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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서정성이란… 지금 들어도 휴식 같은 앨범!”

‘어떤 날’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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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나온 ‘어떤 날’의 앨범을 기억하는지. 나온 지 25년, 사반세기가 된 저 옛날의 아련한 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꿈틀대는 생물처럼 아직도 살아 숨 쉰다.

두드러지진 않았어도 서서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앨범이 있다. 디지털 싱글이라는 추세 아래 겨우 두 세 곡이 수록된 EP, 미니 앨범 그리고 디지털 싱글이 판치는 현실에서 10곡 이상이 빼꼭히 실린 앨범, 이른바 풀 앨범 운운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음악’을 찾는 사람은 고집스럽게 풀 앨범에 주목한다.

설사 앨범이라는 것도 최근에는 새로 나와서 그 생명이 한 달을 넘기지 못하는 ‘반짝’들이 부지기수다. 재미와 감각은 근래 음악 판을 한 주 턱걸이의 짧은 유행절기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아직도 음악팬의 가슴을 울리는 음반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걸작일 것이다.


1986년에 나온 ‘어떤 날’의 앨범을 기억하는지. 나온 지 25년, 사반세기가 된 저 옛날의 아련한 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꿈틀대는 생물처럼 아직도 살아 숨 쉰다. 국내 음악가와 팬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전설로 꾸준히 회자되고 숭앙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베이스 조동익과 기타 이병우, 두 연주자로 구성된 듀오 팀이다. 앨범의 타이틀 는 ‘포크의 대부’ 조동진의 친동생인 조동익이 1960년생이고, 이병우가 1965년생임을 반영한 것이다(앨범의 편곡자가 조동진이었다).

그렇다고 어떤 날의 음반이 나왔을 당시 조그마한 센세이션이라도 있었는가. 다수와 연을 맺는 히트라고는 할 수 없었고 언론에서 떠든 화제작 또한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은 마치 장롱 깊숙이 금을 보관하는 심정으로 이 작품을 뇌리에 심어두었다. 3년 후 1989년에 발표된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앨범 < 어떤 날Ⅱ >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팬들도 그렇지만 특히 후대의 다수 뮤지션들이 딱 두 장에 불과한 어떤 날의 앨범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어떤 날은 TV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텔레비전 프로듀서들이 찾지도 않았다. 둘은 같이 찍은 사진도 없다. 지금처럼 인기몰이, 띄우기와 같은 홍보나 마케팅을 전혀 전제하지 않았음의 증명이다.

하지만 1980년대 대중가요 황금기를 주조해낸 그 무렵의 음악팬들은 브라운관의 ‘보이는’ 인기가수 말고도 참되고 진지한 세계를 탐구하는 ‘보이지 않는’ 음악가들을 골라낼 줄 알았다. 그들만의 서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해주는 이 내면적인 음반은 당대의 음악팬들의 수요에 맞춘(아니 수요를 불러낸) 적절한 공급이었다.

조동익
「하늘」, 「오래된 친구」, 「지금 그대는」, 「너무 아쉬워하지마」를 비롯해 일렉트릭 기타와 신시사이저가 기막힌 조화를 이뤄내 수작으로 평가받는 곡 「그날」과 동시대의 전설 ‘들국화’도 불렀던 곡 「오후만 있던 일요일」 등 수록된 9곡 모두가 가슴을 적시는 서정적 울림으로 빛나는 1집으로 이미 충분했다.

2집에 와서는 입에서 입으로 퍼진 소문이 팬들을 불리면서 요즘 말로 ‘어떤 날’ 폐인이 구축되면서 「출발」, 「초생달」, 「하루」, 「취중독백」, 「그런 날에는」 등은 FM 라디오의 신청 엽서가 꾸준했다. 마침내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중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 두 장의 앨범은 모두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을 선정할 때 어김없이 ‘100선’의 상위권에 오른다. 명작의 ‘원투 펀치’인 셈이다.

후배 작사 작곡가 심현보는 1집에 대해 “그 서정성이란… 지금 들어도 휴식 같은 앨범!”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호들갑떠는 TV와 암울한 군부 독재의 세상에 지친 당시 일각의 젊은 세대들은 심현보의 말처럼 이 앨범으로 위로와 쉼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두 장을 관통하는 어떤 날 음악의 핵심어는 당대는 물론 지금에도 그 서정성이 갖는 의미에 있다. 근래 우리의 주류음악이 상실한, 그래서 도무지 경험하기 어려운 바로 그 서정적 분위기다.

아이돌과 걸 그룹의 이른바 후크 송은 일정 소절의 반복과 자극적인 재미로 철저히 감각화, 패션화되어 있다. 이 점은 인디와 언더 음악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어디선가 진지하고 사색적인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암약하고 있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는 리스너들로부터 싸늘하게 외면을 당한다. 1980년대의 대중음악이 끊임없이 환기되는 이유는 일방통행의 지금과 달리 서정성을 포함한 다채로운 음악의 정서가 표출되고 또 팬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의 서정성은 고감도 연주와 편곡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당대 가요 팬들이 선호하는, 전통적이며 애절하고 귀에 잘 달라붙는, 흔히 말하는 ‘뽕’ 선율에서 벗어나 있었다. 통속적인 리듬과 멜로디에 포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처음 들을 때는 약간 지루해 수면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새록새록 가슴을 두드린다. 지금도 이런 음악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날의 앨범을 대할 때 어느 정도는 ‘인내’를 준비해야 한다.

그 무렵 텔레비전에서 접했던 가요들, 이를테면 발라드와 댄스는 중심이 노래하는 가수였다. 하지만 어떤 날의 이병우는 기타리스트, 조동익은 베이스주자라는 사실은 우리 대중음악이 연주자들을 밀어제쳐놓고 오로지 가수만으로 접근해왔음을, 그리하여 연주는 곧 반주였음을 반성적으로 일깨우는 것이었다. 획기적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음악이 보컬과 반주라는 등식은 지극히 재래식이라는 것, 그 고정관념의 파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병우
연주는 보컬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것임의 실천이다. 그러기 위해선 메시지와 같은 권리를 행사하는 고밀도의 연주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병우가 마니아들 사이에 사랑받은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Pat Metheny)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외국음악의 추종에 대한 아쉬움을 가져오기보다는 세련된 연주에 대한 기대감을 불렀다. 이후로 팬들도 앨범을 구입할 때 가수 이름만 보는 게 아니라 뒷면에 적혀있는 연주자나 편곡자의 이름을 챙기게끔 되었다.

어떤 날은 이때 ‘시인과 촌장’, ‘따로 또 같이’, 김현식, 김두수, 최성원 등 동료 뮤지션의 앨범에 잇달아 세션으로 초청되어 질적으로 상승한 연주를 들려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동행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이후 조동익은 특급 세션과 편곡자로서, 이병우는 영화음악 분야에서 독자적 명성을 구축했다. 조동익은 1994년에 낸 앨범 < 동 경 >과 1998년의 영화음악 < 내 마음의 풍금 >으로 평자들의 격찬을 받았다. 이병우 역시 2003년에 발표한 앨범 < 흡수 >로 진가를 드러냈으며 < 스캔들 >, < 왕의 남자 >, < 괴물 >, < 마더 >, < 해운대 > 등 빅히트 시네마의 OST를 감독했다. 작년에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영화음악콘서트’를 했다.

25년의 세월이 마치 어제인 것처럼 또렷하고 생생하다. 처음 ‘어떤 날’의 앨범을 샀을 때는 이러한 둘의 ‘매직 앙상블’을 다시는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시절에 집착하는 무리들은 미련하게도 ‘돌아온 어떤 날’을 꿈꾼다. 「그런 날에는」 「덧없는 계절」인 「11월 그 저녁에」 「오래된 친구」를 불러 「취중독백」하며 「하루」를 「출발」했어도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고 위로를 건넨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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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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