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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소셜맥거핀]‘표준시민’의 탄생

‘역동적 중립주의’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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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우병 촛불은 심하게 말해 ‘서울만의 촛불’이라 할 정도로 지역 시민들의 참여와 개입수위가 상대적으로 매우 저조했다. “강남좌파”라는 유행어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은 현상으로 보인다.

*소셜 맥거핀?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왜곡하는 사이비 적대를 의미한다. 사이비 적대는 무지한 대중을 향한 여론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단순히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몽된 대중’이 즉각적으로 체험하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심지어 스스로 재구성하는 ‘과잉의 현실(hyper reality)’이다.


‘상식 대 몰상식’의 대결은 과거 ‘민주주의 대 군부독재’의 그것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났다. 운동의 대상, 방식, 그리고 주도세력이 달랐다. 한 마디로 시대가 달랐다. 그런데 결정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 담론의 형식, 또는 사유의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측면인데, 실은 이를 논하지 않고서 표준시민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표준시민의 본질을 꿰뚫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표준시민의 ‘역동적 중립주의(dynamic neutralism)’라 부르고 싶다.

 

2002년 개봉한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은 이러한 사유 형태를 간결하고 절묘한 대사로 표현하고 있다. 극중 연극배우 경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이 문장은 영화가 개봉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우리시대의 관용구가 되었다. 이 하나의 문장이 건드리는 감수성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는 얘기다. 먼저 표층의미의 차원에서 읽을 때, 이것은 진정성(authenticity)의 고백이 된다. “사람 되긴 힘들어도”에서 사람이 가리키는 것은 생물학적 인간, 종(種)으로서 인간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완성된 자아(自我), ‘품위 있는 인간’이다. “괴물”은 그런 이상적 인간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존재다. 사악하고 비열하며 파렴치한 인간말종, 인간실격의 존재다. 그러므로 저 문장을 더 쉽게 풀어쓰면 “비록 훌륭한 사람은 못되더라도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그 자체로 좋은 이야기이지만, 사실 저 문장의 심층의미는 그런 게 아니다. 저기서 “괴물”은 일종의 알리바이이다. 내심은 ‘굳이 힘들게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말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윤리적 마지노선을 요구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 말이 기능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오히려 “내가 비록 인간 같지 않은 짓을 하고 있지만 최소한 괴물만 아니면 괜찮은 거지”라는 식의 은밀한 도덕적 위안을 안겨주는 것이다. (박권일, 2008년 4월 1일, ‘동물은 속물의 미래다’, 『시사IN』 29호)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2009)』에서 홍상수 영화의 바로 저 대사를 인용하며 그 “감수성이 386세대적인” 이유가 “386 세대가 자신들의 청춘이 끝나고 도래한 새로운 시대 속에서 공통으로 체험하는 어떤 세계감정을 예리하게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80년대의 언젠가 한때 자신들 역시 역사와 대면했던 인간이었지만, 이제 다시는 그러한 인간이 될 수 없으며,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시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다소 우울하게 냉소하고 있는 것이다(김홍중,2009:52)”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속물적 태도는 특정 세대의 고유한 감수성이 아니라 계급적 처지에서 비롯한 집단 감수성이다. 속물성은 윤리적 압력과 개인의 욕망 사이의 긴장에서 출현하는데 그 위태로운 균형감각, ‘최소한 ~만 아니면 괜찮다’는 식의 태도는 일제 강점기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의 삶을 들여다보아도 금방 발견할 수 있는 자기위안의 서사인 것이다. 내가 착취당하는 현실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발하지만 내가 남을 착취하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모순, 그 모순적 태도야말로 착취하면서 동시에 착취당하는 ‘양가적 계급’, 다시 말해 중간계급의 세계인식과 공진(共振)할 수밖에 없다. 즉, 속물성은 중간계급의 유물론적 위치와 상동성을 지닌, 중간계급적 감수성이다.

만약 그것이 386세대의 감수성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386세대가 중간계급이 되었기 때문이지 원래 386세대의 감수성이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김홍중은 계급적 세계인식을 세대적 세계인식으로 전치시켜서, 속물성을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영웅적 세대의 멜랑콜리한 감수성’으로 해석하고 있다(“묘한 서글픔”“우울”“냉소”). 그 멜랑콜리가 ‘치열한 청년세대’라는 사회적 표상을 오직 386세대만의 것으로 영원히 방부(防腐)처리해 버리는 장치의 하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386세대 특유의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징후적 사례라 하겠다.

지난 수십 년간 ‘사표(死票)’ 논리를 통해 진보정당의 성장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아온 소위 ‘비판적 지지론’ 역시, 결국 최악(한나라당)을 피하자는 논리이고 “최소한 괴물은 되지 말자”는 논리와 완전히 동일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표준시민은커녕 아직 ‘넥타이부대’도 등장하기 이전인 시대에도 비판적 지지론은 기승을 부렸다. 안티조선운동의 ‘상식 대 몰상식’ 구도가,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대 군부독재’의 구도와 사실상 동일한 형식의 담론체계이자 세계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바로 진보에 대한 최소주의적 태도이다. 최소한 괴물은 되지 말자, 최소한 조선일보는 보지 말자, 최소한 군부독재는 벗어나자, 최소한 한나라당은 찍지 말자…. 소위 민주화운동세력이 정작 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중간계급의 속물성, 진보에 대한 최소주의적 태도의 현실적 표현형이 바로 ‘역동적 중립주의’이다. 역동적 중립주의는 특수한 시민의식을 전제한다. 시민들 스스로 선수(a player)가 아니라 심판(referees)을 자임한다는 것. 그래서 이익집단, 정치세력과 같은 ‘선수’들의 갈등이 지나치게 과열되거나 사회에 해가 된다고 판단할 경우 시민들이 투기장에 직접 개입해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 주장은 이익집단의 일원으로서 또는 정치세력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요컨대 특정 이념의 지지자가 아닌 ‘중립적 시민’으로서 내는 목소리다. 2002년 촛불 당시 이런 경향이 거의 처음으로 가시화됐다. 소위 ‘일반시민’과 ‘운동권’이 대오에서 깃발의 처리를 놓고 논쟁(이른바 ‘깃발논쟁’)을 벌였고, 이때부터 운동권은 광장의 주도권을 쎽민들에게 내어주게 된다.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광장이 당파적 공간이 아니라 중립적 공간이어야 함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민주체의 형성과정과 시민들의 실제 발언을 살펴보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19세기적 중성권력(neutrale Gewalt)”(슈미트, 2010:8, 『정치신학』, 그린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큼 중립성에 집착했고 당파성에 적대적이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당시 이런 ‘중립시민’의 특성은 더욱 강력해졌다. 공히 자신의 계급성을 전면에 드러내길 여전히 꺼린다는 점에서 근대적 시민주체라 규정하기 곤란한 측면이 있지만 어쨌든 2000년대의 시민들이 공공선(公共善)을 위해 끊임없이 광장에 모였고, 워낙 우경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직접행동이 현실을 진전시켜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립주의” 앞에 “역동적”이 붙은 건 그래서다. 오늘날의 시민주체가 1987년 광장의 시민들과 공유하는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 역동적 중립주의이다. 계급정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오류이고 왜곡이겠으나, 역동적 중립주의는 어쨌든 한국사회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시민의식이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개념일 뿐 아니라 역사적 실체인 것이다.

반면 1987년과 가장 달라진 점은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그리고 심화된 수도권 중심주의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란 인쇄매체와 인터넷에 대한 이해와 활용능력을 뜻한다.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벌어질 때 마다 여실히 드러나지만, 이제 집회는 미디어의 활용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미디어를 단순히 이해하고 활용하는 걸 넘어서서 시민들이 스스로 미디어가 되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최근으로 올수록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시민들의 직접행동이 서울과 수도권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또렷해졌다.

2008년 광우병 촛불은 심하게 말해 ‘서울만의 촛불’이라 할 정도로 지역 시민들의 참여와 개입수위가 상대적으로 매우 저조했다. “강남좌파”라는 유행어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은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표준시민에 대한 (현 시점에서) 구체적 정의를 내려보자. 표준시민은 과연 누구인가? 표준시민은 ‘수도권에 거주하며 시민의식과 미디어 리터러시를 갖춘 중간계급’이다. 시민의식(역동적 중립주의)과 미디어 리터러시를 합하면, 오늘날의 의미에서 ‘교양’에 가까워진다. 즉, ‘수도권에 사는 교양 있는 중산층’이 바로 표준시민인 셈이다.

이로써 음모론적 주체의 세 가지 특징, ‘등가교환의 쾌락원리’ ‘진정성 넘치는 냉소주의’ ‘역동적 중립주의’에 대한 설명이 일단락되었다. 주체의 특징을 일별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현실의 사건들을 놓고 논의를 전개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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