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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그만두면 남자들은 왜 수염을 기를까?
박원순. 정관용. 문재인. 스티브 잡스. 이들의 공통점, 수염.
박원순. 정관용. 문재인. 스티브 잡스. 세 명의 한국 사람들 사이에 스티브 잡스가 얼룩처럼 뜬금없이 느껴지는가?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네 명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소설 『콧수염』은 한 남자가 평생 기르던 자신의 콧수염을 깎으면서 시작된다. 단지 어느 날 아침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해줘야겠다는 한 남자의 엉뚱한 결심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콧수염을 깎는 행위는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평생 기른 수염을 깎았는데 말이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일부러 자신을 놀리기 위한 아내의 술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의 행동은 점점 더 기이해지고, 심지어 자신을 점점 반미치광이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스스로 믿고 있던 현실이 뒤틀리며 악몽이 되어 가던 바로 그 순간 그의 아내가 소리친다.
당신 원래, 콧수염 없었어!
콧수염과 서울시장 선거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것은 2011년 9월 7일자 신문에서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말이다.
사진 속에는 막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돌아온 중년의 털복숭이 남자가, 자신은 원치 않으나 이미 대권 후보로까지 올라선 한 남자와 어색한 웃음으로 포옹하고 있었다. 순박하게 생겼으나 여기저기 수염이 만발한 이 남자의 얼굴을 나는 멍하게 바라봤다. 긴 산행 탓인지 피부가 몹시 탄 남자의 얼굴은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지만, 나는 사진 속에서 어떤 결기와 함께 지독한 고단함을 보았다. 그리고 그 ‘고단함’과 ‘결기’의 상징 속엔 엄청난 양의 수염들이 있었다. 예상했다시피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박원순과 안철수였다.
순간, 나는 내가 보았던 수많은 사진들이 일렬로 내 눈 앞에 늘어서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내 머릿속은 그 모든 사진들의 조합들을 바라보며 일정한 질서를 찾아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모름지기 남자라면 아름다운 여자들의 사진에 예민한 법이고, 여자라면 이와 반대일 텐데, 머릿속에 떠오른 남자들의 사진은 모두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정글 같은 어딘가에서 막 돌아온 듯한 중년 남자들의 사진이었다.
지금부터 나열하는 네 남자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시길……
박원순. 정관용. 문재인. 스티브 잡스. 세 명의 한국 사람들 사이에 스티브 잡스가 얼룩처럼 뜬금없이 느껴지는가?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네 명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넷 다, 뭔가 대단히 큰 결심이 필요한 어떤 중대한 일을 겪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대부분 자신이 열심히 일했던 직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되거나, 심지어 ‘당장 나가라’는 통보받는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성실한 직장인일 때는 기르지 못했던 ‘그것’을 이들이 모두, 약속한 듯 기르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들 모두를 ‘수염의 공동체’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 맞다. 이들은 한때 날렵한 뺨과 인중을 가지고 있던 남자들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인 문재인이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가 기른 수염을 꽤나 유심히 바라봤었다. 시사평론가인 정관용이 자신이 진행하던 방송국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을 때도, 나는 어느 날 넥타이를 풀고,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실연을 당한 여자들이 자신의 머리 스타일을 극단적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모험으로 보였다.
남자들에게 수염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이 생긴 건 아마도 문재인과 정관용의 수염을 유심히 보게 된 즈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수염을 기르고 안 기르고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일 순 없지만, 만약 ‘직장인’이라면 그것이 도덕 이상의 법규처럼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는 또 한 가지 생각. 만약 박원순 시장이 수염을 자르지 않고 서울시장 출마를 감행했다면 어땠을까? 그는 ‘수염’을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표를 무성한 수염 개수보다 훨씬 더 많이 잃었을 것이다.
한 시사평론가는 그의 수염을 ‘표 나게 촌스러운’ 연출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던데, 어쩐지 나는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의 수염을 꼭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남자들의 수염에서 뭉클함을 느낀다. 이건 상당히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지만, 뭐랄까. 남자들의 수염에선 이상하게 산 속에서 부는 것 같은 바람 소리가 난다. 내게만 들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투표가 한참이던 그 날, 박원순 시장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미끈한 남자들의 턱과 인중에 수염을 갖다 붙이는 기이한 상상을 했다. 그렇게 보자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두 가지 부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염이 어울리는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 여러 명의 정치인과 경제학자, 방송인, 아나운서, 예술인 등등이 내 머릿속에서 마구 떠올랐다. 어린 애 장난 같은 그 상상은 바야흐로 투표율이 가파르게 치솟던 저녁 7시 즈음까지 지속됐다. “정치인들 중에 누가 콧수염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유를 마시고 있는 H에게 내가 물었다. (단언하지만 선거 방송을 보면서 맥주가 아닌 우유를 마시는 남자와 콧수염이 어울릴 리 없다)
“글쎄.”
“대답해봐.”
“잘 어울리는 것 같은 사람 말고, 제일 안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은 아홉 명쯤 있는데 한 명씩 말해줘?”
역시 H다운 대답이었다.
사실 내가 상상한 마지막 남자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만약 MB가 수염을 기른다면 어떨까, 라는.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엠마뉘엘 카레르> 저/<전미연> 역7,650원(10% + 5%)
1986년 프랑스에서 처음 발표되자마자 몽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특이한 작가로 일약 주목을 받으며 예상치 못한 대중적 호응을 얻으며 대성공을 거둔 『콧수염』은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기 시작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라는 아주 재미있어 보이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아내를 깜짝 놀래 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