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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게 따귀 맞고 베트남에 화풀이?

한-미-월, 1968년 잔혹극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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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1월21일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무장괴한들이 청와대 쪽으로 향하다 정체가 탄로 나자 진로를 막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지나가는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졌다.


한-미-월1), 1968년 잔혹극 삼국지

영화 <1968>을 보고 싶다. 소설 <1968>을 보고 싶다.( <1Q68>이어도 좋겠다) 만화 <1968>을 보고 싶다. 뮤지컬 <1968>을 보고 싶다. 장르에 관계없이 <1968>이라는 예술작품을 막연히 상상해본다. ‘1968’이라는 숫자가 붙는다면 그 어떤 내용이든 숨막히게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하며 의미심장하리라는 믿음이다. ‘1968’은 흥행의 보증수표다. 닥치고 1968!!

비웃을 것 같다. 사실 좀 ‘오버’다. 1968년에 대한 환상을 극도로 부풀려보았을 뿐이다. 아마도 자유와 해방, 반전을 외치며 유럽과 미국을 들었다 놓은 ‘68운동’의 이미지 탓일지도 모른다. 또한 1968년에 한반도를 연달아 강타했던 비극적인 대형 사건들을 연상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 내가 10여 년 전 직접 취재했던 어떤 끔찍한 1968년도 사건의 영향이다. 오늘은 아버지의 스크랩과, 아버지가 전혀 알 수 없었던 아들의 스크랩이 만나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이는 한국과 미국, 베트남이 하나의 벨트로 얽혀 돌아간 잔혹 역사극이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6권(1967년1월~1968년12월)에서 1968년도의 첫 장을 찾아 펼친다. 역시 다르다.


무시무시한 뉴스가 튀어나온다. 암흑 같은 순간에 질려버린 아버지의 시 두 편과 함께.

공허한 생명의 메아리
밤을 창조하는 젊은 피의 통곡
빈그릇이 서로 부딪치고 소리를 한다.
망각의 순간-
공간 위에 자리를 펴고 신방을 꾸민다
신의 예지도 없는 밤
인간의 사랑도 없는 밤
서로 죽이고 죽어가는 사상의 우상
환락의 밤거리가 통곡하는 날이다

시신을 넘고 산을 넘고 등성이를 넘어 북을 향하여
흙을 찾는다
남과 북의 비극-
젊은 영혼들이 질투하는 대낮
비슷한 얼굴들인데- 총성은 울고
강산은 말이 없다



치안이 불안한 이라크의 바그다드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1968년1월21일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무장괴한들이 청와대 쪽으로 향하다 정체가 탄로 나자 진로를 막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지나가는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졌다. 이로 인해 무고한 시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무장게릴라 31명이었다.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북한산 자락을 타고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한 그들이 1968년 스크랩의 첫 장을 연 주인공이다. 이른바 ‘1.21 청와대습격 기도사건’(또는 김신조 사건). 세 쪽에 걸친 신문기사를 차근차근 읽어본다.

서울에 북괴무장간첩단
21일 밤 청운동서 31명과 교전
종로서장 전사 6명 피살


21일 밤 10시경 서울시내(종로구 청운동, 서대문구 홍제동 등)에 31명의 북괴 무장간첩단이 침입, 군경합동수색대는 교전 끝에 22일 오후 6시 현재 그 중 1명을 생포하고 5명을 사살, 나머지는 북으로 달아났는데 군경은 이를 추격 중이다. 채원식 치안국장은 22일 오전, 대간첩사건을 진두지휘하던 서울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을 비롯, 간첩과 격투하다 숨진 민간인 이용선(31, 홍제동)씨 등 6명의 우리측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경관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22일 오후 6시 현재, 한 명을 생포하고 5명을 사살했다. 이제 31명 중 25명이 남았다. 작전에 실패한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북한. 북한산을 다시 올라 군경의 방어망과 살을 에는 추위와 배고픔을 뚫고 수풀과 바위를 헤치며 북쪽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야 했다. 그러나 쉬우랴.

불 뿜는 총앞에 맥없이
추위와 굶주림 지쳐 제대로 몸 못가눠


【서부전선】육군 OO사단 75연대 3대대 12중대(중대장 신석곤 대위)는 25일 밤 양주군 백성면 기산리 앵무봉 북쪽 기슭 ‘안고령’ 마을 어귀에 잠복, 북상루트를 차단하고 있었다. 밤9시15분, 중대CP 초소에 잠복 중이던 송세철(29)상병의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20미터 전방, 송 상병은 옆에 있던 중대장 신 대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선뜻 비쳤던 그림자는 다음 순간 찰싹 고목에 가리워졌다.
그때마침 부근상공을 선회 중이던 C46 수송기에서 조명탄을 발사, 대낮처럼 밝아진 눈앞에 개울을 따라 뛰어가는 북괴 특공대원 1명의 모습이 똑똑히 부각됐다. “드르륵” 중대장 신대위의 불을 뿜는 카빈 M2 앞에 북괴 특공대원은 맥없이 개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밤9시20분, 지칠 대로 지친 끝에 사살된 북괴특공대원은 무기를 모두 버리고 일제 때 만든 10만분의 1 낡은 지도 한 장과 나침반 하나를 지니고 있었고 오른쪽 주머니 속에는 생엿봉지와 배추시래기 한줌이 나왔고 오른손에는 생무우 한 개가 쥐어져 있었다.
노획된 지도 선상에 서울부터 문산까지 도로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걸로 보아 사살된 북괴 특공대원은 운전조일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1시간 반 뒤인 이날 밤 11시 50분경 양주군 광적면 비암2리 ‘전진바위’ 부근 물레방아계곡 입구에 잠복 중이던 동 연대 2대대7중대1소대 김석수(22) 일병은 북괴 특공대원 1명이 계곡을 빠져 개울을 건너는 것을 발견, 카빈의 방아쇠를 당겼다.
가슴에 실탄을 맞고 개울 얼음판위에 쓰러졌던 북괴 특공대원은 순간 수류탄을 뽑아들고 던질 자세로 잠복초소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기진한 북괴특공대원은 잠복초소 1m 앞 논두렁에 몸을 걸치면서 수류탄이 폭발,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절명했고 김 일병과 함께 잠복 중이던 전재춘(23) 상병이 왼쪽 팔에 파편을 맞아 경상을 입었다.

시체 보고 이름 계급 밝혀
김신조 “듣기보다 남한 자유롭다”


【의정부】25일 오후 2시 생포된 북괴 특공대원 김신조(27, 북괴군 소위)는 대간첩작전군사령부인 의정부 부근 O군 기지 O군단CP에서 동 작전지역내에서 사살된 북괴특공대원 시체 14구 중 13구(1구 미도착, 총사살 19명 중 5명은 서울에서 사살)에 대한 이름?나이?계급 등 신원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날 국군작업복 상의와 검은 바지에 농구화를 신고 말끔히 이발까지 하고나온 김은 천막 속에서 시체를 꺼내어 올 때마다 이름과 나이 계급 등을 태연한 자세로 하나하나 밝혔는데 그중 1구는 수류탄 폭사로 머리가 날아가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동료들의 시체를 본 느낌이 어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김은 “나 혼자 살아남았다”고 중얼거리며 “북한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남한은 자유스럽다”고 말했으나 “자신의 행동을 아직까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버티었다. 이날 김이 확인한 북괴특공대 사살체 13구는 모두 북괴124군부대 군관으로 중위 6명, 소위 6명으로 24세부터 38세까지였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하략)2)


이는 1968년 1월부터 3월까지 음미하려는 다섯 가지 대형사건 중 제1탄에 해당한다. ‘따귀1’이라 명명해보겠다. 따귀를 맞은 사람은 박정희. 청와대 앞마당까지 북한의 괴한들이 와서 총격전을 벌이다니…. 이보다 더 모욕적일 수 없다. 이틀 뒤 ‘따귀2’에 해당하는 사건이 곧바로 터진다. 피해자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 스크랩에는 ‘북괴, 미함 푸에블로호 납’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맨 끝 단어가 ‘납북’인데 ‘북’은 찢어지고 ‘납’만 남았다.)


“필사의 퇴로 막아라”라는 1.21사건 관련기사 제목 바로 옆 장이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1968년1월23일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한반도 동해상에서 북한 초계정에 끌려갔다. 영해 침범이 이유였다. 자국 첩보함이 나포된 일은 미 해군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한다.

북괴, 미함 푸에블로호 납북
23일 동해서…미 장병등 83명 태운
미핵항공모 엔(엔터프라이즈)호 원산항에 급파
월남 가다 기동함대 이끌고
승무원 수명 사상


(미국)국방성은 ‘푸에블로’ 호와 승무원들을 즉각 석방하도록 소련을 통해 북괴와 접촉할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방성이 밝힌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선한 해군정보수집보조함으로 906톤, 길이 약 54미터, 폭10미터 12.2 노트다. ‘푸에블로’호가 납치되기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푸에블로’호는 23일 낮 정오(한국 시간)경 처음에 한 척의 북괴초계정의 추적을 받아 북괴 초계정이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고 요구하자 이에 대해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그후 다시 북괴정은 “정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왔으나 ‘푸에블로’호는 “공해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했다.
약 1시간 뒤 북괴정의 지원 요청을 받고 3척의 무장초계정과 2대의 ‘미그’제트기가 내도(來到)하여 ‘푸에블로’호를 둘러쌌다.
‘미그’기들이 ‘푸에블로’호의 우현을 선회비행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괴초계정이 ‘푸에블로’호에 접근하여 북괴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했다. 이때가 오후 1시45분(한국시간)이었다. (하략)

【워싱톤 23일UPI】 미 해군은 23일밤 월남 수역으로 향하던 미핵추진 항모 ‘엔터프라이즈’호의 진로를 바꾸어 핵추진 ‘프리게이트’함 ‘트럭스틴’호를 포함한 기동함대와 함께 83명의 승무원들과 함께 북괴 초계정에 강제 납북된 미해군 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된 동해상으로 급파했다.
이와 같은 힘의 과시는 미국이 소련 및 여러 다른 외교경로를 통해 906t의 ‘푸에블로’호와 승무원 전원을 즉각 석방하도록 북괴에 요구한 것과 때를 같이 해서 행해졌다. ‘엔터프라이즈’호는 5일간의 일본 사세호 기항을 마치고 월남으로 향하기 위해 남진하던 중 북쪽으로 함수(艦首)를 돌려 ‘푸에블로’호가 끌려간 곳으로 알려진 원산만 해역으로 향해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정통한 소식통들은 말했다.
핵추진 ‘프리게이트’함, ‘트럭스톤’호를 동반한 ‘엔터프라이즈’호는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그 소식통은 말했다.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는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도록 지시를 받았다”는 내용은 보복공격을 암시한다. 그러나 눈을 씻고 스크랩을 찾아봐도 보복을 전하는 다음 뉴스는 없다. 무려 11개월간 어쩌지 못하고 발만 구르다, 교전 중에 사망한 1명을 제외한 82명의 승무원을 돌려받았다. 이건 크리스마스 이브날 아침의 기사로 스크랩 끄트머리에 붙어있다.


남한의 박정희도, 미국의 존슨도 끝내 북한의 따귀를 때리지 못했다. 박정희는 ‘1.21사건’ 뒤 주한 미 대사인 윌리엄 포터와 존슨 대통령의 특사인 사이러스 밴스를 잇따라 만나 구체적인 목표지점까지 제시하며 선제공격을 하자고 했다. 일거에 거절당했다. 미국은 당시 베트남전쟁 하나만으로도 피곤했다. 전쟁을 한반도까지 확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 해엔 대통령선거도 있었다.

박정희도 미국에게 쓸 만한 카드가 있긴 했다. “베트남의 한국군을 철수시킨다”는 으름장이었다. 다음과 같은 미국의 맞대응을 과감히 무시한다면 말이다. “베트남의 한국군을 철수하면, 한국의 미군을 철수할 거야.”
청와대를 노린 북한의 도발은 베트남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글을 쓰며 어느 중견 역사학자에게 “북한이 왜 이렇게 무리수를 썼을까” 자문을 구해보았다. 이런 답이 돌아온다. “체 게바라가 왜 볼리비아에 갔겠어?” 세계혁명의 대의를 실천하려는 방편이었다는 말이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성공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가 콩고에 이어 볼리비아에 가서 혁명세력을 도왔듯이, 북한의 김일성은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한 남한의 수도를 공격함으로써 남베트남 혁명세력을 측면 지원했다는 해석이다.(66년부터 북한에는 게릴라 훈련센터가 만들어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25개국 2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베트남은 1월30일 구정대공세로 미국을 구석에 몬다. 이번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신경 쓸 틈을 차단한 셈이다. 푸에블로호 사건 일주일 만이었다. 이건 설 맞이 ‘특별 따귀’라고 해야 할까. 음력 설에 사이공을 비롯한 베트남 전역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는 바람에 미군은 1000명 넘는 전사자를 기록한다. 사망군인들이 유골이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오면서 반전 분위기는 미국 전역에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자, 이제부턴 ‘따귀’의 반대급부다. ‘따귀1’에 맞서는 ‘화풀이1’이라 이름 붙여 보겠다. 이 사건은 1968년 당시엔 그 어떤 국내외 신문도 보도한 적이 없다. 당연히 아버지의 스크랩엔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인 나의 스크랩에만 있을 뿐이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베트남전과 관련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는데, 그 주요한 내용들을 한 권의 스크랩에 모아놓았다. 어쩌면 나에게는 유일한 뉴스 스크랩이다. 내가 쓴 기사를 중심으로 모아놓은 게 아버지의 스크랩과 다른 점이다. 신문스크랩이 아닌 잡지스크랩이라는 점도 차이가 난다. 아래 기사는 그 중의 일부다.


청룡여단은 1968년1월30일부터 2월29일까지 여단 규모로 이른바 ‘괴룡1호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68년1월30일 월맹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대공세에 맞선 것으로 ‘구정공세 반격작전’으로도 불렸다. 당시 월맹군과 베트콩이 청룡여단의 주둔지 호이안시는 물론 디엔반현등을 공격하자 전 여단이 나서 베트콩 수색 소탕전을 시작한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8년 2월12일. (중략) 그날 1중대는 1,2,3 소대 순으로 1열 종대를 지어 퐁니촌 측면을 통과하고 있었다. 위치상으로 보면 다낭에서 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부근. 하노이와 호치민을 잇는 1번 국도에서 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독립부락. 1중대는 애초 퐁니촌으로 진입할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로부터 선두 1소대 병력쪽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대원들이 수풀 바닥에 엎드렸다. 누군가 한 명이 총에 맞아 부상한 듯 했다. 최영언 소대장은 중대장 김석현 대위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다. 중대장의 응답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1소대와 2소대가 방향을 왼쪽으로 틀고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다.( <한겨레21> 2000년5월4일치 ‘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중)

장소 : 쿠앙남(Quang Nam)성 디엔반(Dien Ban)현, 퐁니(Phong Nhi)?퐁넛(Phong Nut)마을
상황 : 한국 해병2여단 1대대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받자 마을을 공격. 앞 소대에서 민간인들을 후송시켰으나 뒤에서 대부분 사살됨.
희생과 손실 : 79명(또는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
( <한겨레21> 2000년11월23일치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중)

퐁니?퐁넛촌 사건 1년 뒤인 1969년 2월, 피해자 가족과 친척 35명이 남베트남공화국 의회의장에게 탄원서를 돌려 배상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 슬프도다. 시민의 권리를 갖고 있고 4천년의 문명을 지닌 67명(숫자는 주장하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의 베트남 사람들이 일개 곤충 취급을 받았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 <한겨레21> 2000년11월23일치 ‘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 밀라이’)3)

1.21사건으로부터 22일만이었다. 푸에블로호 사건으로부터 20일만이었다. 구정대공세로부터 13일만이었다. 베트남 중부지방인 쿠앙남성 디엔반현 근처 1번 국도를 정찰하던 해병 2여단 제1대대1중대 병력이 기습 저격을 받고 부상병 1명을 후송한 뒤 서쪽 1km 인근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했다. 한국군이 어떤 작전을 마치고 빠져나간 뒤에 마을에서는 79명(또는 69명)의 여성과 노인, 어린이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가슴이 잘려 덜렁거리는 20살 여성도 있었다. 불에 탄 노인도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세 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첫 번째는 2000년 5월. 1968년 2월 12일의 작전에 참여했던 소대장들 인터뷰를 실었다. 이 사건이 한국과 남베트남 정부간에 문제가 되어 나중에 중앙정보부로부터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브라질에 이민을 간 중대장과는 국제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모두 “한국군이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2000년 11월. 워싱턴의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해제된 관련 자료에 관한 기사였다. 당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가 작성하여 주월미군사령관과 군부 고위장성에게 보낸 보고서엔 이 사건의 조사결과와 사진들이 첨부돼 있었다. 약 10여장의 흑백사진엔 총격을 받아 사망한 시신들이 떼로 누워있었다. 세 번째는 2001년 4월. 그 시신 사진들을 들고 베트남의 사건 현장을 찾았다. 사진 속 주인공들의 유족들이 나와 울먹이며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과 나이를 밝히고 증언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의 지역은 남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안전마을’이었다. 미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을 정도로 베트콩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건 화풀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전투부대와 교전을 했다면 700명, 아니 7000명의 사상자가 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진 속의 시신은 어린이와 부녀자와 노인들뿐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베트남에서의 ‘2.12사건’은 ‘1.21사건’의 복수가 됐다. 종로(청운동)에서 뺨을 맞고 월남에서 화풀이를 한 셈이다. 북한 무장게릴라에 당했으니, 베트콩 게릴라에 대한 보복이라면 그나마 말이 될 텐데 애꿎은 민간인들을 향해 ‘묻지마 살인’을 하고 말았다.

미군이 한국군을 따라한 ‘화풀이2’도 그렇다. 미군이 한국군보다 뒤늦게 했지만 일찍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규모 면에서도 비교가 안 된다. 역시 ‘아버지의 스크랩’엔 없다. 당시엔 보도가 안 되었고 1년 반이 넘어서야 진실이 밝혀졌다. 바로 ‘밀라이 학살’사건이다. ‘2.12사건’ 한 달 뒤인 1968년3월16일의 일이다. 윌리엄 캘리 중위가 지휘하는 미 육군 11보병부대인 찰리부대가 베트남 중부지방인 쿠앙응아이성 선틴현 선미마을의 밀라이촌 등에서 민간인 560명 이상을 죽였다. 소녀들을 향한 강간도 이뤄졌다. 이 역시 결과적으로 푸에블로호 납치와 구정대공세에 대한 ‘묻지마 화풀이’는 아니었을까.

밀라이 학살이 벌어진 뒤 베트남쪽에서 지은 ‘밀라이 평화공원’의 조각물. 이곳은 매년 4월30일 종전기념일마다 미군들로 북적거린다.
(사진 : 고경태)

‘밀라이 학살’이 벌어진 3월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거리를 휩쓸었다. ‘68운동’의 거대한 물결이었다. 그 주요한 이슈 중 하나는 ‘베트남전 반대’였다.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은 “호! 호! 호치민!”을 연호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기득권 세대의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했고 성 해방과 흑인, 여성을 비롯한 모든 소수자 차별에 반대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찬양했다. 이런 흐름은 대학에서의 평등한 사제관계 정착 등 권위주의 타파라는 일상문화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정반대였다. 1.21사건은 사회를 깊은 권위주의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했다. ‘위기’는 좋은 명분이었다. 4월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5월에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통과됐으며, 세종로에 이순신 동상이 서고, 학생들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기 시작했다. 청와대 습격기도는 박정희를 떨게 했지만, 동시에 남북긴장을 명분으로 장기집권의 틀을 닦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 이런 점을 기대하고 본다면 아버지의 1968년 스크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아니 실망스럽다. 얇기도 하고 중요한 내용들은 대부분 빠져있다.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 피살(4월4일)과 존 에프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이자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6월6일),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의 당선(12월6일) 기사만이 외롭게 붙어있다.


68운동의 흔적은 거의 없다. 한국의 신문들이 아예 다루지 않은 게 아닐까 하여 인터넷으로 <동아일보> 1968년 5월치를 검색해보았다. 틈틈이 1면을 포함한 주요기사로 “佛 반정부 데모 절정-전국 18개대 점거, 백만 시민 가담”(5월 15일치), “佛 파업으로 최대 위기”(5월 20일치) “드골, 곧 모종 중대결단”(5월 30일치)등이 10여 차례 등장한다. 아버지가 그때 본 신문이 <동아일보>였는데, 왜 한 번도 가위를 들지 않았을까? 기사가치에 대한 판단력이 없어서? 아니면 바빠서? 하긴 아버지가 고향 강원도를 떠나 생면부지인 경상도의 소읍에서 힘겹게 셋방살이를 하던 시기였다. 여러 번 연탄가스에 정신을 잃었는데 돌이 갓 지난 내가 깨어서 우는 바람에 가까스로 생명을 구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먹고살기 바빠 스크랩할 시간을 내지 못했으리라는 추론을 해본다.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소식은 있다.


‘프라하의 봄’이 소련 탱크에 짓밟히는 순간으로 8월22일치 신문이다. “왜 체코슬로바키아일까”라고 이유를 따져본다. 공산권 국가라서 만만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당시 ‘68운동’은 소련 공산주의도 반대하는 흐름이었다. 소련을 비판하는 칼럼을 읽어본다.

숨막히는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숨을 돌려보려고 자유를 부르짖었다고 해서 밤중에 쳐들어와서는 제국주의의 조종을 받았다고 후려갈기는 것이 소위 ‘형제적 우의’ 라는 것인가. 힘이 세다고 해서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마구 짓밟아놓고, 대통령 이하 책임자들을 개 끌듯이 끌어다가 몽둥이찜질을 하여 자기들의 조건을 덮어씌우고도 그나라의 ‘요청’에 의해서 군을 ‘진주’시켰다고 떠들어대는 것이 소위 ‘민족자결’인가. (<동아일보> ‘횡설수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가장 의외의 기사는 한국의 대학생들과 미군의 충돌이다. 장갑차 탱크가 동원되고 미군이 발포까지 해 세 명이 총상을 입었다니…. 어떤 격렬한 주장을 했길래? 다음은 <동아일보> 2월8일치다.


데모대 미군과 유혈충돌
4백여 신학생 ‘자유의 다리서’…셋 총상 7명 부상
장갑차 탱크 동원


【문산】7일 낮12시10분임진강 ‘자유의 다리’(프리돔?게이트?브리지) 앞에서 경북 금릉에서 올라온 ‘기드온’ 신학교 학생과장 지용성(45)씨와 남녀학생 450여명은 북괴만행을 규탄하는 데모를 벌이다 미군과 충돌, 미군의 발포로 3명이 총상을 입는 등 모두 10명이 부상했다.
6일 밤 열차편으로 서울을 거쳐 문산에 온 학생들은 지 학생과장이 현지 경찰에 집회계를 내고 있는 사이, 경찰의 만류를 뿌리치고 달음박질로 문산 북쪽 4km 지점 임진강 ‘자유의 다리’까지 달려가 다리 앞에서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유린 말라” “38선을 누가 막았나, 피값을 갚으라” “38선이 국경이냐 우리 국경은 압록강이다” 등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한 다음 제지하는 미군 경비망을 뚫고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돼 있는 ‘자유의 다리’(길이 200미터)를 건너갔다.
이때 다리 북쪽을 지키고 있던 미군 10여명은 M16소총 20여발을 땅을 향해 위협발사, 앞장섰던 학생 김은영(27, 여)양과 연규장(33)씨, 그리고 강사인 박태득(36)씨 등 3명이 총상을 입었으며 이들 미군과의 옥신각신으로 이종진(21), 최순기(27), 이대영(28)군 등 다른 7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측은 곧 장갑차 10대, 탱크 1대 그리고 미군 1백여 명을 동원, 학생들을 다리 남쪽으로 밀어냈는데 오후 3시 반 현재 학생들은 다리 남쪽 500미터 지점인 임진면 마정리 길가에 연좌데모중이다.
현장에는 미20사단 지원사령관 ‘조지 로빈스’ 대령이 나와 미군을 지휘하고 있으며 연좌중인 학생 주위에는 한미양측 군경 약 300여명이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다. 충돌사태를 빚은 ‘자유의 다리’ 남쪽 입구도 미군 장갑차와 탱크,‘헬리콥터’ 20대 등 삼엄한 경계망이 펴져 있고 마정리 일대 교통은 일체 차단되었다. 부상자들은 문산 성심병원에 입원중이다. 한편 이 충돌현장을 취재하던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사진기자는 미군에게 사진필 름을 뺐겼다. 〈김형 기자〉

‘북괴만행’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1월21일의 그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향해 탱크를 동원하고 총까지 쏘다니. 미군들이 심했다. 종로에서 뺨을 맞은 뒤 월남에서 화풀이를 하듯, 까칠한 미군 대신 괜히 죄 없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다. 얼마나 스크랩이 부실하고 썰렁하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띄냐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들의 스크랩으로 만회했다. 부자의 두 스크랩을 합하여 역사의 퍼즐을 맞춰보았다. 그 퍼즐의 조각의 조각의 하나라도 좋다. 1.21이건 1.23이건 2.12건 3.16이건 아무거나 골라 시나리오를 써도 심금을 울리는 예술 작품이 나올 것 같다.


◆ 참고한 책
『68운동』(이성재 지음, 책세상, 2009)
『미국사 산책10』(강준만 지음, 인물과 사상과, 2010)




1) ‘월남’(越南)은 베트남의 한자식 이름이다. 1975년4월 베트남 통일 이전에는 북위 17도선 이북의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을 ‘월맹’으로 부르는 대신 이남의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 혹은 자유월남)만을 ‘월남’이라고 칭했다. 지금은 베트남을 통칭하는 단어로 ‘월남’을 사용한다. 남베트남의 수도는 ‘사이공’이었는데, 통일 이후엔 ‘호치민’으로 바뀌었다. 베트남전쟁 시기 북베트남 주석의 이름을 딴 것으로 한반도 통일 이후 ‘서울시’가 ‘김일성시’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다. 통일 이후 베트남의 수도는 북쪽의 ‘하노이’가 되었다. 베트콩은 베트남 코뮤니스트(Vietnam Communist)의 약자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Vietnamese National Liberation Front:NLF) 소속의 전사들을 일컫는다.

2) 김신조(69, 현재 서울성락침례교회 목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북으로 돌아가던 중 발각되어 사살됐다. 다만 “김신조를 제외한 나머지 30명을 모두 사살했다”는 군 당국의 발표는 사실과 달랐다. 2~3명은 군의 포위망을 뚫고 기어코 북으로 갔다. 2000년 9월 김정일 위원장이 한국 내 각계 인사에게 보내는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던 북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선전 담당 부총국장 박재경(71, 현재 북한인민군 대장) 이 그 중의 한 명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3) 이 사건이 문제가 되면서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 몰랜드는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에게 공문을 보내 전쟁범죄의 존재 여부를 묻는다. 이 조사는 주월한국군사령부 해병 제2여단 헌병단 조사계가 맡는다. <당시 조사계장이었던 성 아무개씨는 2000년5월 <한겨레21>에 제보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 헌병대장이 내민 지침에 따라 ‘베트콩이 한국군 위장복을 입고 꾸민 소행이며 한국군은 양민학살을 한 적이 없다’ 는 거짓 조서를 꾸몄다.” 수십 년이 흐른 뒤 해병 장교 출신 아들을 암으로 잃은 뒤부터 그는 무고하게 죽은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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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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