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MBC 스페셜 < 나는 록의 전설이다 >를 통해 1980년대 헤비메탈을 이끌었던 록 그룹들이 집중조명됐는데요. 특히 < 나는 가수다 >를 통해 슈퍼스타로 발돋움한 임재범의 과거 시절은 큰 화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임재범이 1980년대 중반 ‘록의 대부’ 신중현의 아들이자 명 기타리스트인 신대철과 함께 만든 시나위의 전설적인 데뷔 앨범 < 크게 라디오를 켜고 >를 소개합니다.
시나위 < 크게 라디오를 켜고 >(1986)
1986년 3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곡을 듣고 대한민국의 록 애호가들은 우리나라 말로 울려 퍼진 모처럼의 헤비한 음악에 일대 충격을 받는다. 육중한 베이스와 드러밍에 맞춰 디스토션 걸린 기타 사운드가 전개되고, 곧이어 허스키한 음성의 고음역 보컬이 폭발했다. 사운드 면에서는 어딘지 어색한 점이 있었지만 틀림없는 헤비메탈이었다.
외국어로 된 메탈음악만 들어오던 국내의 헤비메탈 마니아들을 흥분 시켰던 이곡은 「크게 라디오를 켜고」였고, 주인공은 기타리스트 신대철이 이끄는 우리나라 본격 헤비메탈 밴드인 시나위였다. 당시 만해도 우리나라에서 헤비메탈은 과격한 메시지에다 사운드도 소란스러워 청소년의 정서에 유해하다는 이유로 전파를 타기 어려웠고, 소량 발매된 앨범들도 주요 수록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AFKN라디오와 빽판(불법복사판)을 통해 서서히 전파되던 강철 사운드의 이 음악장르는 강력한 중독성으로 빠른 시간동안 수많은 마니아들을 양성해냈으며, 헤비메탈 앨범을 수십 장(많게는 수백 장)을 보유한 중금속 음악 애호가들은 어느덧 우리나라말로 불려진 ‘메이드 인 코리아’ 메탈을 원하고 있었다.
시나위와 이들의 데뷔앨범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단번에 충족시켰다. 순수 우리나라말로 된 시나위(남도의 무악)라는 그룹명은 물론이요, 한국적인 음색의 걸쭉한 보컬 그리고 연주곡을 제외한 전곡의 가사가 훈민정음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팬들은 외국산 메탈과의 비교를 떠나 ‘이제는 우리도!’ 하며 뿌듯해 했다.
기타리스트 신대철이 한국 록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신중현의 아들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했다. 한국에 록을 중흥시켰던 아버지에 이어 그 아들이 강성음악을 외면하던 대한민국에 헤비메탈을 장착시키는 선교사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국내 FM전파를 타고 처음으로 울려 퍼졌던 미드템포의 호쾌한 헤비메탈 찬가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그동안 굶주린 메탈 팬들의 욕구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상큼한 가요의 숲을 헤치고 FM 인기순위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앨범의 다른 수록 곡들도 처지지 않았다. 그로울링에 가까운 허스키 보이스가 돋보이는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드라이브감 넘치는 로큰롤 찬가 「젊음의 로큰롤」과 「하루해 떠가고」, 마이클 셍커(Michael Schenker)를 방불케 하는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표현력을 느낄 수 있는 연주음악「1월(January)」, 변화무쌍한 전개가 일품인 「아틸란티스의 꿈」 등 8곡의 수록곡들이 고른 완성도를 자랑했다.
하지만 앨범에서 메탈 마니아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곡은 단연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였다. 비장한 아르페지오로 시작하여 임재범의 굵은 목소리가 애절하게 전개되다 육중한 헤비사운드가 처절하게 폭발하는 이곡은 블랙홀의 「깊은 밤의 서정 곡」, 부활의 「희야」등과 함께 우리나라 헤비메탈 애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탈 발라드로 자리 잡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음반은 당시 해외 헤비메탈 음반을 접한 마니아들을 100%만족시켜줄 만한 음악을 담고 있지는 못했다. 기타솔로와 보컬이 다른 연주에 묻히고 마는 등 엔지니어링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연주 역시 뛰어났지만 당시 해외의 메탈 밴드의 그것에 비교한다면 ‘특출’이라는 감탄을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 앨범의 의의가 ?감될 수는 없었다. 전문 엔지니어의 부재와 냉대 속에서 자라온 짧고 황폐한 록 문화, 규제로 인한 창작력의 제한 등 당시의 음악환경을 감안한다면 가히 놀라운 성과였다.
시나위는 보컬리스트 김종서와 불세출의 메탈 드러머 김민기를 불려 들여 다음 작품 를 완성해 그것을 ‘한국 헤비메탈의 대표명반’으로 승격시켰으며, 이후에도 십수년 간 멤버들을 적절히 배치시켜가며 「겨울비」, 「해랑사」, 「은퇴선언」 등의 (숨은) 명곡들을 배출, 한국 메탈의 국가대표로 군림하게 된다.
본 작품과 시나위는 동시대에 활약했던 부활, 백두산, 작은 하늘 등과 함께 헤비메탈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냈고, 많은 후배밴드들을 분화시키며 헤비메탈을 충분히 국내시장에 지분을 점할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대철, 김종서, 임재범, 김바다, 손성훈, 김민기 (그리고 서태지?) 등을 배출하는 ‘메탈 인재양성소’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렇지만 과감한 시도와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나위는 미국, 영국처럼 헤비메탈이 오버그라운드의 안방소리로까지 격상시키진 못했다. 한국 록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부친 신중현이 당시의 시대적 제약과 음해로 주류 격상이 차단된 것처럼, 한국 메탈의 횃불로 불린 아들 신대철 또한 매스컴과 제작자들의 냉대에 부딪혀 헤비메탈을 한국인들이 거리낌 없이 노래방에서 부르도록 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한국 록의 비극적 대물림이었다.
글 / 윤석진(fand@hitel.net)
제공: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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