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제대로 미안해 하기]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침묵은 죽음이다’
한홍구 교수 인터뷰
한홍구 교수는 대한민국사 4권의 서문에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산다는 것이 한국 현대사에서 어려운 일이었다고 썼다. 그리고 미워해야 마땅할 놈들에 대한 공분을 일으키는 것이 공부와 글쓰기 전략이라고 한다.
지난 몇 주 동안 잊어선 안 되는 중요한 말을 두 차례나 들었다. 첫 번째는 테드 제닝스란 신학자의 말이다. 그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란 책을 내면서 한국을 찾았는데 그때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평생 신학을 공부하면서 추구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혐오감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내게 말합니다. 너희 기독교인은 왜 우리를 미워하느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독교 중에서도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동성애자를 미워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굳이 그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침묵은 죽음이다. (silence kills) ”
내가 어떤 것에 침묵을 지키는 순간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다음날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전율을 친구에게 전해줬다. 그랬더니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에는 당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어.”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쉽게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사이에 나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심코 하는 말 한 마디 뒤에도 나의 욕망과 두려움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은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묘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바로 뒤에 죄책감이란 단어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 일은 희망 버스를 타고 한진 중공업에 갔을 때 일어났다. 나는 그때의 일로 두 차례나 글을 써버렸다. 그 중 한편을 여기에 인용하겠다.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에 갔을 때 여러 번 마음이 아주 크게 흔들렸다. 첫 번째는 한진중공업에 도착해서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곳에 앉아 김진숙 지도 위원에게 인사를 건넬 때였다. 어둠 속의 크레인은 거대했어도 거기 올라선 사람은 어른거리는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우리는 "안녕하세요"나 "힘내세요" 같은 인사말부터 건넸다. 우리가 한 번 소리를 지를 때마다 김진숙 지도 위원은 저기 저 아득한 곳에서 팔로 있는 힘껏 포물선을 그리며 인사를 했다. 손에 손전등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팔을 휘저을 때마다 빛이 움직였다. 우리가 말을 건네고 그녀가 깜빡거리고 우리가 말을 하고 그녀가 다시 깜박거리길 몇 차례 반복하는 동안 우리는 어쩐지 밤하늘을 배경으로 모스 신호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점점 거대한 한 점 불빛이 되어 타올랐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위로하러 간 것은 우리고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그녀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우리가 조난자고 그녀가 변치 않는 한 점 등대의 불빛만 같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담을 넘은 백기완, 문정현 신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 박창수 열사 아버지가 비좁은 임시 연단에 서 있는 것을 볼 때 또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든 그들의 흰 머리와 흰 수염, 주름이 깊게 팬 얼굴, 특히 박창수 열사의 아버지가 "자식을 잃고 눈물도 다 말라버린 몸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고뇌에 찬 떨리는 음성은 리어왕을 떠오르게 했다. 두 딸에게 배신당해 오갈 데 없이 된 리어왕은 거친 폭풍우 속에서 비틀거리며 처음으로 집 없고 굶주린 자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비참하게 외친다.
“화려한 자여. 불쌍한 자들이 느끼는 바에 스스로를 노출하여 넘쳐 나는 것들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고 하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라.”
물론 그날 밤 내가 흰 수염 흰 머리칼 휘날리는 늙은 선생님들을 보면서 떠올린 리어왕은 셰익스피어가 그린 리어왕은 아니었다. 리어왕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하면 포기인데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왕위와 재산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어도 그것으로 인한 대가를 바랐다. 그렇지만 그날 밤 선생님들은 그 무엇을 포기했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폭풍우라도 결코 흔들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상징으로 어둠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불행 속에서 죽게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가 리어왕을 행복하게 그리고 싶었다면 유일하게 가능했을 모습, 그것이 바로 그날 밤 선생님들의 모습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슬프고 기뻤다. 박종철 인권상을 탄 김진숙 지도 위원의 수상 소감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이 말은 내게 하늘이 공평하다는 것을 보여라라는 그 옛날 리어왕의 요청에 대하여 대한민국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화답처럼 들렸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이 85호 크레인을 생각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조합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2003년 그 모질었던 장례 투쟁의 와중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현서, 다림의 애비, 고지훈, 김갑렬을 기억해주십시오. 짤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우는 최승철을 기억해주십시오. 말기 암으로 언제 운명하실지 모르는 아버지보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농성장을 지키는 박태준을 기억해주십시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 안형백을 기억해주십시오...’ (한겨레 새벽 3시의 책 읽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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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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