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맥거핀?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왜곡하는 사이비 적대를 의미한다. 사이비 적대는 무지한 대중을 향한 여론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단순히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몽된 대중’이 즉각적으로 체험하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심지어 스스로 재구성하는 ‘과잉의 현실(hyper reality)’이다. |
타블로의 학벌 문제가 사회정의 또는 중대한 공익적 사안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단지 음모론적 주체이자 냉소적 개인이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다. 그들은 개별자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질서와 윤리는 이러이러해야한다’는 어떤 상(像) 혹은 당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내 아들과 딸이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할 사회의 안녕과 지속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하는 ‘게임의 룰’이다. 여기서는 규칙의 내용이 무엇인지(정의로운지 아닌지 등등)보다는 규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공정한 실력경쟁’이라는 환상을 정당화하는 규칙,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승인하고 있기에 옳은 것,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이다. 요컨대 ‘아버지의 법’-대타자의 목소리이다.
그런데 타진요에게 타블로는 그 게임의 규칙을 깬 자, 대타자의 음성을 조롱한 자이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걸린 사안이 아님에도 타진요가 그렇게 열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타블로와 같은 ‘셀러브리티’ 혹은 권력자들에 의해 조작되고 은폐된 진실과 정의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정의사회구현을 위한 ‘공익제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진요의 주장이 실체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훗날 타블로가 자신의 학력에 대해 무언가를 정말로 속였다고 밝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체적 진실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지점은 따로 있다. (타진요와 같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저마다 옳다고 여기는 공적 가치를 활발하게 주장하고 때로는 ‘직접 행동’도 불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한국에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여겨졌던 ‘근대적 시민’이 사실은 이미 당도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당도한 그 ‘한국형 시민’의 모습이 서구의 시민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일탈”과 “파행”으로 여겨선 안된다. 광우병 반대의 촛불 들고 광화문에서 날밤을 샌 시민과 타블로의 신상을 집요하게 털며 날밤을 샌 그 시민은, 거의 확신컨대,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시민은 물론 근대적 시민이지만, 20세기 후반 남한이라는 시공간에서 주조된 것이기에 독일의 교양시민(Bildungsburgertum), 프랑스의 공민(citoyen)과 상당히 다른 형식과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유한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 표준시민(標準市民 The Standard Citizen)이 그것이다.
‘표준시민’이라니, 무슨 생뚱맞은 조어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명명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표준시민에서 ‘표준’은 그 악명(?) 높은 ‘표준어규정(표준어 사정원칙 총칙)’에서 착안한 것이다. 표준어규정에서 표준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서울말”이다. 1988년 1월 문교캺가 고시한 이 표준어규정은 당시에도 논란거리였고 지금도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민감한 부분은 역시 “교양 있는”이라는 부분이다. 누가 교양이 있는 사람인가? 사투리를 쓰면 교양이 없는 사람인가? 비속어나 욕설을 쓰지 않으면 교양이 있는 것일까? 초등학교 교사 정도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교수 정도는 되어야 하는가? 다른 건 둘째 치고 대체 ‘교양’이란 무엇인가? 이런 온갖 의문 또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표준어규정은 2011년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대로다. 단순히 국가기관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굳어진 것만은 아니다. 저 엉성해 보이는 표준어규정이 사실 꽤나 탁월하고 강력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과 강력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포괄성’과 ‘규범성’에서 온다. “현대서울말”이라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지정하면서도 변화 또는 변이를 반영할 여지를 두었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부분은 교양을 정의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의 가치지향 혹은 ‘모범’을 보여준다. “교양”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효과적인 기호이자 지표이다. 물론 실제로 교양이 사회적 지위의 정확한 반영이자 지표임을 증명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우리는 전형적인 ‘교양 있는 서울사람’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교양을 엄밀한 의미에서 ‘계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양”이 매우 선호되는 사회적 평가기준이자 선망가치임은 분명하다. ‘돈’이나 ‘지위’‘직함’처럼 직접적이거나 노골적인 지표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표준어는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의 하나이며, 이는 사회구성원들이 ‘교양’이란 것을 획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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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말와 사투리간 긴장으로 인기를 끌었던 SBS 「웃찾사」 코너 '서울 나들이' | |
국가권위에 더해 이런 포괄성과 규범성을 통해 표준어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무엇보다 그 공동체는 언어공동체이다) 구성원에게 내면화될 수 있었다. 실제로 정확하고 순수한 표준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사람의 숫자는 극히 적겠지만 어쨌든 표준어는 개인이 구사하는 언어를 지시하는 포괄적 실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표준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상징적 폭력으로 작동하는 규범이다. 요컨대 포괄적 실체이자 규범이라는 이중성이야말로 표준어규정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표준시민 논의로 돌아가자. 여기서 표준시민은 단순히 시민권자,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나 출생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표준시민은 자동적?명시적?행정적 자격이 아니라 추상적 가치의 담지자이다. 표준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전(純全)한 표준시민’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교적 동질적인 특성을 보이는 어떤 개인들 혹은 집단을 가리켜 표준시민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표준시민은 표준어와 마찬가지로 실체이자 규범이다. 그러나 표준어규정과 달리 표준시민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을 빠뜨릴 수 없다. ‘표준시민의 서사’라 말할 수도 있겠다. 플롯을 극도로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1987년 6월의 “민주시민” 또는 “애국시민”이, 2002년의 월드컵과 촛불을 계기로 어떤 질적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8년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2000년대의 “표준시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표준시민이라는 새로운 명명을 시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최근 수년간 벌어졌던 많은 사건들을 일관성 있게 해명하기 위해서다. 1987년 이후 거의 한 세대(30년)가 흘러갔다. 한국사회의 시민주체가 30년 전 염원하던 사회진보를 끝내 획득했는지 매우 회의적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일도양단해 버리는 좌파 일각의 근본주의적 관점에도 동의할 수 없다. 형식 민주화 ‘이후’ 많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실제로 변화했고 어떤 부분에서 그 변화는 질적일 뿐 아니라 가역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그 변화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한국시민 특유의 직접행동이 보여주는 형식, 감수성,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사회적 조건에 대한 분석이다. 여기서는 표준시민의 탄생배경과 역동적 중립주의(dynamic neutralism)라는 독특한 특성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다음 편 “⑤‘표준시민’의 탄생, 그리고 ‘역동적 중립주의’-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