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3년 전인 1978년, 2회를 맞은 < MBC 대학가요제 >에는 흰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은 한 여학생이 나왔다. 차림부터 딴 출연자와 달랐던 그는 피아노 앞에 다소곳이 앉아 사뭇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명지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라는 그 여학생의 이름은 심민경이었고 그의 출전 곡은 트로트 기운이 완연한 「그때 그 사람」이었다.
대학가요제가 최고의 인기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던 터라 많은 젊은 층 시청자들의 눈이 TV에 쏠려있었고, 그들은 캠퍼스 밴드나 통기타 가수들 가운데 누가 수상할 것인가를 비상한 관심 속에 지켜보았다. 록이나 포크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심민경의 「그때 그 사람」을 의아해 했다. 어떻게 트로트로 대학가요제에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큰 상을 받지 못하고 입상에 만족해야 했다.
시청자들은 하지만 대학가요제의 주류와는 색깔이 판이했던 그 노래와 가수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했다. 당장 다음날 전국의 대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 노래 참 특이했다’고 소곤거렸다. 새 천년의 ‘익스(Ex)’나 ‘이대 나온 여자’의 반향은 그것에 비해 턱도 안 되었다. 「그때 그 사람」은 순식간에 애창곡, 히트송으로 떠올라 있었다.
화제의 주역이 대상이나 금상 수상자가 아니라 심민경이었다는 점은 특기할 사항이었지만, 전파나 종이매체의 뉴스는 되지 못했다. 심민경에 집중된 대중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는 그가 대학가요제 직후 바로 당시로는 거액인 200만원을 받고 지구레코드사와 음반계약을 체결한 것에 알 수 있다. 그의 이름은 곧 심수봉으로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심수봉센세이션’의 모든 것이 물밑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명백히 그 노래가 다수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언론을 통해 호응과 관심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화려한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아니라 가려진 뒤편에서 그 존재의 중력이 불어난 것이다. 이 점에서 ‘물밑’과 ‘뒤편’은 심수봉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들이다.
심수봉은 스타에게 주어지는 카메라의 플래시, 오빠부대나 언니부대와 같은 팬들의 환호와 아우성이 없었다. 방송 순위차트, 연말 10대 가수나 가수왕 같은 포상과도 거리가 멀었다. 언제나 외톨이에 주류의 한복판에서 멀찍이 떨어진 ‘국외자’ 아니 ‘소외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의 노래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에 난 몰라」 「미워요」 「비나리」 「백만송이 장미」 등 발표될 때마다 대중들의 물밑 사랑을 만끽했다. 외형적 히트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삼천만의 가요’가 되곤 했던 것이다.
바로 이게 트로트음악의 힘 아닐까. 이제는 저학력과 빈곤, 때로는 천박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트로트이지만 거기에 실제 삶과 사랑을 연상시키는 리얼리즘이 곁들여질 경우, 어느 음악보다도 강한 생명력과 파괴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사람」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어른들은 물론이고 얼핏 소비층이 아닐 것 같은 여대생들도 좋아했다. 노영심이 쓰고 이문세가 부른 2002년의 곡「내 사랑 심수봉」이 실증한다.
이 곡에서 노영심은
‘…하루에도/ 몇 번은 그 속에 빠져/ 마치 내 얘긴 듯 심각했지만/ 왠지 내 인생 그 언제부턴가/ 난 그녀 노래와 인연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라는 고백조의 노랫말을 붙였다. 이문세 역시 음반 후기에
“지금까지 묘(?)한 느낌, 신비한 느낌으로 우리 문화를 지켜주고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대학문화와 성인문화의 연결고리를 자연스레 만들어준 사람! 심수봉여사를 난 사랑한다.”고 썼다.
이문세가 말하는 그 묘함은 바로 ‘신비’였다. 무수한 스타가 명멸했지만 우리 가요계에 신비감과 직결시킬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 물밑과 뒤편 그리고 은거(隱居)의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는 심수봉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예민하고 또한 가슴 아프다. 그 신비가 축적되는 데는 기구한 인생역정이 큰 몫을 했기 때문이다.
음반계약 이후 1979년에 정식 앨범을 발표해 「그때 그 사람」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그토록 열망했던 스타덤 행진이 탄탄대로처럼 보였던 시점에, 청천벽력의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 시해사건. 그날 궁정동 안가 회식에 참석하면서 심수봉은 관련인물로 보안사의 취조를 당하고 군사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공식 가수활동은 그걸로 끝이었다.
1981년 신군부의 5공화국이 탄생되었을 때, 다시 관련인물이라는 이유로 방송출연을 금지당하는 ‘확인사살’을 당했다. 노래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 NHK가 일본가수들과 합동공연을 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해외출국이 허락되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작곡활동이 전부였다. 1983년에 작곡한 드라마 주제곡 「순자의 가을」은 하필 영부인의 이름과 같은 통에 나중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가 부른 것처럼 「올 가을엔 사랑할꺼야」로 제목이 둔갑하는 촌극도 빚어졌다.
‘록의 대부’ 신중현이 그랬듯 심수봉도 정치 상황의 피해자, 희생자였던 것이다. 대중들은 심수봉을 볼 수 없었기에 더욱 그의 노래를 학수고대했다. 신비감은 필연적이었다. 그 신비감 때문에도 방송금지의 족쇄가 풀린 84년에 공개된 곡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한을 토해내듯 폭발했다. 사람들은 마지막 가사 ‘남자는 다 그래’를 응용해 ‘여자는 더 그래’를 시정의 유행어로 만들 정도로 남녀 이야기에 푹 빠졌다.
정치적 사건에 얽힌 역정에서 신비감이 부분적으로 빚어졌다는 이러한 일반의 시각에 당사자 심수봉은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가수는 음악으로 평가받아야지, 누구에게 또는 어떤 사건에 기대서 이름은 높이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런 시각이 존재한다면 저로서는 억울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10.26 대통령시해사건이 자신을 짓누른 무시무시한 짐이었다면서 이제는 훌훌 털어 내버리겠다고 누누이 강조해오고 있다. 새천년 들어와선 무대 활동의 빈도가 더욱 높아졌다.
심수봉노래의 미학은 절묘하고 리얼한 노랫말에 있다.
‘커다란 어깨 위에 기대고 싶은 꿈을/ 당신은 깨지 말아요/ 이 날을 언제나 기다렸어요/ 서러운 세월만큼 안아 주세요…’ 하는 「사랑밖에 난 몰라」든
‘남자는 남자는 다/ 모두 다 그렇게 다/ 이별의 눈물을 보이고 돌아서는 잊어버리는/ 남자는 다 그래…’하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꺼내지 못하지만 사석이나 술자리에서는 모두 다 끄덕이는 공감을 창출한다. 실감나게 와 닿으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언어들. 그 경계에 있는 노랫말에 우리는 감탄을 감추지 못한다.
심수봉은 거창한 테마나 고매한 메시지가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의 정서 저변을 울리는 남녀 간의 이야기들에 집중한다. 스스로도 ‘남자는 나의 중요한 화두’라고 밝힌다. 하지만 심수봉의 노래에서 표현되는 남자는 연애나 성적 대상이 아니라 그 자신을 감싸주는 보호자를 의미한다. 어찌되었든 팬들은 거기서 운명적 사랑은 물론, 강한 성적 암시와 보호본능을 자극받는다. 나이 오십이 훨씬 넘었으면서 여전히 소녀처럼 청초하고 가녀린 심수봉의 외모도 거기에 한몫을 한다.
아마도 페미니즘 진영은 심수봉노래에 담긴 여성상이 남녀평등에 역행한다는 점을 싫어하겠지만 서민대중이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노래방에서 행여 누군가가 심수봉 레퍼토리를 선택해 마이크를 잡으면 일제히 환호를 보내고, 노래에 대한 그 사람의 안목을 인정하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했는가.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심수봉은 강하다. 가수에게 중요한 음색이나 호흡능력에 있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이다. 너무도 간드러지고 맛깔스럽게 노래한다. 성인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그 특징적 음색이 주는 매력에 이성을 잃는다. 호흡도 뛰어나 노래방에서 곡을 쉽게 여기고 덤빈 사람들은 조금 부르다가 쫒아가지 못해 숨을 허덕대기도 한다.
이것은 노래뿐 아니라 피아노 드럼 등 악기를 마스터해 터득한 리듬감각에 의한 것이다. 공연 중 그는 가는 드럼세트에 앉아 스틱을 두드리는 장면을 연출, 그저 그가 가수라고만 여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음악적 역량을 다지려는 욕구 또한 강렬해 지난 2002년에는 외국음악 습득을 위해 미국 뉴욕에 장기체류하기도 했다.
1997년에 발표된 「백만 송이 장미」는 불황이 시작된 시점에 2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바 있다.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는 베스트앨범도 초도 주문량 3만장이라는 기염을 토했고 판매차트 순위권에도 등장했다. 밖으로 드러난 인기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탓에 본인은 한사코 ‘난 전성기가 없었던 가수’라고 말하곤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가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심수봉의 인기는 트로트의 승리이자 대중의 개가이기도 하다. 매스컴에 의해, 기획에 의해 가수를 쫒아가는 것이 아닌, 노래가 좋아서 가사가 실감나서 솔직하게 자신의 감성을 따른 ‘보이지 않는 다수’가 바로 심수봉을 만들어낸 것이다. 심수봉도 대중들이 준 사랑, 그 고마움 안다. 음악으로 삶을 다해도 대중에게 진 빚을 다 갚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심수봉을 좋아하는 사람,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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