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고경태의 아버지의 스크랩
북한에게 따귀 맞고 베트남에 화풀이?
한-미-월, 1968년 잔혹극 삼국지
1968년1월21일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무장괴한들이 청와대 쪽으로 향하다 정체가 탄로 나자 진로를 막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지나가는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졌다.
한-미-월1), 1968년 잔혹극 삼국지
영화 <1968>을 보고 싶다. 소설 <1968>을 보고 싶다.( <1Q68>이어도 좋겠다) 만화 <1968>을 보고 싶다. 뮤지컬 <1968>을 보고 싶다. 장르에 관계없이 <1968>이라는 예술작품을 막연히 상상해본다. ‘1968’이라는 숫자가 붙는다면 그 어떤 내용이든 숨막히게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하며 의미심장하리라는 믿음이다. ‘1968’은 흥행의 보증수표다. 닥치고 1968!!
비웃을 것 같다. 사실 좀 ‘오버’다. 1968년에 대한 환상을 극도로 부풀려보았을 뿐이다. 아마도 자유와 해방, 반전을 외치며 유럽과 미국을 들었다 놓은 ‘68운동’의 이미지 탓일지도 모른다. 또한 1968년에 한반도를 연달아 강타했던 비극적인 대형 사건들을 연상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 내가 10여 년 전 직접 취재했던 어떤 끔찍한 1968년도 사건의 영향이다. 오늘은 아버지의 스크랩과, 아버지가 전혀 알 수 없었던 아들의 스크랩이 만나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이는 한국과 미국, 베트남이 하나의 벨트로 얽혀 돌아간 잔혹 역사극이다.
아버지의 스크랩 제6권(1967년1월~1968년12월)에서 1968년도의 첫 장을 찾아 펼친다. 역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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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생명의 메아리 |
서울에 북괴무장간첩단 21일 밤 청운동서 31명과 교전 종로서장 전사 6명 피살 21일 밤 10시경 서울시내(종로구 청운동, 서대문구 홍제동 등)에 31명의 북괴 무장간첩단이 침입, 군경합동수색대는 교전 끝에 22일 오후 6시 현재 그 중 1명을 생포하고 5명을 사살, 나머지는 북으로 달아났는데 군경은 이를 추격 중이다. 채원식 치안국장은 22일 오전, 대간첩사건을 진두지휘하던 서울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을 비롯, 간첩과 격투하다 숨진 민간인 이용선(31, 홍제동)씨 등 6명의 우리측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경관2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22일 오후 6시 현재, 한 명을 생포하고 5명을 사살했다. 이제 31명 중 25명이 남았다. 작전에 실패한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북한. 북한산을 다시 올라 군경의 방어망과 살을 에는 추위와 배고픔을 뚫고 수풀과 바위를 헤치며 북쪽 군사분계선 철책을 넘어야 했다. 그러나 쉬우랴. |
불 뿜는 총앞에 맥없이 추위와 굶주림 지쳐 제대로 몸 못가눠 【서부전선】육군 OO사단 75연대 3대대 12중대(중대장 신석곤 대위)는 25일 밤 양주군 백성면 기산리 앵무봉 북쪽 기슭 ‘안고령’ 마을 어귀에 잠복, 북상루트를 차단하고 있었다. 밤9시15분, 중대CP 초소에 잠복 중이던 송세철(29)상병의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20미터 전방, 송 상병은 옆에 있던 중대장 신 대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선뜻 비쳤던 그림자는 다음 순간 찰싹 고목에 가리워졌다. 그때마침 부근상공을 선회 중이던 C46 수송기에서 조명탄을 발사, 대낮처럼 밝아진 눈앞에 개울을 따라 뛰어가는 북괴 특공대원 1명의 모습이 똑똑히 부각됐다. “드르륵” 중대장 신대위의 불을 뿜는 카빈 M2 앞에 북괴 특공대원은 맥없이 개울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밤9시20분, 지칠 대로 지친 끝에 사살된 북괴특공대원은 무기를 모두 버리고 일제 때 만든 10만분의 1 낡은 지도 한 장과 나침반 하나를 지니고 있었고 오른쪽 주머니 속에는 생엿봉지와 배추시래기 한줌이 나왔고 오른손에는 생무우 한 개가 쥐어져 있었다. 노획된 지도 선상에 서울부터 문산까지 도로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는 걸로 보아 사살된 북괴 특공대원은 운전조일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1시간 반 뒤인 이날 밤 11시 50분경 양주군 광적면 비암2리 ‘전진바위’ 부근 물레방아계곡 입구에 잠복 중이던 동 연대 2대대7중대1소대 김석수(22) 일병은 북괴 특공대원 1명이 계곡을 빠져 개울을 건너는 것을 발견, 카빈의 방아쇠를 당겼다. 가슴에 실탄을 맞고 개울 얼음판위에 쓰러졌던 북괴 특공대원은 순간 수류탄을 뽑아들고 던질 자세로 잠복초소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기진한 북괴특공대원은 잠복초소 1m 앞 논두렁에 몸을 걸치면서 수류탄이 폭발,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절명했고 김 일병과 함께 잠복 중이던 전재춘(23) 상병이 왼쪽 팔에 파편을 맞아 경상을 입었다. |
시체 보고 이름 계급 밝혀 김신조 “듣기보다 남한 자유롭다” 【의정부】25일 오후 2시 생포된 북괴 특공대원 김신조(27, 북괴군 소위)는 대간첩작전군사령부인 의정부 부근 O군 기지 O군단CP에서 동 작전지역내에서 사살된 북괴특공대원 시체 14구 중 13구(1구 미도착, 총사살 19명 중 5명은 서울에서 사살)에 대한 이름?나이?계급 등 신원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날 국군작업복 상의와 검은 바지에 농구화를 신고 말끔히 이발까지 하고나온 김은 천막 속에서 시체를 꺼내어 올 때마다 이름과 나이 계급 등을 태연한 자세로 하나하나 밝혔는데 그중 1구는 수류탄 폭사로 머리가 날아가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동료들의 시체를 본 느낌이 어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김은 “나 혼자 살아남았다”고 중얼거리며 “북한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남한은 자유스럽다”고 말했으나 “자신의 행동을 아직까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버티었다. 이날 김이 확인한 북괴특공대 사살체 13구는 모두 북괴124군부대 군관으로 중위 6명, 소위 6명으로 24세부터 38세까지였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하략)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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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 미함 푸에블로호 납북 23일 동해서…미 장병등 83명 태운 미핵항공모 엔(엔터프라이즈)호 원산항에 급파 월남 가다 기동함대 이끌고 승무원 수명 사상 (미국)국방성은 ‘푸에블로’ 호와 승무원들을 즉각 석방하도록 소련을 통해 북괴와 접촉할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방성이 밝힌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선한 해군정보수집보조함으로 906톤, 길이 약 54미터, 폭10미터 12.2 노트다. ‘푸에블로’호가 납치되기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푸에블로’호는 23일 낮 정오(한국 시간)경 처음에 한 척의 북괴초계정의 추적을 받아 북괴 초계정이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고 요구하자 이에 대해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그후 다시 북괴정은 “정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왔으나 ‘푸에블로’호는 “공해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했다. 약 1시간 뒤 북괴정의 지원 요청을 받고 3척의 무장초계정과 2대의 ‘미그’제트기가 내도(來到)하여 ‘푸에블로’호를 둘러쌌다. ‘미그’기들이 ‘푸에블로’호의 우현을 선회비행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괴초계정이 ‘푸에블로’호에 접근하여 북괴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했다. 이때가 오후 1시45분(한국시간)이었다. (하략) 【워싱톤 23일UPI】 미 해군은 23일밤 월남 수역으로 향하던 미핵추진 항모 ‘엔터프라이즈’호의 진로를 바꾸어 핵추진 ‘프리게이트’함 ‘트럭스틴’호를 포함한 기동함대와 함께 83명의 승무원들과 함께 북괴 초계정에 강제 납북된 미해군 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된 동해상으로 급파했다. 이와 같은 힘의 과시는 미국이 소련 및 여러 다른 외교경로를 통해 906t의 ‘푸에블로’호와 승무원 전원을 즉각 석방하도록 북괴에 요구한 것과 때를 같이 해서 행해졌다. ‘엔터프라이즈’호는 5일간의 일본 사세호 기항을 마치고 월남으로 향하기 위해 남진하던 중 북쪽으로 함수(艦首)를 돌려 ‘푸에블로’호가 끌려간 곳으로 알려진 원산만 해역으로 향해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정통한 소식통들은 말했다. 핵추진 ‘프리게이트’함, ‘트럭스톤’호를 동반한 ‘엔터프라이즈’호는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그 소식통은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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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여단은 1968년1월30일부터 2월29일까지 여단 규모로 이른바 ‘괴룡1호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68년1월30일 월맹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구정대공세에 맞선 것으로 ‘구정공세 반격작전’으로도 불렸다. 당시 월맹군과 베트콩이 청룡여단의 주둔지 호이안시는 물론 디엔반현등을 공격하자 전 여단이 나서 베트콩 수색 소탕전을 시작한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8년 2월12일. (중략) 그날 1중대는 1,2,3 소대 순으로 1열 종대를 지어 퐁니촌 측면을 통과하고 있었다. 위치상으로 보면 다낭에서 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쿠앙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부근. 하노이와 호치민을 잇는 1번 국도에서 서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독립부락. 1중대는 애초 퐁니촌으로 진입할 계획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로부터 선두 1소대 병력쪽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대원들이 수풀 바닥에 엎드렸다. 누군가 한 명이 총에 맞아 부상한 듯 했다. 최영언 소대장은 중대장 김석현 대위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다. 중대장의 응답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1소대와 2소대가 방향을 왼쪽으로 틀고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다.( <한겨레21> 2000년5월4일치 ‘양민학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했다’중) 장소 : 쿠앙남(Quang Nam)성 디엔반(Dien Ban)현, 퐁니(Phong Nhi)?퐁넛(Phong Nut)마을 상황 : 한국 해병2여단 1대대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받자 마을을 공격. 앞 소대에서 민간인들을 후송시켰으나 뒤에서 대부분 사살됨. 희생과 손실 : 79명(또는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 ( <한겨레21> 2000년11월23일치 ‘잠자던 진실, 30년만에 깨어나다’중) 퐁니?퐁넛촌 사건 1년 뒤인 1969년 2월, 피해자 가족과 친척 35명이 남베트남공화국 의회의장에게 탄원서를 돌려 배상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 슬프도다. 시민의 권리를 갖고 있고 4천년의 문명을 지닌 67명(숫자는 주장하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의 베트남 사람들이 일개 곤충 취급을 받았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 <한겨레21> 2000년11월23일치 ‘끝없이 벗겨지는 제2의 밀라이’)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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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는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숨을 돌려보려고 자유를 부르짖었다고 해서 밤중에 쳐들어와서는 제국주의의 조종을 받았다고 후려갈기는 것이 소위 ‘형제적 우의’ 라는 것인가. 힘이 세다고 해서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마구 짓밟아놓고, 대통령 이하 책임자들을 개 끌듯이 끌어다가 몽둥이찜질을 하여 자기들의 조건을 덮어씌우고도 그나라의 ‘요청’에 의해서 군을 ‘진주’시켰다고 떠들어대는 것이 소위 ‘민족자결’인가. (<동아일보> ‘횡설수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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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대 미군과 유혈충돌 4백여 신학생 ‘자유의 다리서’…셋 총상 7명 부상 장갑차 탱크 동원 【문산】7일 낮12시10분임진강 ‘자유의 다리’(프리돔?게이트?브리지) 앞에서 경북 금릉에서 올라온 ‘기드온’ 신학교 학생과장 지용성(45)씨와 남녀학생 450여명은 북괴만행을 규탄하는 데모를 벌이다 미군과 충돌, 미군의 발포로 3명이 총상을 입는 등 모두 10명이 부상했다. 6일 밤 열차편으로 서울을 거쳐 문산에 온 학생들은 지 학생과장이 현지 경찰에 집회계를 내고 있는 사이, 경찰의 만류를 뿌리치고 달음박질로 문산 북쪽 4km 지점 임진강 ‘자유의 다리’까지 달려가 다리 앞에서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유린 말라” “38선을 누가 막았나, 피값을 갚으라” “38선이 국경이냐 우리 국경은 압록강이다” 등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한 다음 제지하는 미군 경비망을 뚫고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돼 있는 ‘자유의 다리’(길이 200미터)를 건너갔다. 이때 다리 북쪽을 지키고 있던 미군 10여명은 M16소총 20여발을 땅을 향해 위협발사, 앞장섰던 학생 김은영(27, 여)양과 연규장(33)씨, 그리고 강사인 박태득(36)씨 등 3명이 총상을 입었으며 이들 미군과의 옥신각신으로 이종진(21), 최순기(27), 이대영(28)군 등 다른 7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측은 곧 장갑차 10대, 탱크 1대 그리고 미군 1백여 명을 동원, 학생들을 다리 남쪽으로 밀어냈는데 오후 3시 반 현재 학생들은 다리 남쪽 500미터 지점인 임진면 마정리 길가에 연좌데모중이다. 현장에는 미20사단 지원사령관 ‘조지 로빈스’ 대령이 나와 미군을 지휘하고 있으며 연좌중인 학생 주위에는 한미양측 군경 약 300여명이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다. 충돌사태를 빚은 ‘자유의 다리’ 남쪽 입구도 미군 장갑차와 탱크,‘헬리콥터’ 20대 등 삼엄한 경계망이 펴져 있고 마정리 일대 교통은 일체 차단되었다. 부상자들은 문산 성심병원에 입원중이다. 한편 이 충돌현장을 취재하던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사진기자는 미군에게 사진필 름을 뺐겼다. 〈김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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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