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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호모 콰이렌스]어떻게 하면 나르시스적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김상봉 선생님의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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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로 철학이 물어야 할 존재는 무엇입니까? 책 속에 갇히지 않는 참된 현실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 나는 다만 내가 묻는 자일 뿐, 이 물음에 대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혜윤 선생님께
-또는 존재의 진리인 만남에 대하여

먼저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아는 체 하는 사람은 많아도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고, 더더욱 겸손하게 질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선생님이 주신 많은 물음에 대해 유창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자동기계는 아닙니다. 저는 다만 선생님의 물음에 참여하여 그것을 같이 묻고 같이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에게 성실하기 위함입니다.


철학에 대하여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가장 반가웠던 것은 선생님이 저를 철학자로 불러준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요사이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자’라는 정체불명의 호칭이 유행하면서 가끔은 저 역시 그렇게 불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없습니다. 문학이 있거나 역사학이 있거나 아니면 철학이 있는 것이지요. 누군가 스스로 인문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경 전문적인 문학 연구자도, 역사 연구자도, 철학 연구자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다 아는 체 하는 딜레탕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딜레탕트들이 소피스트처럼 현자 행세를 하는 곳이 지금 한국 사회입니다. 이른바 한국에서 ‘인문학자들’이란 그런 소피스트들을 가리키는 이름인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라고 오해했듯이 저에게도 가끔은 ‘인문학자’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남들이 저를 무어라 부르든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지만, 그 호칭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물음에 제가 보다 성실하고 싶었던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생님이 저를 철학자로 불러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생깁니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른바 인문학이라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아테네의 소피스트들이나 오늘의 인문학자들에게 공통된 것은 그들이 모두 현실, 또는 존재가 아니라 말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옛날 소피스트나 오늘의 인문학자들이 실은 제대로 아는 것은 별로 없으면서 모든 것을 아는 체 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현실이 아니라 책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책 속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그들의 세계, 그들의 현실은 책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그들은 심봉사처럼 현실에 무지하고 무기력합니다. 그리하여 집요하게 현실을 등지고 책의 세계, 말글의 세계로 도피하려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라기보다 말글을 사랑하는자(philo-logos)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추구하는 학문 역시 지혜를 구하는 철학(philo-sophia)이 아니라 문헌학(philo-logia)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하기야 이 땅에 제대로 된 문헌학자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만.

오늘날 철학의 곤경은 현실에 대한 지혜를 추구해야 할 철학이 문헌학에 의해 잠식되어 독서를 취미로 삼는 쁘띠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놀이터가 된 데 있습니다. 철학은 존재의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학문이기를 포기했으니 현실을 형성하는 능력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라마톨로지』를 쓴 데리다(J. Derrida)가 하버마스(J. Habermas)와 함께 『테러시대의 철학』을 쓴 저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책을 가지고 놀 때는 만화경처럼 현란하고도 새로운 말들을 그리도 많이 내뱉었던 그 인문학자가 9.11테러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그 진부한 하버마스의 마이크를 닦아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서양 철학의 가련한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눌한 말투로나마 현실의 부름에 응답하려 했다는 점에서 저는 데리다를 존경합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소비되고 있는 수많은 “세계적 철학자”들의 재롱은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잡담일 뿐입니다.


존재에 대하여 또는 현실에 대하여

당연히, 그 까닭은 그들이 현실에 대해, 존재의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자기들이 읽은 책에 대해 - 마치 말들이 현실이라도 된다는 듯이 - 말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이 아니라면, 책이 아니고 글이 아니라면 무엇이 존재이고 무엇이 현실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으로서 철학을 시작하게 됩니다. (선생님이 철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말씀하신 순간!) 왜냐하면 철학은 근본에서 보자면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철학이 물어야 할 존재는 무엇입니까? 책 속에 갇히지 않는 참된 현실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을 때 나는 다만 내가 묻는 자일 뿐, 이 물음에 대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는 책 속에 갇혀 있는 인문학자들을 비난했지만, 전들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저는 한 번도 남이 되어보지 못했으니, 새도 아니고 꽃도 아니며, 다만 우주 내에 하나의 점과도 같은 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보는 세계 역시 한갓 나만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남들이 책을 현실이라 오해하고 사는 것처럼, 저 역시 한낱 내 생각의 그물에 잡힌 관념적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이제 흔해빠진 비유가 되어버린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처럼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데, 누가 감히 자기만 현실 속에서 산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자기의식과 존재사유』) 우리 모두 고독하니, 저 또한 참으로 존재하는 현실로부터 추방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진리를 묻는 철학자의 첫 번째 과제는 객관적인 존재와의 만남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방법의 문제입니다. 방법(method)이란 원래 ‘같이 걷는 길’(met-hodos)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같이 걷는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니 방법은 만남의 길입니다. 그런즉 철학에서 방법의 문제는 오직 만남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근원적인 과제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만남은 현실과의 만남, 실재와의 만남, 또는 존재와의 만남입니다. 그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첫 번째 과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나홀로주의(唯我論)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나의 존재는 확실한데 세계의 존재는 불확실하므로 나 이외의 세계의 존재를 확증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나 자신의 존재부터가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부터가 철학의 근본문제입니다. 세상이 모두 꿈이요 허상인데 자기 혼자 그 꿈 속의 허상이 아니요 실재일 수 있으리라는 망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어차피 세상이라는 것은 결국은 나에게 주어지고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고 나는 거꾸로 세계 속에서만 내 존재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까닭에 나와 세상이 서로 얽혀, 있으면 같이 있고 없으면 같이 없는 것이지, 나 혼자 실재로서 존재하고 세상은 한낱 꿈이나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만약 지금 내 삶이 한갓 꿈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꿈 속의 나 역시 허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삶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는 한에서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의 심오한 뜻을 모르진 않습니다만, 그 말이 결코 충분한 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현실 세계에 있는지를 구별해주지 못합니다. 데카르트 자신도 인정했듯이 꿈을 꿀 때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우리를 현실과 만나게 해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생각이 아니라면 어떤 길을 통해 우리는 참으로 존재하는 현실과 만날 수 있습니까? 오직 아픔, 오직 고통입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는 꼬집어보면 됩니다. 꼬집어서 아프면 현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플라톤이 그려 보인 지하 극장에서 그림자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사는 것 역시 오직 내가 세계의 아픔을 아파하는 한에서만 확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 삶이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사는 세상이 한낱 환상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고통만이 우리의 삶에 실재성과 진실성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해묵은 나홀로주의(solipsism)에 대한 저의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은 또 얼마나 허탈한지요! 루소가 『에밀』에서 그랬지요. 사람은 열여섯이 되면 고통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기가 아픈 것을 안다 해서 남들도 자기처럼 고통 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고통 받을 때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이 세계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한에서 나의 세계가 고통 속에서 현전한다는 것도 인식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나 자신의 고통을 절실하게 느끼고 반추한다 하더라도 그 때 나는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그 세계가 아무리 실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하여 아무리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을 사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 세계가 나만의 세계라는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다시 나홀로주의의 지하감옥으로 추락한 셈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때의 나홀로주의는 현실이 꿈이라는 뜻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에 나 혼자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오직 나만의 고통에 갇혀 있다면, 세계가 아무리 실재적이라 하더라도 이 무한한 세계 내에 사람이란 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세계는 가장 저급하고 단순한 직접성 속에 있을 뿐이지요.

이처럼 자기의 존재가 오직 자기만의 고통을 통해 확인되는 세계가 나르시스적 세계입니다. 나의 고통 때문에 있는 세계, 오직 나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만 존재의미를 갖는 세계, 그리하여 간신히 내가 당면한 고통을 벗어나면 다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침묵 속에 빠져버리는 세계가 홀로주체의 나르시스적 세계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세계는 철저히 수동적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고통 받을 때 나는 수동성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르시스적 세계는 나만의 세계이니, 말하자면 그 세계 속에서 나는 홀로주체인데,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내 존재는 수동성 속에서만 확인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나르시스적 세계의 홀로주체란 이름만 주체일 뿐, 사실은 수동적 필연성에 사로잡힌 노예일 뿐입니다.


너와 내가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에 대하여

그렇다면 언제 나는 나르시스적 세계를 벗어나 너와 내가 공유하는 보편적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내가 너의 앓는 소리를 들을 때, 그리고 너의 고통스런 부름에 응답할 때입니다. 나의 고통이 내 삶의 현실성을 보증해 주듯이, 오직 너의 고통과의 만남만이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아 너와 나를 하나의 공통된 세계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객관적 세계는 처음부터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 열리는 지평입니다. 그렇게 참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가 만남 속에서 열리는 것이니, 만남이 존재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만남은 또 어떻게 일어나는 사건입니까? 그것은 오직 내가 너의 고통, 너의 슬픔과 만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나의 세계의 실재성이 내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만 확증되듯이 너의 세계의 현실성 역시 너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만 확증될 터인데, 너와 내가 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겹치는 한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선생님과 제가 같이 슬퍼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선생님과 제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용산참사로 희생된 분들이나 그 유족들과 용산재개발의 주역인 삼성건설의 이건희가 어떻게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와 내가 슬픔과 고통을 같이할 수 없을 때, 우리 모두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외부로 열린 창문 없는 골방에 갇혀 있는 가련한 수인(囚人)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즉 내가 오직 너의 고통에 참여하는 한에서, 또는 너와 같이 아파하는 한에서,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도 남이 되어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너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홀로 있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고통으로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부름, 또는 이런 절규를 듣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해 여름 장마는 길었다

송경동

그들의 싸움은 장마처럼 길었다
와? 와아? 와아? 하며
뱃일을 다니는 사내가 밑도 끝도 없이
세간살이 하나하나를 깨나갈 때마다
부둣가 다방엘 다니는 동거녀는
썰물에 씻기는 모래알처럼 쓰러지며
와아? 와아? 와 그라는데? 하며 흐느꼈다

나는 그들의 옆방
달에 10만원짜리 생활 속에
텅 빈 소라껍데기마냥 기구하게 누워
불도 켜지 못한 채 서러웠다
모든 건, 이 지긋지긋한 장맛비 때문이라고
위안해보지만
떨쳐지지 않는 기억들
(이하 생략)


아까 제가 문헌학자들, 소피스트들이 현실이 아니라 말을 가지고 논다고 비난했던가요? 경솔하게도! 어리석은 저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문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타인의 고통과 만날 수 없습니다. 말글이 중요한 까닭은 내가 그것을 통해서만 너의 고통 앞에 마주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또는 존재는 오직 말글을 통해서만 내 앞에 열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 말한 것은 옳습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함석헌이 말했듯이 모든 존재는 “말씀하는 존재”입니다. 존재는 에이도스(eidos) 즉 형상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는 말씀(logos)으로서만 내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무슨 명령도 아니고 지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노예로 호명하는 주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들리는 앓는 소리, 빼앗긴 자의 절규이며, 상처받은 자의 비명입니다. 그 앓는 소리를 듣고 같이 앓는 것, 그것이 참된 앎입니다. 그래서 함석헌이 이미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앎은 앓는 것”이라고! 내 몸이 남의 몸이 아니라 나의 몸인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몸의 아픔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듯이, 이 세계가 나의 세계가 될 수 있는 근거도 세계의 아픔을 내가 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세계의 모든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품어 안을 수 없으니, 다만 뱃일을 다니는 사내와 그 동거녀의 슬픔을 슬퍼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계는 오직 고통 받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이 모여 누룩으로 밀가루 반죽이 부풀듯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엔 뱃사람과 동거녀의 슬픔과의 만남에서 열린 세계는 점차 보다 많은 사람들의 슬픔과의 만남으로 실개천이 강물이 되듯 불어나겠지요. 슬픔의 눈물이 같이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를 때까지. 눈물 없는 곳에는 세계도 없으니, 너의 눈물 나의 눈물 그리고 우리 모두의 눈물이 같이 흘러 한 바다가 될 때, 그 하나된 슬픔의 바다야말로 우리가 열어야 할 참된 세계인 것입니다.

시인이야말로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눈물 저 슬픔을 섞어 영롱한 보석을 빚어내는 연금술사입니다. 이들의 기술은 얼마나 놀라운지, 뱃사람과 동거녀의 슬픔을 달에 10만원짜리 생활에 갇힌 자의 서러움과 만나게 하더니, 예서 그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썰물에 씻기는 모래알과 텅 빈 소라껍데기의 서러움에까지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슬픔이란 어디에나 있으니 (아니 거꾸로가 더 정확한 말일텐데, 오직 슬퍼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래알이나 소라껍데기도 예외는 아닌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계몽된 현대인들은 반문하겠지요. ‘그거 그냥 비유고 의인화일 뿐이예요!’ 옳습니다. 하지만 비유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나르는 자(meta-phoros),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자의 슬픔을 내게 떠안기는 자가 아닌가요? 하지만 오직 그렇게 나와 아무 상관없는 모래알의 슬픔을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래알과 나는 하나의 세계 속에 거주하게 되는 것이니, 시인은 삼라만상의 번뇌와 슬픔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해주는 자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의 세계를 아니 더 나아가 존재의 진리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럼 철학자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시인이 느끼게 해주는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계가 만남 속에서만 열리는지, 또한 어떤 의미에서 존재의 진리가 만남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직 고통이나 슬픔과의 만남만이 참된 만남의 길을 열어주는지,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 속에만 역설적으로 참된 기쁨이 있는지, 이 모든 것들을 비유가 아니라 명석한 개념을 통해 엄밀하게 설명하는 것이 철학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와아? 와아? 와 그라는데?” 어디 이 물음이 부둣가 다방엘 나가는 여자만의 물음이었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해고 통지를 받고 일터에서 쫓겨나면서, 평택 대추리에서처럼 느닷없이 삶터에서 추방되면서, 또는 용산에서처럼 재개발이다 뉴타운이다 탐욕의 불길 속에 타 죽어가면서 절규하듯 물었을 그 물음, “와아? 와아? 와 그라는데?”-이 물음이야말로 철학의 시원에 놓인 근거물음입니다. 철학은 그리하여 슬픔의 까닭을 묻는 것, 그 물음 속에서 슬픔 곁에 머무르는 것, 슬픔의 까닭을 묻고 또 물어 슬픔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하여 어떻게 모든 슬픔이 하나의 근원에서 잉태되었는지를 회상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떻게 우리 모두가 슬픔 속에서 하나인지를 오직 개념을 통해 명징하게 밝히는 것.


개념과 슬픔의 총체성에 대하여

하지만 왜 개념입니까? 왜 비유이면 안 됩니까? 왜 우리는 시인이 들려주는 존재의 진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철학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까? 그 까닭은 개념적 사유를 통해서만 우리는 현실을 설계하고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형성할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를 다만 꿈꾸게 합니다. 하지만 같이 꿈꾸는 것만으로는 아직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꿈속의 환상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 환상을 실현할 수 있는 설계도를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같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도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혼자 꾸든 같이 꾸든 꿈은 꿈일 뿐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꿈꾸는 눈부신 환상이 개념화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술이 꿈꾸는 새로운 세계에 이르는 길을 개념적 사유 속에서 가리켜 주어야 할 철학이 우리 시대엔 같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생각하면 현대 철학이 쓸모없는 잡담이 된 까닭도 니체 이후 철학자들이 분별없이 시인 흉내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들이 시를 쓸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럴 수 없었으니, 그들은 다만 모호한 개념을 남발함으로써 원숭이처럼 시인을 흉내 냈을 뿐입니다.

참된 개념은 존재의 설계도 또는 회로도입니다. 그것은 존재의 혈관과 신경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도와 같습니다. 하지만 세계의 존재가 오직 고통과 슬픔 속에서 열리는 한에서, 참된 개념은 언제나 슬픔의 지도입니다. 시인이 비유 속에서 연결해주는 삼라만상의 슬픔의 인연의 실타래를 엄격한 개념적 사유 속에서 그려 보이는 것이야말로 시가 수행할 수 없는 철학적 정신의 노동인 것입니다. 철학은 이를 통해 고립된 슬픔을 조직화합니다.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철학은 “와아? 와 그라는데?”라는 물음에 대답해야 합니다. 한 슬픔의 까닭은 오직 다른 슬픔 속에 숨어 있으니 타인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고서 자기의 슬픔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철학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를 개념적 사유 속에서 해명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슬픔을 하나의 전체로 불러모으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개념적 사유 속에서 하나로 엮인 슬픔의 전체를 이제 우리는 슬픔의 총체성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참된 세계는 이 슬픔의 총체성 속에서 열리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미리 주어진 전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남 속에서 형성해야 할 과제입니다. 바로 이 형성의 활동 속에 인간의 자유가 있습니다. 철학은 한 사람의 슬픔이 어떻게 만 사람의 슬픔과 뗄 수 없이 얽혀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모두를 고립된 홀로주체성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이 더불어 형성해 나가야 할 서로주체성의 세계로 초대하는 부름인 것입니다.

작별인사

이것이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옛 사람들이 동문서답이라 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물음에 대한 답은 누구보다 선생님께서 잘 알고 계시니, 사족일 뿐인 제 대답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선생님의 물음을 핑계 삼아 저의 가난한 정신의 빈 구석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이제 저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 물음으로 저를 불러주신 데 감사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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