트’ 등 방탄장비나 저격총 등 총기범에 대항할 특수 장비가 없다. 또 기본장비에 드는 철모도 모자란다. 이 때문에 경찰은 용기만 믿고 나아가다 희생을 당하는 것이다. 이번 간첩 사건의 전 경장만 해도 방탄 장비가 없어 솥뚜껑으로 방패를 삼았다니 말도 안된다. (1971년9월28일치 신문)

적군파의 납치가 공항을 무대로 했다면, 국내 인질범들의 주무대는 ‘다방’이었다. 진주의 이판이 일병은 성림다방, 양구의 박추수는 소라다방, 목포의 이명진은 서울다방, 서울 영등포의 김진호와 박상준은 대호다방이었다.(아버지의 스크랩 9권에 있는 1974년치 신문을 봐도 인질극의 무대는 계속 다방이다. 동대구역 2층 구내다실, 서울 명동의 유네스코 다방…) 고뇌와 실의에 찌든 표정으로 한 손에 총을 매고 또 한손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인질범.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뒤 실탄을 장전한다. 인질로 잡혀 부들부들 떠는 여종업원들. 기나긴 대치, 짧은 총격전. 세상을 향한 저주의 발악. 범인은 사살당하거나 자살하며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아니라면 자수와 항복.

그들은 절규했다. 이판이 일병은 “결혼을 막지 말라”고 했다. 박추수는 “무조건 반항하고 싶다”고 했다. 이명진은 “세상이 싫어 무조건 죽고 싶다”고 했다. 김진호와 박상준은 “밭일하기가 괴로웠다”고 했다.

억눌린 이들의 아우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던 시대였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1971년 7~9월의 주요사건 기사만 보자. 7월엔 사법부 길들이기와 검찰의 표적수사에 항의해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37명을 필두로 150명의 법관이 사표를 냈다. 이른바 ‘사법파동’이다. 8월10일엔 서울 청계천 판잣촌에서 쫓겨난 광주대단지 주민 4만여 명이 폭동을 일으켜 도시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다. 8월23일엔 실미도의 북파부대원들이 비인간적 대우를 참지 못하고 기간병을 살해한 뒤 청와대로 향하다 자폭했다. 8월26일엔 부평진흥자유시장 노점상인 5백여 명이 노점단속에 항의하며 단속차를 뒤집고 경찰을 폭행했으며 인천북구청에 난입해 구청장실 문짝과 집기 등을 닥치는 대로 부쉈다. 9월15일엔 한진 파월(베트남 파견) 기술자들로 구성된 미지불임금청산투쟁위원회 회원 1백60여명이 서울 남대문로 KAL빌딩에 몰려와 밀린 임금 149억 원을 내놓으라며 호텔 정문 유리창을 부수고 KAL 국제선 매표소에 불을 질렀다.


철권통치의 반작용이었고, 산업화 무한질주의 그늘이었다. 조직된 이들은 데모를 했고, 이마저도 할 수 없는 개인들은 다방에서 총질을 하며 화를 풀었다. ‘흉악범’이라고 손가락질만 할 것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그들의 인질이 되고 싶다. 다방에 앉아 따뜻한 물 한잔을 건네며 같잖은 위로라도 던지고 싶다. 희망을 잃지 말라고.

아버지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역시 주조는 ‘허무’다. 스크랩 제7권(1969년1월~1970년12월) 맨 앞의 시도 그렇다. 쓸쓸하다. 읽다 보면 자꾸만 입에서 맴돈다. 인질범들에게 바치고 싶지만, 맨 마지막 문장에 기분나빠할 것만 같다.

흩어진 종이조각에 세월을 적는다
그림자처럼 낙엽처럼 흘러간 추억
산새는 울고 있는데 묘비는 말이 없구나

인생은 빗물처럼 처량하구나
인생은 피다만 꽃송이에 슬픈 냉가슴
하얀 꽃송이 속에 사랑을 묻어라

이 세상은 침뱉는 운동장
위대한 인물도 추한 인물도-
무덤을 짊어진 고행 나그네

벌거벗은 뒷산에 메아리 울고
나는 왜 창도 없는 방에서 웃고 있는가
차라리 기분 나쁘게 목을 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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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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