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민족주의를 탐구했다.
1984년 말의 일이다. 고3 겨울방학이었다. 학력고사를 치른 뒤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다방이나 술집을 드나들며 어른 흉내를 내는 일도 슬슬 재미가 없어지자, 아버지의 서가를 기웃거렸다. 처음엔 이광수나 현진건, 염상섭, 채만식 등 식민지 치하 문인들의 작품을 담은 한국문학전집을 꺼내들었다. 뭔가 부족했다. ‘예비 대학생 폼’을 잡고 싶었다. 비판적 교양을 향한 일종의 허영심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방학을 맞아 내려온 네 살 터울 형에게 ‘근사한 사회과학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형이 아버지의 서가에서 꺼내온 것이 『송건호 평론집-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길사)였다.
지은이 송건호 선생은 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 자유언론실천운동에 관계되어 해직당한 분이다. 해방직후 정치상황과 지도자들을 소재로 민족주의의 실체에 관해 파고들었던 내용으로 기억난다. 고3으로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았다. 딱딱하게 서술된 탓에 술술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재미가 있었다. 내 상식을 거스르는 이야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그 중심에 있었다.
“뭐야, 나쁜 놈이었잖아!” 나쁜 놈. 그렇다. 예의 없지만, 솔직한 독후감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은 거기 없었다. 남북분단을 고착화한, 정치술수에 능한 노회한 독재자로 그려질 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 이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삐딱하게 보자면 ‘빨간 의식화’에 물든 셈이다. 1980년대는 이런 젊은이들 천지였다. <조선일보>가 1995년 1월부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을 연재하며 이승만을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띄운 건 그 빨간 물들을 씻으려는 노력이었다. 최근 한국방송이 방영하려다 반대에 부닥친 ‘이승만 다큐’도 그 연장선에 있다.
아버지의 신문스크랩 제1권을 장식한 대표인물도, 다름 아닌 이승만이다. 앞쪽에 큰 얼굴사진 한 장을 붙여 특별대우를 했다. 외국신문에서 오렸는지 ‘Dr. Syngman Rhe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영어설명이 달려있다.
아버지가 스크랩북 제1권을 작업하던 해는 1959년이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멈췄지만, 그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던 때다. 20여 쪽에 걸친 피난민과 전투, 폭격과 떼죽음 등 한국전쟁과 관련한 끔찍한 사진들이 그걸 말해준다.
10년 주기의 끄트머리에서, 다음 1960년대엔 좀 더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었으리라. 아버지에겐 이승만 대통령이 그 희망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1권 스크랩이 다 끝나기도 전에 기대는 물거품이 된다. 대신 그분의 정치적 최후가 다가온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민주당이 말하는 경찰선거대책”
“마산에서 군중소요- 지서에 불지르고 투석-2명 죽고 15명 부상”
“학생 데모로 중대사태- 이만 학생 경무대 앞서 유혈충돌”
“교수들 ‘제자 위령 데모’-이백여명이 궐기-‘학생의 피에 보답하자’고 행진”굵직한 신문 활자들이 부정선거를 암시하고 비상사태를 말해준다. 1960년3월15일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 박사는 4선에 성공한다. 어거지 승리였다. 스크랩북 제1권의 한가운데는 온통 데모 풍경들이다.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 곤봉으로 진압하는 경찰들.
‘부정선거에 분연히 일어선’ 학생들의 4.19데모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날이 1960년4월26일이다. 부통령에 당선했던 이기붕씨 부부와 두 아들이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 새벽이다. 이를 전하는 <조선일보>의 제목은 ‘저주도 회한도 앗아간 망령의 길’이다. 그 옆엔 ‘무너진 서대문 아성, 가재 부수고 태우고’라는 제하의 기사가 등장한다.
군중들이 자살한 부통령 이기붕의 집을 터는 장면을 취재해 묘사했다.
9시경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시민학생들은 9시20분경 이기붕씨 집에 뛰어들어 가재도구를 부수며 혹은 길가에 들어내어 불사르기 시작했다. 값진 호피며 서화, 골동품 등이 타는 불속에 던져졌으나 성조기가 나타나자 “미국깃발은 태우지 말라”고 외치며 학생들은 성조기를 취재중이던 미국인 기자에게 넘겨주었다. 처음 이기붕씨 집에 가재도구를 불태우기 시작할 무렵에는 혹은 가재도구를 절취해가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학생들에 의해서 저지되어 불속에 던져졌고 절취하려던 사람은 구타까지 당했다.
이때 출동한 군인들에 대해서 ‘데모’ 군중들은 만세소리로 맞았으며 ‘트럭’ 을 탄 군인들은 손을 흔들어 ‘데모’대에 화답하는 광경도 있었다. 이날 이씨 집에서 뜯어내온 몇 십 통의 수박 ‘메론’ 등 과일은 학생들이 모아가지고 적십자병원에 입원가료중인 4.19의 부상자들에 나누어줬으며 불태우기 시작한 지 세 시간이 경과한 낮 12시까지도 그 집안에 있는 물건들은 그치지 않고 계속 끌어내어져 대로에 나와 불더미 속에 던져져 재로 화하고 있다.
이기붕씨 집에 불을 지르지 않고 물건을 꺼내다 불지르는 것은 집에 불나면 옆에 집이 연소될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인데, 백화점의 진열장을 합해도 이보다 물건이 적다고들 흥분하는 군중들은 값진 패물이 불속에 뛰어들 때마다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이기붕씨 집 근처에는 경관이나 군인들의 자태는 보이지 않았고 그 가족들도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한편 이씨집 창고에 들었던 쌀과 밀가루 설탕 등 40가마를 끄집어내어 바로 옆의 적십자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부상자들의 구호식량으로 나르기에 바빴다. 집안의 물건들은 계속 끌어내어져 연소 중… 털어도 털어도 계속 나오는 패물과 가재도구는 부정축재 권력의 벗겨진 몰골이다. 시민들이 성조기를 발견하자 미국인 기자에게 넘겨주는 대목에선 웃음이 터진다. 마치 미국이 군함을 몰고 와 자신들을 도와줄 거라 착각하던 80년 5월광주의 시민들을 연상케 한다.
하루 뒤엔 이승만 박사 부부가 허정 내각수반의 주선으로 망명 길에 오른다. 김포공항에서 하와이행 비행기를 탄다. 스크랩북 1권의 마지막 부분이다. 사진속의 부부는 호눌놀루의 한 교회에 참석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그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다시는 살아생전에 금수강산에 돌아오지 못했다. 각 신문들의 만평을 모은 스크랩도 눈에 띈다. 그중 동아일보 만평에 적힌 대사가 센스 있다.
“푸란체스카, 내일 아침이면 ‘호노루루’에서 ‘커피’를 먹게 될 거야.”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는다”던 평소의 허풍을 비꼬았다.
스크랩북을 이쯤 들추다보니, 작은 연민의 감정이 피어난다. 여든다섯의 나이에 조국에서 쫓겨났으니 마음이 얼마나 허허로웠을까. 사람들이 독재자라고 욕을 퍼부은 노인이지만, 오랫동안 손가락질하면서 정도 들었다.^^ 에누리 없이 까칠한 시각으로만 일관할 일이 아니다. 좋은 점은 좋다고 인정하면서 한 인간의 전체상을 더듬어 봐도 나쁘지 않으리라. ‘배울 점’을 헤아려본다. 내가 만약 ‘이승만 다큐’의 제작자라면 다음 세 가지를 ‘미화’하겠다.
첫째, 대중과의 소통 기술이다.그는 연설문을 직접 썼다고 한다. 약간 떨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도 호소력 있었지만, 무엇보다 연설문 내용이 쉽고 재밌었다고 한다. 서민 눈높이에서, 귀에 쏙쏙 들어오고 마음을 움직이는 ‘구어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식 연설문은 명연설로 꼽히며 화술학의 관점에서 분석되기도 한다. 이에 비견할 만한 역대 대통령은 노무현이 아닐까 싶다) 한글도 가급적 소리 나는 대로 쓰자고 했을 정도다. 요즘 높은 분들의 연설문은 얼마나 뻣뻣하고 지루한가. 손수 쓰는 경우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이승만처럼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연설문 쓰기 노하우를 담은 책을 기획해 봐도 좋겠다.
둘째, 로맨티스트로서의 감성이다.1933년 국제연맹 회의차 들른 스위스 제네바에서 서른 세 살의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에게 ‘작업’을 걸어 결혼에 골인했다. 환갑을 바라볼 때였다.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주의에 순응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살아갈 후손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선구적 다문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책임 있는 동물사랑도 실천했다. 하와이로 급히 떠난 뒤 이화장에 홀로 남은 개 ‘해피’를 끝내 불러들였다고 한다. 국제결혼을 백안시하거나 동물학대를 하는 이들에게 귀감이다.
셋째, ‘밀당’ 능력이다.영어에 능숙했고 미국식 가치관에 익숙한 친미주의자였지만, 미국 말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적’이었다. 소신대로 북진통일을 일관되게 주창했고(평화통일론자 조봉암은 사형시키고), 미국의 방침을 거슬러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정면승부수를 띄웠다. 우파 학자들은 이 조치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도록 미국을 압박함으로써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았다고 주장한다. 일본과 외교교섭을 거부하며 일본 어선을 나포한 적도 있다.
“외교에는 귀신”소리가 괜히 나오지 않았다.
“내정에는 병신,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말까지 패키지로 들어 아쉽긴 했지만. ‘밀당’(밀고당기기)의 정치력을 발휘해 사회생활에서 성공해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승만의 외교술을 참고해볼만 하다.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망명 5년 만에 숨을 거둔다. 1965년 6월19일이다. 스크랩북 제4권에 등장한다. 향년 90세였다. 아버지는 두 쪽에 걸쳐 신문기사를 붙여놨다.
제목이 큼지막하다. ‘위대한 독립의 거성-이승만 박사 서거.’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런 말을 해드리고 싶다.
많이 슬프셨죠? 저는 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리라 추정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였을 겁니다. 아버지도 이승만처럼 기독교 신자였으니까요. 해방 직후 기독교계에서도 전폭적으로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대잖아요.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에서 만난 토마스 윌슨 교수(나중에 미국 28대 대통령이 됨)에게 배려를 받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도 대학 때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았고요. 그때 형성한 가치관은 평생을 갔겠지요. 1987년 대통령 선거 때가 생각나는군요. 대학생이던 저는 고향에 내려가 은근히 특정후보에게 투표하도록 부모님께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하셨죠. 분명히 김영삼 후보에게 한 표를 던졌을 겁니다. 그가 개신교 장로였으니까요. 안타깝게도 노태우 후보가 당선했습니다. 5년 뒤인 1992년 12월 다음 선거에서 기어코 김영삼 후보가 당선했지요. 당신은 투표도 못하고 병석에 누워계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하늘나라에 가셨고요. 서거 기사 옆에는 당시 동아일보의 유명한 4컷 만화였던 ‘고바우 영감’이 나온다. 만화주인공 머릿속에서는 ‘이승만의 공(功)과 과(過)’가 엎치락 뒤치락 격투를 벌인다.
반세기 가까이 흘러도 변함없이 계속될 공과 논란을 정확히 예언했다. 아버지가 볼펜글씨로 남긴 시도 보인다. 꼭 당신 스스로를 위한 글 같다.
고독한 세월도 시공의 역사도 떠가는 구름과 같습니다.
권력도 영화도 꽃잎처럼 철지나 시들었습니다.
다만 인생이 우주와 더불어 해약됐을 뿐입니다.
슬픕니다. 그것은 비극이 아닙니다.참고한 책
『우남 이승만 연구』(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2005)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상?하』(이한우 지음, 조선일보사, 1995)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인물로 읽는 한국사10』(이이화 지음, 김영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