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섬』
1.
얼마 전 친구의 집에 들려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와 저는 학창시절에 거의 매일 붙어 다녔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 관계를 조금씩 변화시켰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하는 일이 너무나 달라서인지, 제 친구와 만나면 약간은 서먹서먹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도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저도 역시 저의 관심사를 진지하게 토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나서 함께 했던 추억만으로도 저와 친구는 행복했습니다. 사실 이런 행복감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활력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걸어왔던 아주 먼 길을 되돌아보는 기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드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친구를 다시 찾게 되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한잔 두잔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밤은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제게 자신의 공부방에 잠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뭐, 공부방이라고 해서 별다른 방은 아니고요.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 한 대, 책상과 의자, 전공 원서 몇 권과 함께 작은 CD 플레이어가 설치되어 있는 작은 책장, 이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 낯선 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이나 아니면 출판사 사람들이 자주 메일을 보내는 편이라서, 그것을 확인할 작정이었습니다. 예상대로 몇 개의 메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특히 그중에 한두 개는 답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키보드의 자판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습니다.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려고 할 때, 저는 이상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판 하나하나가 저의 손가락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키보드를 칠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판을 계속 두드리며 글을 완성해가면서 저는 계속 이상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의 키보드는 제 방에 있는 키보드, 제가 3년째 사용하고 있던 키보드와는 확연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마침내 저는 자판에 손을 떼고 키보드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키보드가 제게 던져준 낯섦과 이상한 거부감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생각은 낯섦과 마주칠 때 발생하는 법인가 봅니다.
친구의 키보드가 제게 낯설게 다가온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 키보드가 아니라 친구의 키보드였으니까요. ‘친구의 키보드’, 그것은 바로 친구에 의해 길든 키보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친구의 손과 팔, 그리고 전신의 근육, 친구가 앉았던 의자와 책상의 높이 등등, 그 많은 것들에 길들어 있는 것이 바로 친구의 키보드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저를 낯설게 만들었던 것은 키보드 자체가 아니라, 그 키보드에 묻어 있는 친구의 흔적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제 친구가 제 집에 들러 제가 치던 키보드를 두드렸다면, 그도 저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두드리는 키보드에는 저의 흔적들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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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키보드가 제게 낯설게 다가온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 키보드가 아니라 친구의 키보드였으니까요. | |
2. 키보드에 묻어 있는 흔적들, 저는 이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제 눈에는 저의 집에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키보드만 보일 뿐이지요. 단지 저는 이 흔적들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키보드가 아니라 바로 이 흔적들 아닐까요? 바로 이것들이 친구의 키보드를 제 키보드와 다른 것으로 만들어주는 계기니까 말이지요. 어쩌면 철학에서 가장 어렵다는 형이상학(metaphysic)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의 흔적을 숙고하는 학문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생각을 거듭하다가 저는 제 가방에 들어 있는 책 한 권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디알로그(Dialogues)』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라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의 흥미진진한 생각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중 제 뇌리를 스친 개념은 ‘배열’, ‘배치’, ‘합성’ 등을 의미하는 ‘아장스망(agencement)’라는 말이었지요. 서둘러 가방을 열고 그 개념이 들어 있는 부분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multiplicit?)다. (…) ‘인간’-‘동물’-‘제작된 도구’ 유형의 아장스망, 즉 인간-말-등자를 생각해보자. 기술자들은 등자가 기사(騎士)에게 옆 방향으로 안정성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군대조직, 즉 기병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 이 경우 인간과 동물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것이고, 전자나 후자는 모두 변화하게 된 것이다.”등자라는 용어가 조금 낯설지요? 이것은 말에 오르거나 말을 몰 때 발을 넣도록 만든, 말 옆구리에 줄로 메달아 놓은 쇠로 만든 도구입니다. 역사책을 보면 이 등자가 발명될 때까지, 전쟁은 주로 보병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등자가 없으면, 말을 타거나 몰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자가 발견되면서 인간은 양발을 안정적으로 고정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한 손에 창이나 칼을 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등자 때문에 보병으로 이루어진 전투가 기병으로 이루어진 전투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보병과 기병의 차이, 혹은 짐이나 나르던 말과 기병전투에 사용된 말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보병은 기본적으로 땅과 연결되어 있는, 혹은 땅에 익숙한 군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다리는 아주 강하고 굳건하겠지요. 반면 기병은 말과 연결되어 있는 군인입니다. 당연히 그의 다리는 승마에 익숙해져 발달했겠지요. 이처럼 군인은 동일한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연결되느냐 혹은 말에 연결되느냐에 따라, 그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변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런 변화는 말에게서 더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짐을 나르는 말과 전투에 참여하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짐을 나르는 말이 노새나 당나귀와 유사하다면, 전투에 참여하는 말은 오히려 사자나 호랑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전쟁에 사용되는 말은 자신이 태웠던 기병, 전진을 행해 돌격하던 힘 등등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병으로 활동하던 군인도 말을 타지 않았을 때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했던 흔적을 가지게 되겠지요.
3. 들뢰즈의 아장스망은 이렇게 말과 인간이 연결되어, 서로를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는 이 아장스망을 ‘다중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아장스망보다는 이 다중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이 글자를 한 번 부수어보도록 하지요. 다중체는 ‘많다’라는 뜻의 ‘멀티(multi)’라는 글자와 ‘주름’을 의미하는 ‘플리(pli)’라는 글자로 분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의 흥미를 끄는 글자는 바로 ‘플리’라는 글자입니다. 새로 산 옷을 입으면, 이 옷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주름이 생기지요. 이 주름들은 저 자신이나 혹은 외부로부터 받은 힘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주름은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름의 논리는 보병이나 기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보병의 강건한 다리 근육은 땅과의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플리’, 즉 ‘주름’이라고 할 수 있고, 기병의 다리 근육은 말과의 관계로부터 만들어진 ‘주름’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모든 것이 주름의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동차에 익숙한 우리들의 다리는 자동차로부터 유래한 ‘주름’을 가지고 있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현대인의 다리 근육은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무척 허약한 것 같습니다. 마침내 저는 제 친구의 키보드가 주던 이질감과 낯선 느낌의 유래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키보드는 제 친구와 연결되었던 아장스망, 혹은 다중체였던 것입니다. 키보드가 저를 낯설게 했던 것은 바로 그 키보드가 제 친구와의 관계로부터 발생한 주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키보드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주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모든 것들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 주름을 만든 것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낯섦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 그래서 설명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explication’에는 주름을 뜻하는 어근 ‘플리(pli)’가 있나 봅니다. 그러니까 설명은 ‘주름(pli)을 바깥으로(ex)으로 펼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겁니다. 반대로 ‘Implication’이란 단어의 의미도 알겠습니다. 그것은 ‘주름(pli)이 안으로(im=in)으로 접히는 작용’을 의미했던 겁니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타자와 만나서 새로운 주름을 접혀서 이루어진 겁니다. 제 친구와 같은 사람이든 혹은 키보드와 같은 사물이든 상관이 없을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에 아로새겨져 있는 주름을 펼쳐 보이는 겁니다. 갑자기 저는 어느새 많은 주름을 가지게 된 제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두 주름은 아마 제가 만든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주름들은 제가 모르는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어서 생긴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학창시절에 친했던 그 친구와 다시 만날 때 들었던 그 서먹서먹함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저와 잠시 헤어진 후 그가 관계했던 무엇인가가 만들어놓은 주름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제 친구는 학창시절, 공유했던 추억만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추억, 혹은 저와 제 친구가 만든 주름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니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졸음이 밀려왔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했나봅니다. 잠을 청하면서, 저는 조그만 각오 하나를 해보았습니다. 내일 아침 친구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의 보이지 않은 주름들을 생각해볼 작정이었습니다. 그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그 낯선 무엇에 대해, 그에게 주름을 마치 상처처럼 남겨놓은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낯선 것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최초로 말을 탔던 기병처럼, 혹은 최초로 인간을 태웠던 말처럼 말이지요. 낯선 친구의 주름을 끌어안고 견디어보아야겠습니다. 그래야 저는 그와 새로운 아장스망을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나 제 친구에게 새로운 주름, 소망스러운 주름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