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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소셜 맥거핀]음모론적 주체와 ‘진정성 넘치는 냉소주의’

음모론과 편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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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호프스태터(R. Hofstadter)는 『미국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에서 음모론을 ‘정치적 편집증(political paranoia)’과 함께 논했고, 이후 음모론은 편집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편집증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체계적인 망상’이다. 그 망상이 만들어낸 오해와 착각으로 편집증자는 지나친 우려나 두려움에 빠져들어서 급기야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소셜 맥거핀?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s)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왜곡하는 사이비 적대를 의미한다. 사이비 적대는 무지한 대중을 향한 여론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단순히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계몽된 대중’이 즉각적으로 체험하고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심지어 스스로 재구성하는 ‘과잉의 현실(hyper reality)’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R. Hofstadter)는 『미국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에서 음모론을 ‘정치적 편집증(political paranoia)’과 함께 논했고, 이후 음모론은 편집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편집증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체계적인 망상’이다. 그 망상이 만들어낸 오해와 착각으로 편집증자는 지나친 우려나 두려움에 빠져들어서 급기야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편집증은 기본적으로 회의주의자의 병이며 의심이 빚어낸 괴물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내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탔을지 모르니 아주 조금씩만 맛을 본다든지, 내 방 천장의 작은 틈새로 천천히 사람을 죽이는 독가스를 주입하고 있다고 의심한다든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등의 증상이 전형적인 편집증이다.

호프스태터가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던 시기인 1950년~1960년의 미국은 그 유명한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친 직후였다. 엄청난 숫자의 정치인과 공무원, 유명인사들이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게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물론 대부분 공산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과거에 사회주의 성향의 활동을 했더라도 미국의 이른바 ‘국익’을 해치거나 소련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근거 없는 의심과 혐의를 덮어씌워 대다수 미국인들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한, 초유의 마녀사냥이었던 것이다.

매카시 상원의원의 ‘빨갱이 사냥’은 편집증적 음모론의 전형적 사례였는데, 호프스태터는 그것이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 당시 미국정치에 배어들어간 어떤 ‘스타일’이라고 보았다. 그 스타일이 편집증이고, 담론의 구조는 음모론이었다.

앞서 살펴본 음모론의 특징들- 거악의 존재, 단순한 인과관계, 비밀주의-을 보면, 단순한 의심이 체계적 망상으로, 나중에는 공고한 믿음으로 발전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직관적이거나 아니면 자의적인 의심이 작은 씨앗처럼 마음의 토양에 뿌려진다.

이 단계는 그저 망상이라 보아도 좋을만한 무엇이다. 그러나 그 씨앗이 일단 싹을 틔우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엉성하지만 유기적인 하나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단계부터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들도 수집되며,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명료한 사실들과 주관적 망상들이 결합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체계적 망상’이다.

편집증적 망상들은 자의성과 논리성의 복합물이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음모론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인 것이다. 요컨대 음모론자가 구사하는 논법과 편집증자의 망상이 구성되는 방식에는 부정하기 어려운 상동성(homology)이 존재한다. 바꿔 표현해보면, 음모론의 내면은 편집증이며 편집증의 표현양태는 음모론이다.

지젝은 편집증과 냉소주의를 현대사회의 대표적 주체로 종종 이야기해온 대표적 논자 중 하나다. 그의 정식에 따르면 편집증자는 “무신론자-회의주의자-냉소주의자-자유주의자”이다. 이 규정은 근본주의자와의 비교를 통해 또렷해지는데,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자는 믿지 않는다. 그는 직접적으로 안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자유주의-회의주의적 냉소주의와 근본주의는 기본적인 배후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개념의 전형적인 의미를 믿는 능력의 상실이다. 양쪽 모두에게 종교적 진술은 직접적 지식의 의사-경험적 진술이다.

근본주의자들은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반면 회의주의적 냉소주의자는 그것들을 비웃는다. 그들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모든 본래적인 신념을 설정하는 결단, “이성”의 사슬에, 실증적 지식에 근거할 수 없는 결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행위이다. (중략) 그러므로 우리는 역설적인 결론을 도출하도록 강요받는다.

전통적인 세속적 인본주의자들과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에서 믿음을 대표하는 이는 인본주의자들인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지식을 대표한다. 한마디로 근본주의의 진정한 위험은 그것이 세속적 과지식에 위협을 부과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래적 믿음 그 자체에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에 있다. (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마티, p.681)

그런데 냉소적 주체는 기이한 변형을 일으킨다.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젝이 말한 것처럼 냉소주의와 근본주의가 공유하는 어떤 속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글자 그대로 어느 순간 냉소주의자가 근본주의자로 변태한다는 뜻이다. 냉소주의자(편집증)가 근본주의자(도착증)로 전환되는 비밀에 ‘진정성’의 윤리가 도사리고 있다.

냉소주의자와 근본주의자는 기본적 특징이 동일하다. 위에서 지적이 말하고 있는 바, “본래적 믿음 그 자체에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곧 ‘믿을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이다. 냉소주의자는 믿지 않고 비웃는다. 근본주의자는 믿을 이유가 없다. 그냥 직접 안다. 그런데 현실의 구체적 사안들에서 대다수 냉소적 주체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듯 말하지만 그 의심을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냉소를 통해서, ‘내가 이렇게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내 주장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모순이다. 다른 건 다 의심해도 자기만은 믿어달라니. ‘엄격한 냉소주의자’라면 냉소를 자신에게도 재귀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냉소적 주체들은 그렇게 나아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자기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는 모순, 그 모순을 봉합하는 기제가 바로 진정성의 윤리이다.

뒤에 본격적으로 논의할 예정인 소위 ‘타블로 사태’는 냉소적 주체의 기이한 변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음모론적 논변을 펼친 일부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의 약칭인 인터넷 카페 이름)’와 상진세(“상식이 진리인 세상”)들은 냉소적 주체로서 가수 타블로의 행적을 집요하게 의심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면서도, 또 어떤 국면에서는(주로 자신들이 의심받을 때) 근본주의적 주체가 되어 자기들이 만들어낸 어떤 가상(假象), 혹은 판타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들은 타블로의 학력에 관한 모든 미심쩍은 사실에 대해 냉소적 태도로 분석하면서도 스스로 만들어낸 음모론에 대해 어떤 냉소적 거리도 두지 않고 그것을 ‘당연한 앎’으로 취급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타진요의 담론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고학력의 화이트컬러이거나 지식인에 준하는 교양을 가진 전문직이었다. 이들은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며, 스탠퍼드 대학교가 얼마나 대단한 학벌인지, 학벌과 부모의 재산이 얼마나 한 인간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지 또한 처절하게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학벌이나 외모, 돈이 아닌 다른 가치가 더 중요하다 여기는 사람을 보면 즉각적으로 ‘속물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블로를 의심했다. “왜 스탠포드씩이나 나와서 힙합같이 저급한 음악을 하냐”고 묻는 방송관계자에게 격렬하게 항의했을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던 타블로는 분명 ‘재수 없는’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타진요가 타블로의 학벌을 질투했다는 따위의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타블로의 학벌이 너무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좋은 학벌을 마치 ‘별 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타블로가 ‘학벌질서의 승리자인 주제에 그 학벌질서를 통째로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한국인이 마땅히 승복해야할 ‘숭고한 질서’를 하찮게 취급했기 때문에 저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타블로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면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진요의 무리한 행태와 음모론의 논리적 허술함을 비판했다. 바로 여기서 냉소적 주체는 ‘진정성 넘치는 냉소주의자’, 즉 근본주의적 주체로 극적으로 변모한다.

타진요, 상진세 등에서 활동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 하는 행동이 ‘어떤 이해관계와도 무관’한 그저 ‘상식과 진실을 밝히기 위한 순수한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눈에 보이는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주장의 옳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도, 타블로의 학벌 문제가 마치 공동체에 속한 공적 시민(citoyan, bildungsburgertum)의 의무라도 되는 것인 양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사심 없음’을 이야기했다. 마치 이렇게 되묻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지금 하는 행위의 숭고성과 진정성을 보아라, 나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는가?”

지젝의 논의처럼, 근본주의적 주체는 믿지 않고 “직접적으로 알기” 때문에 자신의 당연한 앎을 논리적으로 방어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부활처럼 그저 숭고를 가리키는 증거뿐이다.

자신의 음모론,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을 진짜라고 믿어버리게 되면 냉소적 주체는 근본주의적 주체로 변태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음모론적 논변이 가진 합리성 또는 논리성은 그저 탈피한 곤충이 남긴 텅 빈, 그러나 고스란히 예전 모습을 간직한 껍질일 뿐이다. 냉소적 주체는 자기증명의 지난한 과정을 진정성이란 매개를 통해 이렇게 단숨에 초월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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