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슈파운 없이는 슈베르트도 없었다?슈베르트는 학창 생활 내내 공책이며 휴지 할 것 없이 종이란 종이는 모조리 악보로 사용하며 창작 활동을 했다. 슈베르트 자신은 그런 순간을 행복해했지만, 이런 모습이 고지식한 선생님의 눈에는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작곡하거나 오선지 운운하면 이제 용돈은 없는 줄 알아라!”드디어 아버지는 슈베르트에게 작곡 금지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슈베르트는 용돈 쓰는 즐거움보다 돈줄 끊어지는 아픔을 택했다. 하지만 막상 용돈이 없다 보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그때그때 떠오르는 악상들을 정리할 오선지를 구할 수 없어 애를 태웠다.
“친구야,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그때 친구 슈파운이 그를 위로했다. 슈파운은 자신 또한 넉넉지 못한 형편이면서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슈베르트에게 오선지를 기꺼이 사주었다. 슈베르트의 재능을 믿고 있었기에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가까스로 교직 과정을 이수한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초등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열일곱이었던 슈베르트는 이미 <C장조의 교향곡>을 완성해놓았다. 그는 수업 중에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작곡에만 열중했다. 슈파운은 학교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는 슈베르트를 보며 안타까워하던 중에 휴가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슈파운은 슈베르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슈베르트를 떼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슈베르트도 같은 생각이었다. 슈파운은 돈 많은 친구 쇼벨의 집으로 슈베르트를 데리고 가서 작곡에만 전념하게 했다.
슈파운은 ‘슈베르티아데’라는 후원회를 만들어 슈베르트를 후원하는 데 앞장섰다. 슈베르티아데는 슈파운을 비롯한 동창생들과 시인, 가수, 화가, 문인 등에 이르기까지 슈베르트를 사랑하는 지식인과 예술인의 모임으로, 회원들은 가볍게 술을 마시며 음악과 토론을 벌였다. 슈베르트는 거의 매일 밤 슈베르티아데 모임에서 자기 작품을 연주했고 신작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슈베르트가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하기까지 무려 600여 곡에 이르는 많은 가곡을 썼다. 그가 보여준 음악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지만 이처럼 음악가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데에는 친구 슈파운의 도움이 무엇보다 컸다.
동창회에서 말하면 좋은 한마디영어 ‘프렌드friend’는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고대영어 freond에 어원을 두고 있다. 친구의 본래 의미는 ‘연인 같은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친구는 연인 못지않은 영혼의 동반자로서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정은 두 사람의 몸에 있는 하나의 영혼이다.”좋은 친구는 인생의 길에서 더없는 응원군이자 편안한 휴식처와 같기에 독일 작가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우정이란 슬픔을 나누고자 할 때 휴식처와 같다.”그렇지만 같은 영혼을 가진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에는 좋은 친구로 지내다가 (어느 누군가가) 점차 실망하여 우정에 대한 기대치가 서로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그리스 전기 작가 플루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함없는 친구는 얻기 힘들며 또한 귀한 것이다.”인간교우무상(人間交友無常)에 대해 로마 철학자 세네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은 많아도 친구는 없다.”허무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친구의 귀한 가치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말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