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의 소셜 맥거핀]음모론적 주체와 ‘진정성 넘치는 냉소주의’
음모론과 편집증
리처드 호프스태터(R. Hofstadter)는 『미국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에서 음모론을 ‘정치적 편집증(political paranoia)’과 함께 논했고, 이후 음모론은 편집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편집증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체계적인 망상’이다. 그 망상이 만들어낸 오해와 착각으로 편집증자는 지나친 우려나 두려움에 빠져들어서 급기야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왜곡하는 사이비 적대를 의미한다. 사이비 적대는 무지한 대중을 향한 여론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단순히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몽된 대중’이 즉각적으로 체험하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심지어 스스로 재구성하는 ‘과잉의 현실(hyper reality)’이다. |
그런데 냉소적 주체는 기이한 변형을 일으킨다.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젝이 말한 것처럼 냉소주의와 근본주의가 공유하는 어떤 속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글자 그대로 어느 순간 냉소주의자가 근본주의자로 변태한다는 뜻이다. 냉소주의자(편집증)가 근본주의자(도착증)로 전환되는 비밀에 ‘진정성’의 윤리가 도사리고 있다.
냉소주의자와 근본주의자는 기본적 특징이 동일하다. 위에서 지적이 말하고 있는 바, “본래적 믿음 그 자체에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곧 ‘믿을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다. 냉소주의자는 믿지 않고 비웃는다. 근본주의자는 믿을 이유가 없다. 그냥 직접 안다. 그런데 현실의 구체적 사안들에서 대다수 냉소적 주체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듯 말하지만 그 의심을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냉소를 통해서, ‘내가 이렇게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내 주장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모순이다. 다른 건 다 의심해도 자기만은 믿어달라니. ‘엄격한 냉소주의자’라면 냉소를 자신에게도 재귀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냉소적 주체들은 그렇게 나아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자기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는 모순, 그 모순을 봉합하는 기제가 바로 진정성의 윤리이다.
뒤에 본격적으로 논의할 예정인 소위 ‘타블로 사태’는 냉소적 주체의 기이한 변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음모론적 논변을 펼친 일부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의 약칭인 인터넷 카페 이름)’와 상진세(“상식이 진리인 세상”)들은 냉소적 주체로서 가수 타블로의 행적을 집요하게 의심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면서도, 또 어떤 국면에서는(주로 자신들이 의심받을 때) 근본주의적 주체가 되어 자기들이 만들어낸 어떤 가상(假象), 혹은 판타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들은 타블로의 학력에 관한 모든 미심쩍은 사실에 대해 냉소적 태도로 분석하면서도 스스로 만들어낸 음모론에 대해 어떤 냉소적 거리도 두지 않고 그것을 ‘당연한 앎’으로 취급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타진요의 담론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고학력의 화이트컬러이거나 지식인에 준하는 교양을 가진 전문직이었다. 이들은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며, 스탠퍼드 대학교가 얼마나 대단한 학벌인지, 학벌과 부모의 재산이 얼마나 한 인간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지 또한 처절하게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학벌이나 외모, 돈이 아닌 다른 가치가 더 중요하다 여기는 사람을 보면 즉각적으로 ‘속물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블로를 의심했다. “왜 스탠포드씩이나 나와서 힙합같이 저급한 음악을 하냐”고 묻는 방송관계자에게 격렬하게 항의했을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던 타블로는 분명 ‘재수 없는’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타진요가 타블로의 학벌을 질투했다는 따위의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타블로의 학벌이 너무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좋은 학벌을 마치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타블로가 ‘학벌질서의 승리자인 주제에 그 학벌질서를 통째로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한국인이 마땅히 승복해야할 ‘숭고한 질서’를 하찮게 취급했기 때문에 저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타블로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면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진요의 무리한 행태와 음모론의 논리적 허술함을 비판했다. 바로 여기서 냉소적 주체는 ‘진정성 넘치는 냉소주의자’, 즉 근본주의적 주체로 극적으로 변모한다.
타진요, 상진세 등에서 활동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이해관계와도 무관’한 그저 ‘상식과 진실을 밝히기 위한 순수한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눈에 보이는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주장의 옳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도, 타블로의 학벌 문제가 마치 공동체에 속한 공적 시민(citoyan, bildungsburgertum)의 의무라도 되는 것인 양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사심 없음’을 이야기했다. 마치 이렇게 되묻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지금 하는 행위의 숭고성과 진정성을 보아라, 나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는가?”
지젝의 논의처럼, 근본주의적 주체는 믿지 않고 “직접적으로 알기” 때문에 자신의 당연한 앎을 논리적으로 방어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부활처럼 그저 숭고를 가리키는 증거뿐이다.
자신의 음모론,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을 진짜라고 믿어버리게 되면 냉소적 주체는 근본주의적 주체로 변태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음모론적 논변이 가진 합리성 또는 논리성은 그저 탈피한 곤충이 남긴 텅 빈, 그러나 고스란히 예전 모습을 간직한 껍질일 뿐이다. 냉소적 주체는 자기증명의 지난한 과정을 진정성이란 매개를 통해 이렇게 단숨에 초월해버리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저/<김서영> 역33,300원(10% + 5%)
수많은 지젝의 책 중에서도 독보적인 『시차적 관점』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의 뒤를 잇는 주저이며 저자 스스로 대작라고 칭한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기존의 지젝 사유를 집대성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위해 분명한 한걸음을 내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