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 안을 수 없는 미인도, 화가는 왜 그릴까?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시대 화가인 혜원 신윤복이 여자로 나오는 TV 드라마를 본 적 있습니다. 혜원에게 “그림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가 촉촉한 눈빛으로 대답하더군요. “그림은…그리움입니다.”
조선시대 화가인 혜원 신윤복이 여자로 나오는 TV 드라마를 본 적 있습니다. 혜원에게 “그림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가 촉촉한 눈빛으로 대답하더군요. “그림은…그리움입니다.” 그리워서 그리는 것이 그림이라고 말하는 혜원의 눈망울은 그리움에 젖어 있었지요.
‘그리다’는 움직씨이고 ‘그립다’는 그림씨입니다. ‘묘사하다’와 ‘갈망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지요. 묘사하면 그림이 되고 갈망하면 그리움이 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림과 그리움은 밑말이 같아서 한 뿌리로 해석하는 분이 있더군요.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다”라는 멋 부린 말도 귀에 들리고요.
그리움은 어디서 옵니까. 아무래도 부재와 결핍이 그리움을 낳겠지요. 없어서 애타고 모자라서 안타까운 심정이 그리움입니다. 그리워서 그림을 그린다면 그림은 부재와 결핍을 채우려는 몸부림일 테지요. 신선한 과일을 그린 정물화는 한 입 베어 물고 싶고, 풍광 좋은 산수화는 가서 노닐고 싶고, 아름다운 여인 인물화는 곁에 두고 싶은 욕망이 깃듭니다. 그림은 그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드러난 자취지요. 그린 이만 그런 게 아닙니다. 보는 이도 그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그립습니다. 그래서 공감합니다. 공감은 그린 이와 보는 이의 욕구가 겹칠 때 일어나는 작용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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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소식들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연예인의 사생활에서부터 자녀교육 문제, 장바구니 물가, 건강과 환경에 관한 상식, 정치가의 뒷이야기까지, 알아두면 대화를 풍부하게 하는 데 유용하겠지만, 대부분 목적지 없이 둥둥 떠다니는 단편적인 정보들이지요.
목적지란 내 안의 깊은 어딘가, 잘 볼 수는 없지만 바닥이 있는 곳을 말해요.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올 때는 부질없이 떠다니는 정보들 사이로 불현듯, 그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불쑥 수면으로 떠오를 때랍니다. 그런데, 실은 그 바닥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것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결코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으니까요. 오직 글을 쓰는 순간에만 조금씩 틈새를 벌여 암실에서 물건을 꺼내오듯 그 내용물을 끄집어낼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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