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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 자유기고가
조정래 문학 인생 42년선 굵은 대하소설로 민족문학의 진수를 보여줬던 작가 조정래가 올해로 문학 인생 42년을 맞는다. 그의 문학 인생은 ‘글감옥’에 갇힌 ‘인고의 세월’이었고, 우익단체와 권력에게서 협박당하는 ‘시련의 세월’이었으며,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아온 ‘영광의 세월’이기도 했다.
1970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조정래가 선보인 첫 단편 소설은 『누명』이다. 이 소설은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카투사 병사가 미군들에게 도둑 누명을 쓰고 한국군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로,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후 그는 교육계의 비리를 고발한 『선생님 기행』(1970)을 비롯해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1971),
『청산댁』(1972), 『비탈진 음지』(1973),
『황토』(1974), 『살풀이굿』(1975), 『비틀거리는 혼』(1976), 『한, 그 그늘의 자리』(1977), 『미운 오리새끼』(1978), 『장님 외줄타기』(1979), 『모래탑』(1980),
『유형의 땅』(1981),
『인간연습』(1982),
『박토의 혼』(1983) 등의 사회?역사 소설을 차례대로 발표한다. 이 소설들은 다수가 민족 분단을 주제로 한 것이다. 나머지는 소외계층을 다룬 것으로, 이러한 작업들을 총 결산한 작품이
『태백산맥』이다.
『태백산맥』은 <현대문학> 1983년 9월호를 시작으로 6년여 동안의 긴 여정을 거쳐 1989년 총 10권의 단행본으로 완간되었다. 협박과 시련은 3부가 출간된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죽이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비단 협박 전화뿐 아니라 종로경찰서 형사들 역시 수시로 찾아와 소설 창작에 간섭을 했고 심지어는 집필을 위해 ‘성 나자로 마을’에 가 있는 동안에도 그들의 방문은 계속됐다.
그러던 차에 1991년
『태백산맥』은 이적성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태백산맥』을 학습 자료로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년 후 내사를 끝낸 대검찰청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소설 『태백산맥』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미 350만 부 이상 팔린 책을 법으로 문제 삼는 것은 과히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 …… (다만) 일반인이 교양으로 읽으면 괜찮지만 대학생이나 노동자가 읽으면 이적 표현물 탐독죄로 의법 조처한다.”이에 대해 조정래는 다음과 같이 비웃었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읽으면 교양물이고, 건넌방에서 대학생 아들이 읽으면 이적 표현물이다.”1)
시비는 계속됐다. 그가 한창
『아리랑』 집필에 몰두하던 있던 1994년 8개의 반공단체가 조정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로 정식 고발한 것이다. 반공단체가 고발한 혐의 사항은 총 5백여 개의 항목으로 이 고발장은 사법사상 가장 양이 많은 고발장으로 꼽힌다. 그 후 후속작인
『한강』 출간이 완료되고도 두 해가 지난 2005년 5월 마침내 검찰에서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만 11년이 걸린 사법사상 가장 길게 끈 고발사건이었다.
『태백산맥』은 우리 사회의 반공 교육이 사회주의자와 빨치산 투쟁가들을 ‘악마’나 ‘빨갱이’로 매도한 것을 ‘인간’으로 복원시키는 작업이었다. 아울러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농민들의 농지 소유권과 생존권이었다는 점을 간파하며 분단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태백산맥』이 상징하는 건 ‘민족의 허리’이다. 한반도를 지탱하는 등뼈는 바로 남북을 잇는 600km의 태백산맥이며, 38선과 휴전선으로 두 번씩이나 잘린 그 민족의 허리를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자는 게
『태백산맥』의 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아리랑』과
『한강』으로 이어져 식민지 36년 동안 우리 민족이 당한 핍박과 굴욕과 패배의 역사를 투쟁과 저항과 강한 생명력의 역사로 회복시켰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일구어낸 주인공이 다름 아닌 수많은 민중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태백산맥』, 『남부군』 그리고 『지리산』조정래가 3부작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은 게 ‘빨치산 취재’였다. 빨치산은 매우 특수한 영역으로 실제 체험자가 아니면 그 생생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그는 빨치산 취재를 위해 당시 토벌대 활동가들도 만나고, 빨치산 가족들도 취재했지만 큰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생생한 빨치산 이야기들을 누구에게서 얻었을까.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이태의
『남부군』과 이병주의
『지리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부군』은 1988년에 출간된 이태(본명 이우태, 1922~1997)의 작품으로 한국전쟁 당시 저자의 빨치산 활동을 기록한 ‘최초의 빨치산 수기’다. 이 수기는 체험자가 아니면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는 극한의 체험담을 담고 있다. 출간 즉시 큰 반향을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지리산』은 1985년에 일곱 권으로 완간된 이병주(1921~1992)의 대하소설로 빨치산 수난사를 담고 있으며 이 작품 역시 문단과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1972년 월간 <세대>에 연재된 이후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이병주의
『지리산』은 1988년
『남부군』의 출간과 함께 ‘표절 의혹’이라는 유탄을 맞게 된다. 이태가 이병주의
『지리산』이 자신의 수기를 대거 도용했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6권 중간부터 7권 3분의 2까지 상당 부분이
『남부군』과 일치한다.
이태는
“나는 이(병주) 씨에게 분명히 그 원고를 ‘참고’하라고 했고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전화까지 해달라고 했다”며
“(그러나) ‘참고’하라는 것이었지 그대로 옮겨 쓰라는 얘기는 아니었다”고 비판했다.2) 이에 대해 이병주는
“인용의 괄호 속에 넣어 ‘이태의 수기’임을 명시했”고 그의 글을 그대로 실은 건
“이 씨의 수기를 원형대로 보전하”기 위한 선의의 발로였다고 주장했다.3)
한편, 이태의 수기는 1975년 그가 한 주간지에 게재를 의뢰했다가 거절당한 이후부터 1988년
『남부군』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기까지 작가 미상의 복사본으로 문단에 나돌았다. 조정래 역시 동료 작가 백시종에게서 우연히 그 복사본을 받았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빨치산 체험자’의 증언이었다. 그러나
『남부군』이 출간되자, 그때서야 수기의 필자가 이태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수기 내용을 기록해 둔 취재수첩을 미련 없이 버리게 된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빨치산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새로운 체험자가 절실했던 그 순간 조정래에게 뜻밖의 ‘천군만마’가 나타난다. 경제학자 박현채다. 조정래는 박현채를 통해 빨치산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고, 그 고마움으로 그를
『태백산맥』의 인물로 등장시킨다. 소년전사 조원제의 모델이 바로 박현채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8년 한 작가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표절한 사실이 드러났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작가로도 유명한 이선미가 『경성애사』에서
『태백산맥』의 일부를 표절한 것이다.
“중앙에 두 마리의 봉황이 마주 보며 온갖 색깔의 휘황한 꼬리를 양쪽으로 길고 길게 늘였는데, 그 꼬리는 수평으로 나가다가 자연스럽게 꺾여 수직으로 늘어져 있었고, 두 개의 긴 꼬리가 만든 넓적한 직사각형 가운데에 ‘壽*福' 두 글자가 다섯 송이씩의 줄장미 꽃송이에 떠받치듯 자리잡고 있었다.” - 『태백산맥』
“중앙에 두 마리의 봉황이 마주 보며 온갖 색깔의 휘황한 꼬리를 양쪽으로 길게 늘였는데, 그 꼬리는 수평으로 나가다가 자연스럽게 꺾여 수직으로 늘어져 있었고, 두 개의 긴 꼬리가 만들어낸 넓은 직사각형 가운데 '수壽*복福' 두 글자가 다섯 송이씩의 검은 딸기 꽃송이에 떠받치듯 자리잡고 있었다.”4) - 『경성애사』이선미는 위의 묘사를 포함해 총 여덟 군데의 배경묘사를 표절했다고 시인했으며, 한 중앙일간지를 통해 작가 조정래와 출판사에 공식 사과했고 저서를 전량 수거, 폐기하기로 약속함으로써 사건은 매듭지어졌다.
글쓰기의 원동력, 작가적 사명감
조정래는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조시인이자 대처승이었다. 대처승은 식민지 시절 일제가 이식시킨 풍습이었는데, 아버지는 승려 신분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일제의 강압에 의해 대처승이 된 것이다. 조정래는 어린 시절을 절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사답(寺畓)을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해야 한다, 절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승려들은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5)고 주장하며 주지들과 마찰을 빚자 그의 가족은 선암사를 떠나게 된다. 절에서 나온 가족은 전라남도 순천에 정착했는데 1948년 10월 이곳에서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무자비한 진압에 마을은 순식간에 피가 홍수처럼 흐르고 시체 더미를 이루었다. 그의 나이 여섯 살. 조정래는 당시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정도를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철이 들어 버렸다. …… 그때의 체험이 나 자신에게 많은 의문과 질문과 탐색을 반추하게 만들었다. 불행한 그러나 값진 체험이었다.”6)
‘여순사건’은 조정래가 처음으로 겪은 살육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는 ‘빨갱이’로 몰려 심하게 폭행당하며 광주 고법까지 갔으나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태백산맥』 도입부가 ‘여순사건’이 종료된 시점부터 시작되는 건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정래는 1950년 논산에서 한국전쟁을 겪는다. 당시 그는 야뇨증에 시달렸는데, 이는 극심한 전쟁 공포에서 비롯된 정신불안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쟁이 남긴 참혹한 상흔과 그 경험은 이후 그가 천착하게 될 분단과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조정래는 1962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하는데, 대학시절은 그의 작가관을 정립하는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저는 남달리 이 척박한 역사의 땅에 태어남과 문학이라는 것의 특이한 의미와, 글로 써서 남겨져야 할 가치를 심각하게 생각했고, 그 결과 소설은 연애 이야기나 쓰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써야 하는 존엄한 것이라는 생각을 굳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토대 위에서 사회의식*역사의식이 강한 제 소설은 탄생하기 시작했고, 제가 글을 써온 40년의 세월은 그 대학시절에 형성된 의식을 심화*확대해온 노정이었습니다.”7)
조정래는 1977년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판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소설은 미국에서 자행되었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참혹한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헤일리는 모국의 이야기가 백인에 의해 쓰여졌던 달갑지 않은 역사의 잔재를 지우고자 그 책을 썼는데,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용기에 조정래는 큰 감명을 받은 것이다.
조정래를 움직여온 글쓰기의 원동력은 ‘작가적 사명감’이었다. 이 사명감이 없었다면 2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통한 대하소설 3부작 집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42년을 일관되게 역사*사회소설을 쓸 수 있었던 용기와 투혼도 약했을지 모른다.
아래는 조정래가 『허수아비춤』 서문에서 인용한 노신과 정약용의 말이다.8) 이 말로 조정래의 작가관을 갈무리한다.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글(시)이 아니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
조정래 문학의 정수
1,300만 부.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의 총 판매부수다. 초판 2,000부가 판매되기 어려운 출판계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할 때, 실로 대단한 판매고다. 이처럼 수많은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이유이자 조정래 문학의 정수이기도 한 요소는 무엇일까. 대하소설 3부작을 토대로 정리해본다.
첫째, 빼어난 배경묘사다.
그의 대하소설에는 여러 산과 들, 강, 평야 등의 배경이 묘사된다. 벌교 포구의 갈대밭과 인근의 동백나무숲, 가랑비 내리는 제석산, 핏빛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지리산의 피아골, 아득하게 펼쳐지며 하늘과 맞닿는 만경평야의 지평선, 움막집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는 서울의 산비탈 마을……. 헤아릴 수 없는 장면과 풍광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펼쳐진다. 그의 묘사는 섬세하고 사실적이어서 생생한 현장감을 자아내고, 문장 또한 미려하고 유려해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매력을 준다. 흥미롭게도 그 많은 배경 묘사 중 단 한 대목도 같은 문장이 없다. 같은 산, 같은 들녘을 묘사하는 데에도 시간과 날씨와 계절에 따라, 사건의 긴장감에 따라 각양각색의 현란한 문장을 구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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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정래가 취재수첩에 그려넣은 풍경. ⓒ 시사IN북 | |
섬세한 배경 묘사의 바탕에는 취재 스케치가 큰 몫을 담당해왔다. 취재 현장을 담아내는 데 있어 작가들에게 카메라는 필수다. 작가들은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보며 현장의 모습을 최대한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재현하려 애쓴다. 그러나 카메라로는 한계가 있다. 조정래의 표현대로
“70~80리 청산리 골짜기를 무슨 수로 카메라로 찍을 것이며, 몇십 리 겹겹인 연해주의 파르티잔스크 산악지대를 어떻게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겠”9)는가. 여기서 조정래의 화가적 소질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풍경을 직접 스케치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화가가 꿈이었던 조정래. 비록 가난으로 인해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의 재능은 이렇듯 작품을 쓰는 데에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왔다. 좌절된 꿈이 새로운 꿈을 실현하는 자양분으로 승화된 셈이다.
둘째, 1200여 명의 인물 창조다.
이 가운데
『태백산맥』이 280여 명,
『아리랑』이 600여 명,
『한강』이 400여 명을 차지한다. 인물과 사건, 배경이라는 3대 요소로 지탱되는 문학인 소설에서 인물 창조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작업으로 꼽힌다. 작가의 능력은 작품의 양보다 개성 있게 창조된 인물의 양으로 평가한다는 문단의 정설에 따르자면, 개성 있고 생동감 있게 창조된 1,200여 명의 인물은 그 자체로 조정래 문학의 정수를 이룬다. 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각기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로, 이에 맞서는 반공주의자로, 쌀을 목숨으로 아는 소작농으로, 포악한 양반 지주로, 일제 앞잡이 순사로, 연좌제의 희생자로, 산업화의 역군으로 살아가며 한국 근현대사의 장구한 산맥과 도도한 강물을 일구어낸다.
한편, 등장인물 중 누가 주인공인가에 대한 의견은 독자마다 분분한데, 대체로
『태백산맥』에서는 염상진을,
『한강』에서는 유일민과 유일표를 꼽는다.
『아리랑』에서는 방대근을 꼽기도 하나, 유독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이 점을 단점이라고도 말하지만 민중의 애환을 담아내는 대하소설의 성격상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고 해서 재미와 작품성이 희석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소설을 낳은 조정래는 누구를 주인공으로 꼽을까. ‘
『태백산맥』에서의 하대치와 외서댁.
『아리랑』에서의 공허와 필녀.
『한강』에서의 유일표와 강숙자’다. 그리고 이들을 선정한 이유로
“바르고 굳센 민중성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10) 그가 소설마다 남녀를 각각 주인공으로 선정한 것은 ‘우리의 역사는 남녀가 함께 이끌어왔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근현대사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그 이름은 다름 아닌 민중이었다.
셋째, 탄탄한 구성이다.조정래의 소설은 사건 전개가 매끄럽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펼쳐나가는 수많은 사건들은 결코 작위적이지 않고, 우연으로 타협하지도 않는다. 인과관계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과정이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 압권은 ‘이야기의 힘’이다.
만석꾼의 아들이 주색잡기로 몰락해가는 이야기. 근친인 줄도 모르고 사랑을 나누는 한 빨치산과 무당의 이야기. 가난한 수재들이 국회의원의 장학사에서 공부하며 법조계에 진출하는 이야기. 부잣집 외동딸이 공산주의자의 아들을 사랑하며 부모와 갈등을 빚는 이야기.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대기업의 야심찬 충신으로 변해가는 이야기……. 이렇듯 흥미진진한 이야깃꺼리들을 발굴하고, 창안하고, 수집해 밀도 있고 흡입력 있게 그려가는 조정래는 역시나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소설이 빛을 발휘하는 데에는 강한 집중력과 체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정래는 말한다.
“대하소설에 대해 정설처럼 되어 있는 한 가지 중론이 있습니다. 대하소설은 뒤로 갈수록 지루해진다. 이것은 치명적인 결함입니다.”11)
체력이 약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저하되면 등장해야 할 인물이 실종되고 구성이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조정래는 대하소설을 쓰는 20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고,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왔다.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흡입력 있는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각고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넷째, 민족의 복원과 민중의 발견이다.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가 소설의 기법과 관련된 것이라면, 마지막 네 번째는 작품세계와 관련된 것이다. 대하소설 3부작은 분단 모순과 일제 식민 잔재가 은폐하고 유린한 ‘민족’의 실체를 복원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울러 잊히고 홀대받은 민중의 참모습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는 지배 계급과 권력가들이 중심이 되어 서술돼왔다. 간혹 민중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극소수의 인물들만 부각되었을 뿐이다. 조정래의 소설은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온 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민중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 전달한다.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민중에게 저마다의 이름을 부여한다.
인간답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빨치산 투쟁을 전개해가는 하대치, ‘빨치산’과 그의 ‘세포’로서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정하섭과 무당의 딸 소화,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와이까지 건너가 평생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방영근, 압록강과 만주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펼치는 스님 공허,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정보기관의 피 말리는 감시와 모멸을 받으며 살아가는 유일민과 유일표,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가 움막집 신세를 면치 못하는 천두만, 스테인리스 칼날에 손가락이 잘려나간 나복남, 수치심을 무릅쓰고 날마다 몸수색을 당하는 버스 차장 김명숙, 폐병으로 피를 토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미싱공 이미순, 돈벌이를 위해 서독으로 이주한 광부 박갑동과 치매병동의 간호원 김광자…….
이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바르고 올곧게 살아간 민초들이었고,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자신의 몸을 희생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오늘날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산업화의 역군이었다. 민족의 복원과 민중의 발견이야말로 조정래 문학의 정수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참의미일 것이다.
| 주 |
1)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시사IN북, 2009, 268~269쪽
2) 이태, 「참고 한계 넘은 도용」, <동아일보>, 1988년 8월 16일 인터넷판.
3) 이병주, 「사전 승낙 얻은 인용」, <동아일보>, 1988년 8월 16일 인터넷판.
4) 구영식, 「이선미 작가의 끝없는 <경성애사> 표절」, <오마이뉴스>, 2008년 1월 2일.
5) 조정래, 앞의 책.
6) 황광수 엮음, 『땅과 사람의 역사』, 실천문학사, 1996, 355쪽.
7) 조정래, 앞의 책, 101~102쪽.
8) 조정래,
『허수아비춤』, 문학의문학, 2010, 7~8쪽.
9)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시사IN북, 2009, 145쪽.
10) 조정래, 앞의 책, 140~141쪽.
11) 조정래, 앞의 책,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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