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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 재킷, 여자들의 옷장을 가득 채우다

재킷 The Ja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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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티 우먼」의 끄트머리를 보면 리처드 기어와 헤어지고 어딘가로 막 떠나려는 줄리아 로버츠가 나온다. 나풀거리던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그녀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짙은 색 재킷을 걸치고 있다.


영화 「프리티 우먼」의 끄트머리를 보면 리처드 기어와 헤어지고 어딘가로 막 떠나려는 줄리아 로버츠가 나온다. 나풀거리던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그녀는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짙은 색 재킷을 걸치고 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재킷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킷 자체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그 재킷을 입은 것만으로도 예전의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재킷의 마력이란 그런 것이다.

재킷은 다재다능한 옷이다. 우선, 티셔츠 위에 재킷만 입어도 어떤 자리에서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수 있다. 옷을 갈아입을 짬이 나지 않을 때 재킷 하나만 더해도 신경을 썼다는 인상을 준다. 티셔츠나 반바지, 청바지 등 편하게 입는 옷들의 체면을 살리는 데도 효과적이다. 어깨가 좁은 남자들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맨몸에 걸쳐도 제대로 차려 입은 느낌을 주는 옷이 재킷이다. 의젓하고 믿을 수 있다.


내 옷장은 재킷으로 가득하다. 대학 입학 기념으로 산 칼리지스트리트의 도회적인 재킷, 학교 앞 의상실에서 맞춘 꽃분홍색의 짤막한 모직 재킷, 회색빛이 가절한 아버지의 낙낙한 슈트 재킷, 운 좋게 할인된 가격으로 손에 넣은 장 폴 고티에의 검은색 면 재킷, 검정과 감색의 궁합이 프랑스적인 클로디 피엘로의 면 스트라이프 재킷, 송지오의 남색 중국 풍 재킷, 지극히 편해서 연이어 구입한 홍은주의 검은색 재킷들,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임선옥의 알록달록한 면 재킷, 여성스러운 매력이 돋보이는 박지원의 연한 하늘색 실크 재킷, 고급스러운 자태의 자댕 드 슈에뜨 턱시도 재킷, 어깨에서 소매를 잇는 부분과 등판의 재단이 섬세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샤넬의 트위드 재킷 등등. 생김새가 모두 다른 만큼, 이 재킷들은 제각기 다른 마음가짐과 행동을 낳는다.

재킷을 걸치면 자연스레 그에 걸맞은 태도를 취하게 된다. 형형색색의 무늬가 들어간 면 재킷은 유쾌하되 경박하지 않도록, 검은색, 회색, 감색 재킷은 진지하되 고루하지 않도록, 얼굴에 빛을 선사하는 흰색과 베이지색 재킷은 편안하되 간이 안 된 음식처럼 심심하지 않도록, 색다른 실루엣을 만드는 전위적인 재킷은 진보적이되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스트라이프 재킷은 발랄하되 어지럽지 않도록 밸런스를 맞추려 노력한다. 이처럼 재킷의 비위를 맞추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시크의 정수는 옷장 속의 재킷에 있다.
평범한 면바지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것도,
늘 입는 청바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도 재킷이다.


나는 재킷을 입을 때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어깨에서 팔을 타고 흐르는 소매를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특히 재킷 위로 걸친 백의 금속 체인 줄이 발걸음에 맞춰 찰랑이는 순간을 즐기는데, 그 순간이 우아한 ‘레이디’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소망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여성용 재킷이 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800년경이다. 긴 치마의 짝으로 상체를 옥죄던 재킷은 이후 다양한 성향을 지닌 디자이너들에 의해 여러 가지 스타일로 변화하며 여자들의 옷장을 채워왔다.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크리스찬 디올의 강렬한 곡선미, 재킷의 밑단에 골드 체인을 달아 무게가 아래쪽을 향하게 한 샤넬의 기지, 길쭉한 H형의 장 파투의 현대성, 단순한 라인에 예술적 품위를 담은 발렌시아가의 극적인 여성미, 넓은 라펠과 가느다란 허리를 내세운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고전미, 여성성과 남성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아르마니의 중성미, 평화로운 침묵을 표현한 요지 야마모토의 과묵함, 별나면서도 예쁘장한 폴 스미스의 활기, 예사롭지 않은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조형미 등 제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재킷들을 보면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움을 신봉하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30대 후반 무렵 구입한 재킷들은 지금도 건재하다는 점이다. 아직까진 그 재킷들을 저버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코트를 입지 않을 경우 가장 마지막으로 입는 것이 재킷이라는 점을 감안해 가능한 한 믿음직한 것으로 장만해둔 덕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재킷만은 특히 영양가 높은 것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재킷을 입을 때 같은 소재로 만든 하의는 입지 않는다. 상하의 한 벌로 된 정장 슈트를 입지 않은 지도 10년이 넘었다. 똑떨어지는 슈트의 위력을 모르는 바 아니나 재킷에 집중하고 싶어서다. 듀오가 아닌 솔로로 걸려 있는 재킷을 상대하다 보면 감각이 자란다. 상하의의 소재와 무게, 색상, 비율에 대해 좀 더 고민하고, 여러 조합을 상상하게 된다. 멋은 ‘콤비’에서 나온다. 평범한 면바지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것도, 늘 입는 청바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도 재킷의 몫이다. ‘캐주얼 시크’, 그 정수는 당신 옷장 속의 재킷에 있다.

who what wear


“상체를 긴장하게 만들지만 그 안에선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옷.”
전 CJ(주) CMO 박정애


박정애는 견고한 재킷과 낙낙한 원피스 앙상블을 좋아한다. 딱딱한 ‘겉’과 말랑말랑한 ‘안’이 상호간 부족한 면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킷 안의 ‘세계’에 관심이 많다. 티셔츠부터 블라우스, 원피스, 탱크톱까지 재킷이 포용하지 못하는 건 없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듯하면서도 패셔너블한 박정애의 스타일은 ‘비틀어진 기본’ 모드라 할 수 있다.


“재킷의 강점은 TPO에 따라 포멀하게 또는 캐주얼하게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까르띠에 홍보 이사 김은수


“얼마 전 자댕 드 슈에뜨에서 재킷 하나를 맞췄다. 똑떨어지는 느낌, 질 좋은 안감, 섬세한 바느질, 부드러운 소재 등 내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

두 줄로 나열된 금장 단추가 점잖은 그녀의 재킷은 출장이나 행사 어떤 경우에나 입을 수 있다. 여름에는 줄무늬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어 크루즈 룩을, 겨울에는 니트와 레깅스를 입고 재킷을 여미면 원피스처럼 소화할 수 있으니 활용 폭이 매우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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