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를 보면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이 나온다. 창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보았다고 말해도 전혀 감흥이 없는 어른말이다. '십만 프랑 짜리'라는 단순한 수식어 하나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똑똑한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열여섯 소년은 결코 숫자에 익숙한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 소년은 지금 초등학생부터 40-50대 직장인까지 하나같이 이력에 한 줄 더 넣으려고 '스펙'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위대한 대한민국의 '어른'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이 되지 않겠다 결심한 그 소년이 학창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과 체육이란다. 혼자서 끙끙대며 주어진 문제를 응용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기른 그 소년은 자연스럽게 계산에 능한 사람이 된다. 주위 모든 사람이 그의 능력에 박수를 보냈기에 그 소년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덕분에 스펙을 쌓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의 이력에 넣고 싶어하는 대학도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그 소년은 자기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학교와 이력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질려버리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대학'에서 다시금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_ 어른 成人 adult
그렇다. 나는 어른이다. 영화관에 19금 영화를 보러 가도 주민등록증이라는 통행증이 있기에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다. 군 생활도 무사히 마쳤고, 그렇게 취업하기 힘들다는 시기에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지금 책세상에서 뛰어 놀고 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너를 밟아야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좀처럼 여유를 찾기 힘든 것이 내가 살아가는 현장이다.
이런 현장 속에서 자기 일에 책임져야 할 일이 많은 어른은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가 쉽지 않다. 어른들은 효율성과 경제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시간마저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시간을 아끼고 잘 써야 성공한다는 논리는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무엇이든 '빨리빨리' 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 이런 곳에서는 내 시간을 다른 사람에 의해 빼앗겨 '방해'받는다고 느껴지면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쏟아낸다. 시간은 금이니까.
존슨은 오늘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를 기다린다.
Heute Kommt Johnson Nicht Kolumnen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의 저자 페터 빅셀 아저씨?는 내가 되고 싶어 하던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 어른'이다. 그래서 좋다. 글을 쓰기 위해 꾸역꾸역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이며, 존슨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는 어른들보다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선입견 없이 그저 들어주는 지적장애인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효율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것이기에 효율만을 목표로 하는 사회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이 사람이 참 좋다.
페터 아저씨는 '시간'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옛날이 지금보다 나았던 이유도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기다리기', '바라보기', '이야기하기' 같은 원형적인 행동이 가능했던 시절에는 본질적인 삶의 기쁨과 소중함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묵상과 글은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자신의 삶을 내준 현대인들이 다시 자신의 일상을 되찾고 자신만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도록 돕는다.?
그래. 'to be'가 'to do'를 결정하는거야!
이 책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게 한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 환경이 어떻다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진짜 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진짜 내 내면을 가꾸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에만 신경쓰면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계산하기에 바쁘신 몸. 젊음과 열정이라는 최고의 무기는 다 팔아먹고 이름뿐인 젊음과 식어빠진 열정으로 주어진 삶과 시간을 살아주는데 급급하지는 않는지. 다른 이와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하고 진실하기보다 덧붙이거나 덮어두고 그렇지 않은 척, 또는 그런 척 수준급 연기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그러셨다. 'to be'가 'to do'를 결정하는 거라고. 무언가를 행동함(to do)으로? 나라는 사람의 존재(to be)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to be)에 따라 내가 하는 행동(to do)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밥그릇을 좀더 차지하려고 싸우는 세상, 자신이 좇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떡 하니 자신의 모? 열정과 시간을 쏟아내는 세대 속에서 살아가는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to do'가 아니라 'to be'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금 곱씹어본다.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이 되지 않겠다는 소년의 마음으로.
페터 아저씨는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아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많은,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이었던 에밀을 진정한 어른으로 꼽았다. 그는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에밀은 존재의 가치를 온전히 알고 그대로 살았던 사람이었으리라.
어린왕자가 그러했듯이 페터 아저씨도 나로 하여금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누구나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문제를 가지면 살아간다는 사실. 숫자에 익숙하고 효율만 중요시하기보다 그보다 중요한 그 무엇을 위해 효율을 비효율로 치부해버리는 '바보' 어른이 되리라는 다짐도 하게 한다.
그러기 위해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몽땅 쏟아내고 싶다.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기보다 여류작가의 수필 한 편에 설레어 하는 어른⁴이 되어 페터 아저씨처럼 인생의 후반전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시간이 아주 겁나게 많은 어른이었다'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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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리빨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몸으로 느낀 것은 중학교 시절이다. 집에 올 때마다 집 뒤에 공사 중인 아파트가 하루 사이에 한 층씩 올라가는 것 같았으니까. 오. 놀라운 한국의 건축능력.
2) 왠지 이 책의 저자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꼭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3) 예스24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책소개에서 인용
4) 한 시대를 풍미한 015B의 명곡 '수필과 자동차' 중에서
컨텐츠팀 김도훈 (eyefamily@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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