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제대로 미안해 하기] 역사가 저지른 죄를 사죄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한홍구 교수 인터뷰 2
미운 놈 미워할 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금 누리고 사는 자들은 그들이 잘해서 그렇게 잘 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역사가 재밌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학자가 꿈이었습니다. 저희 친가가 대한민국에서 역사책을 가장 많이 낸 출판사를 했습니다. 일조각이란 출판사였죠. 역사학자로 자라기에 환경이 너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역사책은 적어도 제목이라도 보고 자랐으니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 그 당시엔 한국 현대사 전공자가 많지 않아서 80년대 후반부터 현대사 강의를 다녔습니다. ‘현대사 연구가’ 라는 직함을 달고 다녔지요. 그런데 어디 가서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든 첫 번째 받는 질문은 ‘김일성 진짜예요?’였습니다. 지금 북에 있는 저것은 마적이고 진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은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죠. 그런 식으로 일대 김일성, 이대 김일성 해서 4대 김일성까지 나왔다는 겁니다. 어쨌든 이북을 어떻게 보느냐가 당시 굉장히 큰 관심사였던 거죠. 그래서 저는 유학을 가서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 논문을 쓴 덕에 북한이 지금과 같은 가족 국가, 세습제 국가가 되어버린 단초는 알 수 있습니다. 항일 투쟁 시기의 기억이 그것을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경험을 빼놓고는 북한이란 나라의 정신사 형성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은 민족을 어마어마하게 내세웁니다. 김일성은 중국 감옥에도 갇혔고 소련 감옥에도 갇혀봤습니다. 그래서 중국, 소련, 조선의 이익이 부딪혔을 때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굉장히 민감했습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
김일성은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였죠. 그리고 북한에서 2대 3대 세습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이북 엘리트 형성 과정에 있습니다. 뒷날 북한의 진짜 핵심 엘리트가 된 사람들 중 상당수는 8살, 9살, 10살 애들이었을 때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 애들을 데려다가 김일성이 팔베개를 해서 재웠습니다. 그야말로 품안에서 재웠습니다. 전투가 있어서 산으로 도망칠 땐 병아리처럼 옆구리에 하나씩 차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가장 모범적인 인간형은 ‘어버이 수령님의 가르침 외에는 그 어떤 잡사상도 알지 못하는...’이란 구절로 시작합니다. 김일성이 전투 중에 쉴 때 나뭇가지 꺾어서 땅에다 글자를 쓰면서 이게 ‘ㄱ’ 여기다 ‘ㅣ’를 그리고 이렇게 ‘ㅁ’을 그리면 이것이 ‘김’자가 되고 이렇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ㅣ’를 붙이면 ‘이’자가 된다. 나는 김씨고 너는 이씨다. 네 이름은 이렇게 쓴다고 글자를 가르쳤습니다. 그때 나뭇가지 꺾어서 가르친 사람들이 후에 북의 엘리트가 되었습니다. 이것만 보면 뭉클합니다만 나중에 이 사람들이 만경대 혁명 학원 원장이 된다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죠. 북한이 근대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이 이야기는 옛날에 그랬었다, 정도로 그치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은 그야말로 육친의 뜨거운 정을 보여준 어버이 수령으로 자리 잡는 겁니다. 한국의 민족 해방 운동 세력 중에서 교육이나 근대 문명의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상당수가 김일성에게서 직접 글을 배운) 유격대원들이 나중에 이북의 국가 지도자 엘리트가 되었다는 것은 이후 이북의 정치문화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제가 그렇게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99년이 되니까 김일성은 세상을 떠났고 통일 운동은 80년대와 비교도 되지 않게 늘어났습니다. 그 무렵 한겨레 21에 ‘미안해요 베트남’이란 캠페인이 벌어졌습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가 알려진 거죠. 제가 다섯 살 무렵 베트남전이 있었는데 저는 당시 맹호 부대, 청룡 부대란 이름을 알고 있었고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골목을 뛰어 다녔습니다. 까만 친구들을 베트콩이라 놀렸고 월남전 무용담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내가 들었던 무용담이 민간인 학살이었을 수도 있구나! 베트남전 진실 위원회 활동을 시작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에게 사과하라고 하고 배상하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베트남에 우리는 제대로 사과를 하고 있는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민족주의 논리대로 해도 우리가 일본에게 제대로 사과 받으려면 우리도 사과해야 하는 것이고 보편적 입장에서 봐도 내가 하는 학살이나 남이 하는 학살이나 다 같이 막아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재일 재중 재미 교포들이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사는 화교를 보면 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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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강풀이란 만화가가 5.18 광주민주항쟁 26년 후 그 피해자 가족이 전두환을 암살하는 내용을 다룬 『26년』이란 만화를 인터넷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요. 내가 대한민국 과거사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인데도 덜덜 떨려서 끝까지 보질 못했습니다. 분명히 처벌과 보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떵떵거리는 사회에서, 사회가 처벌하는데 실패한 사회에서 피해자의 자식들이 개인적으로 보복을 할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대표적인 간첩 조작 사건으로 80년대 최대 간첩 사건인 송씨 일가 사건이란 게 있습니다. 북한 고위 간부인 송창섭이 여덟 번 남파해 28명의 가족? 접선해서 간첩 활동을 해왔다는 건데요. 그 사건으로 송씨 일가는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사건을 조사하는데 자료는 넘어오지 않고 급한 마음에 피해자들을 먼저 만나기로 했습니다. 주범으로 몰린 분 연락처를 알게 되었는데요. 같이 일하는 분에게 연락되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오늘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아뿔싸 싶었지요. 그래서 상가에 갔습니다. 그 자리에 피해자 중 한명이 와 있다가 자기는 다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형이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문한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대면서 이 사람은 용서했어? 이 사람은 용서했어? 이 사람은 용서했어? 하고 묻습니다. 그때마다 동생은 다 용서했어라고 다 용서했어라고 계속 대답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마디 했습니다.
“나 딱 한 놈만 용서 못하겠어.”
“누군데?”
“전두환.”
그 분이 나한테 ‘나 오늘 전두환 죽이러 갈 건데 한 교수 운전 좀 해주면 안될까? 망 좀 봐주면 안될까?’하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용서했어?”
“다 용서했어.”
이 말이 계속 생각납니다. 힘이 없어서 용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백, 사죄, 처벌, 진상 규명 많은 말들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화해와 용서를 말하지만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하면서 느꼈습니다. 적어도 가해자 편에 선 우리가 그 말을 꺼내면 안됩니다. 용서는 우리가 입 밖에 낼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지 그분들에게 용서를 하라고 하면 안됩니다. 제가 이런 사건들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은 진짜 화해를 원하는 사람들은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은 진짜 용서하고 싶어 합니다. 삶이 진짜 힘드니까요. 그런데 와서 사과를 해야 용서를 하지요. 형식적으로라도 제발 와서 용서해달라고 하길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제 아무리 화해를 원해도 화해를 구걸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화해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피해자, 가해자, 제 3자가 있습니다. 제3자엔 구경꾼, 방관자, 몰랐던 사람들이 있겠죠. 아마 제3자의 대부분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던 사람이겠죠. 정부가 말한 것이니 옳겠지, 신문에 난 것이니 맞겠지 하고 대충 생각한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구속기간 중 가족 면회 한번 하지 못하고 1975년 4월 9일 선고 18시간 만에 간첩 혐의로 여덞 명이 사형 당한 인혁당 사건을 조사하면서 국정원 조사관이랑 대구에 간 일이 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인혁당 사건 처형 현장인 서대문 형무소를 지나갔었습니다. 당시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사람 중에 하재완씨란 분이 계신데 처형당할 때 하재완씨 막내아들이 네 살이었습니다. 그 때 동네형들이 네 살짜리 아이를 나무 묶어 놓고 빨갱이 새끼라고 사형시키는 놀이를 했습니다. 목에 줄을 묶어 끌고 다녔고요. 그 동네 형들이 사실 뭘 얼마나 알고 그랬겠습니까? 당시 언론은 사형당한 사람들이 끝까지 적화통일을 바랬다는 조작된 정보를 흘렸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은 자신이 뭘 하는지 몰랐겠지요. 그 때는 몰랐다 치더라도 이제와서 사건이 조작되고 그 분들은 무죄라고 하는데 그 때 그 동네 형들과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 그 대구 골목 안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았을 뿐 우리는 모두 그 대구 골목에서 일어난 일의 새끼줄 한 끝을 잡고 있습니다. 당시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우표 딱지만한 크기라도 좋으니 기사를 실어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인혁당 피해 가족들의 기사를 실어준 신문은 없었습니다.
평화 운동을 하면서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함부로 화해를 말하지 말라!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화해와 평화를 말할 때 우리 맘엔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의도된 무관심, 보신, 체념, 냉소, 괜히 끼어들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평화를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하는 이 문제 앞에서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이 4백건입니다. 난수표도 권총도 암호문도 없는 간첩 사건이 전체 사건의 70, 80%입니다. 저는 그중 꼭 조사하고 싶은 열여섯 사건의 기록을 복사했는데 결국 우리가 건드려서 해결한건 네 건 뿐이었습니다. 그 네 건은 모두 조작 사실을 밝혔고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나머지 열 두건은 조사위 끝날 때 봉해놓고 나왔습니다. 누가 언제 다시 그 사건들을 조사할 수 있을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미안함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처음엔 전체 사건의 절반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도 못 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대한민국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진상 규명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뾽지 밝히는 것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대한민국이란 국가 안에서 국가와 개인이 개인과 개인이 사회와 개인이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았는지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국가의 대리인들이 저지른 범죄가 공개되고 피해자들의 고통이 제대로 알려져야 우리는 타인이 겪은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떵떵거리고 사는 사회에서 우리가 무슨 공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실 규명만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도 아닙니다. 트라우마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겪는 트라우마, 전쟁 트라우마, 요새 쌍용 자동차 노조원들이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이것들을 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흔히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저 사람이 전엔 좋았는데 월남 다녀와서 사람이 영 변해버려서 술주정뱅이 되었다. 그 사람은 전쟁 피해자인 것입니다. 블루 사이공이란 뮤지컬 대사에 이런 게 나옵니다. ‘그 때 김상사가 월남에서 쏜 총알은 그의 일생을 꿰뚫었다.’ 마산서 평화 운동 하는 김영만 선생님이란 분이 계신데 해병대의 전설인 짜빈동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살아난 참전 군인이었습니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는 참전군인 출신 평화운동가가 거의 없지요. 그 분이 부상입고 병원에 육 개월 입원했다가 퇴원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엄마가 과일 깎아 주면서 그러더랍니다. “영만아, 이제 니가 너 같다.” 그전엔 눈이 번들거려서 엄마조차도 제대로 눈을 못 맞췄다는 거죠. 80년 광주 5.18후 자살자 심리 분석에 대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소주 여섯 일곱 병 많게는 열병씩 혼자 마십니다. 그리곤 집에 돌아가 매일 매일 애 붙잡고 술주정합니다. 애 입장에서 보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게 지옥이지 지옥이 어디 딴 겁니까? 만약 여러분이 종로에서 군인이 한 여자를 마구 구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때리지 말라고 말렸던 사람이 몇 년 후엔 미친놈이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미친놈으로 살아가는 것이 5.18에 참여했다 살아남은 사람이 겪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오느라 한 번도 제대로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사 위원회 일을 하고 난 뒤에 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진짜 세보이더라.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이런 말을 하죠.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역사 속에서 정말 많이 봤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로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본인이 짊어져야하는 삶의 무게를 볼 때마다 다가가서 해줄 수 있는 게 위로뿐이란 것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이라도 던지고 싶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수백만부가 팔리면 무엇 합니까?
요새 우리나라에 인문학의 위기란 말을 많이 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백만 부가 팔렸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 책을 읽지 못했지만 아마 좋은 책이겠지요. 그렇지만 역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사죄하지 않는 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수백만부가 팔리면 무엇 합니까? 군인들이 여고생 대검으로 찌르는 걸 보고 달려가 말리던 사람들이 민주정권 10년을 보낸 지금도 고통 속에 헤매고 있는 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백만 부가 팔리면 뭐합니까? 죽은 자들을 애도할 수도 제대로 추모할 수도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가능합니까? 사람이 죽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가능합니까? 그 때 그 일은 이미 다 돈으로 배상받지 않았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백만 부가 팔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한국전도 베트남전도 광주도 이미 역사가 되었습니다. 역사에게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사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서해 주십시오, 권할 수 있지만 사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벌받아야 합니다.
역사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또 역사를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남에게 상처주고 잘못한 게 많을 텐데 잘 몰라서 그런 것도 있을 테고 아무도 고백하지 않으니 자기만 고백하면 바보가 될 것 같아서 말 못하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죠.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가해자가 우리 팀 우리 편에 속해 있어서 말을 못하기도 하고, 내가 사과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패배감 때문에 말을 안하기도 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미안하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노무현을 가지고 관장사를 하지 말란 말을 한 뒤였습니다. 내용 여부를 떠나서 그 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상처받을 줄 몰랐던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미안하다고 해야 할 순간에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기념까지 해 온 우리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양심을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에게 올바로 살라고 말하려면 우리가 의심해보고 알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미운 놈 미워할 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금 누리고 사는 자들은 그들이 잘해서 그렇게 잘 사는 게 아닙니다. 시스템의 수혜자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잘못된 특권을 영속화시켜왔습니다. 그러니 사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당화시키려하는 세력 앞에선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때 분노의 대상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분노 에너지를 분출해야 합니다. 군대 문제만 해도 애꿎게 병역 거부자들, 여성들, 엠씨몽, 유승준에게 화를 냅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학생들이 분노의 대상을 잘 찾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충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동선과 합치되는 선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분별력과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는 변화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년 만에 4.19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고은 시인은 ‘나 같은 게 다 살아서 오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먹는다’고 시에 썼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100만이었습니다. 그러니 고은 시인이 그런 시를 읊었겠죠. 100만이 죽었는데도 7년이 지나자 청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세상을 바꾸려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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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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