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김완선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이전의 어떤 춤추는 가수도 보여주지 못한 과격한, 당시 기준으로는 대담하고 관능적인 몸놀림에다가 동선도 엄청나게 넓었다. 출렁이며 춤추었고 무대를 휘젓고 다녔다. 음악담당 기자들은 일제히 그의 이름 앞에 ‘댄스가수’라는 말을 갖다 붙였으며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은 “우리한테도 마돈나가 있다!”며 환호했다.
단숨에 남심(男心)은 장악되었다. 당시 텔레비전에 출연한 김완선의 야릇한 동작과 섹시한 눈빛은 놀라움과 흥분을 넘어서 조금은 무서울 정도였다. ‘이제 우리 서로가 남남인가/ 꿈만 같던 옛날이 안개 속에 사라져/ 이제 나 홀로되어 남아있네/ 나, 오늘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데뷔곡 「오늘밤」의 어둠이 무섭다는 대목을 부르며 눈을 치켜떠 유난히도 흰자위가 많이 보였을 때 얼마나 고혹적이었으면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어둠이 아니라) 네 눈이 더 무서워!”라고 했을까. 그가 나오기 전까지 가수 앞에 댄스가수나 댄스그룹과 같은 수식이 붙지 않았으며 댄스음악이라는 말로 통용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댄스가수라는 용어가 갑자기 상용화된 것은 비로소 이 땅에 댄스 전문가수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과감한 율동에다가 압도적인 미모와 카리스마는 최초의 춤 전문가수라는 타이틀을 넘어 곧바로 김완선을 댄스여왕, 즉 ‘댄싱 퀸’으로 승격시켜주었다. 이러한 무게감과 ‘김완선 때문에 섹시의 개념을 알았던’ 각별한 인연 때문에 1980년대를 젊은 시절로 보낸 지금의 40대들은 아무리 이효리, 채연, 손담비 같은 섹시 댄스가수 그리고 무수한 섹시 콘셉의 걸 그룹들이 나와도 ‘댄싱 퀸’이라는 칭호는 반드시 김완선의 것임을 고집한다(어딜 감히…).
댄스음악의 생명이 짧다고 해도 기성세대들에게 김완선의 히트곡들은 고스란히 내장되어 있다. 상당부분 추억이 작용하는 것일 테지만 동시에 그의 노래에 댄스음악 이상의 무게감이 실려 있는 이유도 있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김완선의 대부분 히트곡들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록 뮤지션들이 써주었다. 댄스를 표방한 가수지만 음악은 로커들의 작품으로 구성을 차별화한 것이다.
김완선을 스타로 만들어준 「오늘밤」과 「나 홀로 뜰 앞에서」는 제1회 대학가요제 그랑프리 수상 곡 「나 어떡해」를 쓴 산울림의 둘째 김창훈이 작곡했고 「나 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는 1970년대 포크 록의 기린아 이장희의 곡이다. 인기 절정이었을 때 김완선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 「삐에로는 나를 보고 웃지」와 「가장 무도회」는 그 무렵 떠오르던 기타리스트 손무현의 작품이었고 「기분 좋은 날」은 유명 재일교포 세션맨이었던 고 박청귀가 써주었다.
「리듬 속의 그 춤을」의 경우 다름 아닌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의 작곡이라는 사실은 결정타다. 신중현과 김완선의 조합은 솔직히 어색하다. 하지만 신중현까지도 김완선에게 곡을 제공했다는 점 때문일까, 요즘의 젊은 로커들 중에서도 김완선과 그의 음악을 잊지 않는 정도를 넘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어째서 록의 거목들이 너도나도 일개의 댄스가수에게 곡을 제공하는 일이 벌어졌을까. 이것은 당시 방송가에서 ‘김완선의 이모’로 통했던 매니저 고 한백희씨의 전략이었음이 분명하다. ‘인순이의 리듬터치’의 백댄서로 김완선을 기용하며 댄스가수로 키울 뜻을 가지고 있던 그는 댄스음악은 음악성이 낮다는 세간의 고정관념을 뒤집어버리기 위해 로커들의 작품을 요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창훈은 훗날
“곡을 써달라고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완선 씨를 로커라고 생각했다”며
“여성이 라이브 무대에서 록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오늘밤」을 썼는데 완선 씨의 춤이 가미되니 댄스곡으로 변화됐다. ‘오늘밤’이 히트한 후 또다시 요청이 와서 「나 홀로 뜰 앞에서」를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신중현선생도
“하도 매니저가 간청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뒤 배경에 아랑곳없이 어린 팬들은 김완선의 환상율동에 넋을 잃었다. 그가 가요역사에 남긴 공적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면적이지 않았던 10대들의 음악시장 참여를 이끌었다는데 있다. 국내 본격적인 ‘틴 마켓’ 형성에 씨를 뿌린 셈이다. 가요의 전성기라는 1980년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제각각 수요층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김완선의 댄스음악은 10대를 음반시장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김완선 이후 ‘한국의 마이클 잭슨’으로 통했던 박남정과 댄스그룹 소방차(김완선, 박남정, 소방차를 1980년대 댄스 빅3라고 한다)가 잇달아 등장, 댄스의 깃발을 높이며 10대들의 우상으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동시대를 장식한 「바람아 멈추어다오」의 이지연, ‘스잔’의 김승진, 「도시의 삐에로」의 박혜성은 아예 틴에이저들을 겨냥한 요즘 의미의 아이돌이었다.
댄스음악에 대한 낮은 인식은 여전하긴 하지만 김완선을 통해서 우리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댄스음악을 바라보는 일반의 시선이 얼마나 차가웠는가를 읽을 수 있다. 그 무렵은 조용필, 김수철, 이선희, 김현식, 이문세, 들국화, 시인과 촌장 등 빼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들과 록, 포크, 발라드, 언더그라운드의 선두주자들의 쟁패하던 시절이라서 대놓고 댄스라는 명함을 내밀기는 곤란했다. 댄스가 너무도 당연시되고 주류를 독식하고 있는 지금은 이런 부담감이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김완선 막후의 지휘자인 매니저 한백희씨(2006년 당뇨병으로 57세 나이로 사망했다)는 이 상황에서 록의 이미지를 빌려 근사한 포장으로 댄스음악을 선입관의 수렁에서 구출해내는데 기여했다고 할까. 치열한 고민의 성과, 방법론의 승리였던 셈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친 이모로부터 단 한 번도 돈을 받지 못하는 부당대우가 자행되었다고 김완선은 얼마 전 TV에 출연해 털어놓았다.
김완선 덕분에 댄스음악은 무난히 주류로 진입할 수 있었고 10대 시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김완선이 돌아왔다. 음악 판을 싹쓸이하고 있는 현재 아이돌 댄스의 스타들은 20년 전에 같은 무대를 뛰었던 대선배 김완선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줄로 안다. 어느 분야든 경배해야 할 원조는 있는 것 아닌가.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제공: 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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