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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본능 제드 러벤펠드 저 | 현대문학 |
『살인의 해석』의 두 영웅, 스트래섬 영거와 지미 리틀모어가 다시 한 번 뭉쳤다. 1920년 9월 16일, 월 가가 폭발했다. 그와 함께 억눌려 있던 인간의 야만적인 공격성이 해방되었다. 현재까지 미제로 남겨져 있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테러 공격과 라듐을 둘러싼 위기. 인간의 자기 파괴 본능이 만들어낸 그 과학적?정치적 수수께끼를 파헤치기 위해 두 영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리 퀴리의 위대한 과학적 발견과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의 학설을 바탕으로 테러, 전쟁, 탐욕 그리고 인간의 파괴 본능을 추적하는 숨 막히는 지적 미스터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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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분법을 좋아한다. 선과 악, 남과 여, 어른과 아이, 냉소와 연민, 이윤과 손해, 생과 사. 복잡한 사건을 설명할 때, 이야기를 만들 때, 심지어 역사를 설명할 때도 이분법은 어김없이 작동한다. 진실은 늘 ‘사이’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한다. 스릴러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분법이 가장 극적으로 발휘되기 쉬운 장르이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제드 러벤펠드의 신작
『죽음본능』은 스릴러의 공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지만, 손쉬운 이분법의 함정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작품이다. 비평가는 작품에 쉽게 감탄하지 않는 편이 좋다. 최상의 찬사를 구사하면 금방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쉽게 감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본능』은 그런 노력을 일시에 무력화시킨다.
1920년 9월 16일. 뉴욕 월 가에서 마차에 실린 폭탄이 터지고 도시에는 공포와 불안이 확산된다. (이 테러는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볼세비키와 이탈리아 갱단이 용의선상에 오르고, 애도의 물결과 함께 ‘보복’, ‘전쟁’, ‘색출’ 과 같은 단어들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9.11 테러 직후의 반응과 흡사하다) 이 실제 사건 속에 러벤필드의 상상력이 결합하면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뉴욕경찰청의 형사 리틀모어와 의사 영거. 영거의 곁에는 전쟁 중에 만난 매력적인 프랑스 여인 콜레트와 콜레트의 어린 동생 뤽이 있다. 뉴욕에서 그들이 재회한 날 월 가의 폭탄이 터지고, 괴한들에게 콜레트와 뤽이 납치되면서 영거와 리틀모어는 의도치 않게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1920년 테러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러벤필드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서 이 사건을 해결한다. ‘사건-혼란-해결’은 스릴러의 가장 기초적인 공식이므로, 이 작품은 실제 테러를 배경으로 삼은 작가의 퍼즐놀이라는 평가절하에 직면하기 쉬우리라. 그러나 러벤펠드는 ‘1920년’ 이라는 시공간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면서 지금-여기의 현실에 대한 적실한 질문을 던진다.
러벤펠드의 질문은 실제 인물을 중심으로 세 갈래로 전개된다. 먼저 실명으로 등장하는 당시 미국의 정치가와 기업인들은 테러 사건 이후 각자 빠르게 움직이면서 유리한 여론형성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 따위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없다. 국민들의 공포와 분노를 ‘활용’하여 멕시코와의 전쟁을 ‘기획’하는가 하면, 테러 사건을 정적을 제거하거나 이권을 지키는 ‘기회’로 삼는다. 이러한 풍경은 낯설지 않다. 2001년 이후 시작된, 군산복합체의 배만 불린 전쟁들과 위기 대처를 핑계로 자행된 인권 유린들을 우리는 이미 목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20년 테러 이후, 멕시코 내 자국의 유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미군은 멕시코 국경에 집결했었다) 테러의 규모와 권력자들이 행하는 가면극의 규모는 정확히 비례한다.
실명으로 등장하는 두 번째 인물은 정신 의학의 거장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영거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 콜레트, 콜레트의 동생 뤽은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아내와 이혼한 후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부정하게 된 영거는 참혹한 전장에서 냉소적인 인간으로 변해간다. 프랑스의 전장에서 콜레트를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콜레트의 동생 뤽은 실어증 환자이다. 영거는 콜레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동생의 치료를 도와주기로 하고 ‘평소에 친분이 있던’ 프로이트 박사에게 치료를 부탁한다. 프로이트 박사는 영거의 부탁을 수락하고 뤽을 치료하게 되는데, 치료과정에서 콜레트와 뤽, 영거가 겪은 전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재생된다. 독일군에게 살해된 부모에 대한 엇갈린 기억 탓에 콜레트와 뤽은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알 수 없는 적의를 품는다. 영거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장에서 자학했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콜레트를 사랑하는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세 사람을 ‘치료’하는 프로이트 또한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에 시달린다.
인간은 끊임없이 상처를 되새김질하며 파멸을 기획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죽음본능’이라고 명명한다) 죽음 본능과 생에의 의지는 서로 길항하면서 작용하는데, 전쟁은 그 균형을 깨뜨리고 만다. 러벤필드는 세 사람과 프로이트의 대화를 통해서 전쟁과 테러로 드러나는 인간의 자멸적인 움직임을 경고한다. 뤽의 실어증은 마침내 치료되고 콜레트와 영거 또한 아픈 기억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적 결말에 불과하다. 자멸을 향해 치닫는 자들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실존 인물은 ‘라듐’을 발견한 과학자 퀴리 부인이다. 소설 속에서 콜레트는 퀴리부인의 제자로 설정된다. 뉴욕의 테러 직후 콜레트가 납치된 것은 ‘라듐’에 대해 소상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사능 물질인 라듐은 암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독성을 지녔으나 방사능에 대해 무지했던 1920년대에는 기적의 원소로 칭송되었다. 라듐으로 인한 재해를 은폐하려는 기업과 광산업자들은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지명들을 떠올리게 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며칠 전 화재를 일으킨 미국 네브라스카의 원전.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인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백내장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1920년대는, 인류가 세계대전을 겪으며 충격적인 살상을 겪고도 대량생산과 소비의 단꿈을 버리지 못했던 시기이다. 또한 곧 다가올 경제공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공황은 극심한 실업과 불안을 낳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폭력적인 수단으로 나치즘과 군국주의가 대두되었다. (그 결과는 또 한 번의 세계 대전이었다) 지금-여기의 세계는 1920년의 ‘이후’가 아니라, ‘반복’이다. 소설 속의 풍경이 지닌 묘한 기시감이 그것을 반증한다. 죽음본능과 생명본능의 긴장으로 유지되는 것이 삶일진대, 세계는 개인의 소중한 삶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차 공멸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소설은 테러 사건의 해결을 다룬 추리소설이지만 역사와 허구의 조합을 통해서 인류에 관한 묵시록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죽음본능을 이기는 유일한 힘인 사랑의 소중함까지도.
“다행히 죽음본능은 단독으로 작용하는 법이 거의 없어. 우리가 가진 두 가지 본능은 거의 언제나 함께 작동하도록 되어 있지. 그래서 섹슈얼리티에 폭력적인 특징이 나타나지만, 또한 죽음충동을 완화해주기도 하지. 자네 나라의 폭탄 사건이 걱정되는 건 그 때문이야.”
“두 본능이 함께 작동하지 않아서요?”
“바로 그거야. 죽음본능이 해방됐어. 생명본능에서 풀려나고, 자아가 그 행동을 평가하는 양심이라는 이상으로부터 풀려난 셈이지. 어쩌면 전쟁이 그것을 해방했는지도 몰라. 아니면 이데올로기 때문인지도 모르고.”(501쪽)글 :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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